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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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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눅 16:19-31)


I. 끝을 아는 지혜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몹시 실망하고 있던 어느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하늘 보화창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한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창고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물었더니 “간구창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간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 보화 창고를 열고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빈 창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더 큰 창고가 있었는데 보화가 하늘 천정까지 가득히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고는 무슨 창고입니까?” “감사창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작은 은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나누어 주려고 쌓아 두었던 보물창고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도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물이 쌓여져 있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이 성도는 성전에 엎드려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감사했습니다. 하늘 보화가 신령한 은혜가 넘치게 되었더라는 얘기입니다.
감사엔 참 신비가 있습니다. 감사할수록 더 커지는 신비 말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축복을 원하십니까? 
가정에 보화가 쌓이길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일은 한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언젠가는 마지막 추수감사주일을 보내고 그 결실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출발이 있으면 종착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끝이 있는 것을 알고 삽니다. 

역사는 나선형도 아니고 돌고 도는 윤회도 아닙니다. 다만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고 종착역이 있습니다. 이 역사의 방향에 따라 다만 인생은 한 번 지나갈 뿐입니다.  

세상적인 일에는 연습이 있지만 인생은 연습게임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대로 종말이요 한 번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목적을 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이대로 좋고 이대로 만족할 것인가? 다시 한번 깊이 물어보아야겠습니다. 이대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인생엔 요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II. 부자와 지옥

오늘 아침 우리는 인생의 종착역에서 서서 절망적인 후회와 영원한 탄식으로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없이 살다가 저 지옥에 간 부자입니다. 그는 권세의 자색옷과 기름진 음식으로 연락하여 온 몸은 기름기가 번질거렸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는 부자집 대문간에 가마니를 깔고 개들의 헌데를 핥아주는 위로 속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때가 되자 부자도 죽었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인생의 종말이 저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천사의 손에 받들려 낙원에 갔고 부자는 음부의 고통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귓전에 부자의 고통과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여러분 누가 돈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가요.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라고 했던가요. 부자의 영화가 어디로 갔으며 부자의 재물이 무슨 소용이며 그가 누렸던 쾌락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본문의 부자는 얼마나 후회하고 탄식했을까요? 재물을 가지고 세상쾌락에만 젖어 살았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이제는 땅을 쳐도 소용없고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제 다섯 형제가 거기 있습니다.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고통받는 곳에 그들은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사람을 보내어 그들에게 “경고하게”하여 주십시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자기처럼 살고 있는 다섯 형제들에게. 그뿐입니까? 여러분과 저에게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부자처럼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소리를 진지하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천당과 지옥은 성경이 가르치는 엄숙한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목은 현대에서 사리진 설교 제목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연극과 코메디 그리고 문학작품이나 농담에서 우리는 천당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천당과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들은 것이 언제입니까?

주일학교 다니는 학생에게 학교선생이 천국이 어디있고 지옥이 어디있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어린 학생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내가 가는 길로 가면 천국이 있고, 선생님이 가시는 길로 계속가면 지옥이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D.L. 무디 선생은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할때 마다 항상 눈물이 가득 고였더랍니다.  최후의 추수 때를 모르고 어리석게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생각할 때 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옥에 갈 영혼들을 생각하고 울었던 무디의 눈물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단테 신곡 지옥편에 보면 지옥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답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이제부터 모든 희망을 버려라!”

예수님은 이 지옥의 고통을 표현하실 때마다 그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III. 지옥에 간 이유?

1.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부유한 것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유함 때문에 영적무관심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아마 부자는 지옥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적어도 저는 나사로를 우리 집에서 추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잘못입니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잘못이다.” 지옥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관심속에서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사람들이 간간이 지옥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지옥이란 단어를 완전히 떠나지 못할까요? 성령의 경고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누가 감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거기에 가야 할 사람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지옥이 없기를 바란다고요?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2.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옥에 간 제일 중요한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절을 보십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부자는 자기가 회개하지 않아서 그곳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틴 루터는 “내가 천국에 도착하는 그날, 천국문에서 하나의 현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현판에는 「오직 회개한 자」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3. 그는 입술신자였습니다

형식적인 신자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입술로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믿음을 가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때로 기도도 했고 교회도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세나 영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전혀 기억하지 않고 살았던 현실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현세적이고 순간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영생, 구원, 전도에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최고의 사랑이 있다면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최고의 효도가 있다면 부모님에게 구원을 대접해 드리는 일입니다. 최고의 우정이 있다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최고의 유산이 있다면 믿음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한 초등학생의 작문 중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광부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난 어차피 광부니까 열심히 일해야 되겠지만 너는 커서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 하셨다.

막장 인생을 사는 한 아버지의 피맺힌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40도가 넘는 깊은 갱속에서 시커먼 연탄가루, 돌가루를 마시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괴로움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의 바램이 있다면 내 자식 만큼은 이 고생하지 않고 살아 주기를! 막장 인생이 되지 않아 주기를!

알파코스, 목장프로포즈, 특밤... 왜? 우리는 이 몸부림을 하는 것입니까? 
나 혼자 예수 믿기도 벅찬데 말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지옥 보내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불에 타 죽는 사람들을 살려내 보자고 몸부림을 하는데 나 혼자만 무관심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잠든 영혼들이 계십니까? 깨어나십시오. 영혼의 깊은 잠을 즐기시는 분이 계십니까? 깨어나십시오. 지옥에서 영혼을 건져내는 사역에 힘을 모읍시다.

4. 생명책에 그 이름이 누락되었기 때문에

또 한 원인은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흥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거지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사로입니다. 

그러면 부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성경에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 때에는 누구의 이름이 더 영광을 얻었습니까? 틀림없이 부자의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이 거지의 이름에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했습니다.

부자가 죽었을 때 그의 이름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올 정도로 그 장례식은 호상이었습니다. 그는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의 일생을 투자하여 왔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빛내는 것이 그의 생애의 모든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날에 그는 하늘에서 기억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사로! 그 이름을 땅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이름은 주님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IV.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없는 인생입니까?

인생의 마지막 추수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인생을 영원히 후회없이 산 사람은 사랑하며 산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사랑하고 후회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 지옥에 간 부자를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자기 집에 남아서 장롱 속에 쌓아놓은 헌 이부자리 하나라도 왜 나사로에게 덮어줄 수 없었을까요? 자기 밥상에 있는 음식하나를 자기 손으로 주지 못하고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추위에 떨고 있는 나사로에게 왜 이부자리 하나 나눠줄 수 없었을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쩔쩔매고 있는 불쌍한 나사로에게 밥 한 그릇을 줄 수 없었을까? 

제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만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제 가슴을 아프게 하는 얘기 하나가 있습니다. 결혼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아내도 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 였습니다. 토큰이 없어서 제대로 버스를 탈 수 없는 가난한 신학생 시절이지요. 가끔은 쌀독을 뒤지는데 쌀 한 되박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할 때도 가끔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도 간밤에 먹었던 찬밥 한 그릇을 먹고 학교를 향하여 문을 나서는데 우리 집 대문에 거지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김치하고 밥!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데 한번 더 나를 붙잡더니 김치하고 밥! 외쳤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그런데 찬밥 한 그릇, 김치 한 그릇이 제대로 없었습니다. 학교는 지금 지각하게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밥 한 그릇 주겠지. 모른척하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한 10분이나 달려가다 아니다. 옆집에서 밥을 얻어서라도 줘야 겠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골목에 계실까?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 다니며 할아버지를 찾아보았지만 그 할아버지는 안 계셨습니다.  
사랑에도 기회가 있고 밥 한 그릇에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실패는 사랑의 실패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과 돈벌기에는 바쁜데 자식과 아내를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업합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데 쓸 수 없는 돈이라면 그것이 저주요,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직업이라면 그 직업은 불행입니다. 사랑하며 살 수 없는 인생이라면 사는 것이 고통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업과 명예와 성공은 악입니다. 

원종수 권사의 간증집에 보면 
“주님위해 쓸 수 없는 기술은 저주다. 주님을 위해 쓸 수 없는 돈은 저주다. 주님을 위해 쓸 수 없는 건강은 저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소유가 사랑하기 위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이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요 높은 위치는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생최대의 실패는 사랑하지 못하고 산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고라도 사랑을 얻었다면 이는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감사의 씨를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라고 한다면 감사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감사는 마치 공으로 벽을 치는 것과도 같아서 감사하면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 가장 지구상에 불쌍한 나라는 방글라데시라고 배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동전 한푼,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서 다리를 자르고, 팔을 잘라서 아이들을 밖에 내어놓는 다는 겁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동전 하나씩 던져 준다는 거지요. 그런 보고를 듣고 신학교 다니던 정성균이라는 신학생이 광나루 언덕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 나는 방글라데시에 재물이 되겠습니다. 

그렇게도 매일밤 매일밤 방글라데시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더니 결국은 방글라데시에 선교사 되었습니다.  모슬렘 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팔 다리가 부러지기를 여러 번, 풍토병에 걸려서 가족들이 죽기도 하고 물이 맞지 않아서 이빨이 다 빠져 이빨이 하나도 남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결국은 젊은 나이에 목숨을 방글라데시에 묻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간증집에 보면 “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성경의 “감사”라는 말을 번역할 어떤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감사하지 못한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요, 감사를 모르는 민족은 저주받은 민족이더라. 
우리가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유창한 영어를 하지 못해도 Thank you.  Excuse me. 이 말만하면 무식하다는 얘길 안 듣습니다. 여행하는데 별로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Thank you)  실례합니다.(Excuse me)” 이 말만하면 괜찮은 사람 대접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Thank you - 이 말 하기가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지 모릅니다. 

카네기는 말하기를 “배은 망덕은 들풀과 같아서 가만히 두어도 자라나지만 감사는 장미와 같아서 계속 길러야 자라난다”고 말했습니다.

불평 불만은 가만히 두어도 자란다. 원망과 불평은 아무교육이 없어도 저절로 자라나더라. 그래서 자주 뽑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감사는 가만히 두면 자라나지 않는다. 장미처럼 자꾸 물을 주어야 하고 가꿔야 한다. 

기억하십시다! 
여러분 감사하는데도 기회가 있습니다. 전도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지옥의 불행이 무엇입니까? 기도가 중단된 것입니다. 기도가 차단된 것입니다. 
부자가 아무리 기도해 보았지만 지옥의 기도는 응답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선교해 달라고 전도해 해달라고 몸부림을 해 보았지만 지옥에서는 선교가 불가능해 집니다.  
충성도 헌신도 기도도 선교도 전도도 이 땅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은 기회인 것입니다. 이 땅의 생명이 다하면 모든 기회가 다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어진 분복들을 감사하며 살아가십시다.  

V. 모든 게 감사다

꽃동네 한 사제는 얘기했습니다.  
“얻어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깡통을 주어도 깡통을 손에 들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두 다리로 걸어가서 밥 한 술 얻어 올 수 없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밥을 비벼줘도 제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거지요. 
밥을 먹었는데 제 배설기관으로 배설할 수 없는 사람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급한 순간에 버스를 놓쳐 안타까울 땐 즉시 다음 버스가 있음을 기뻐한다.
몸이 아파 괴로울 땐 건강의 고마움을 절감하며 기뻐한다.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할 땐 내 능력의 한계를 깨치게 됨을 기뻐한다.
다른 이에게 내 실수가 드러나 부끄러울 땐 겸손을 실습할 기회임을 기뻐한다.
오해 받아서 슬플 땐 인내할 수 있는 기회임을 기뻐한다.
이 모든 일들이 신앙안에서는 더욱 가능한 것임을 기뻐하고 감사한다.(이해인)

인생을 살다보면 버스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 기회를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연약할 때 약한 자를 더욱더 강하게 쓰시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기 때문에 나는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겁니다. 내 인생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하나님 당신만을 의지합니다. 
주님을 붙들 수 있음에 우리는 감사한 것입니다. 내 실수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덮어주시는 주님 내게 계시니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눈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내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손발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내 다리로 걸을 수 있고 내 손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나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 내가 내 입술로 내 혀로 말하며 살 수 있으면 어떤 고통도 나는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손발이 없습니까? 혀가 없습니까? 눈이 없습니까? 내게는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왜 감사할 수 없더란 말입니까?

한 맹인 음악가의 노래가 있습니다. 

아내가 꿈에 나타날 때도 소리만 듣지 얼굴이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소리뿐입니다.
사람들이 봄을 얘기하지만 내겐 봄이 없습니다.  
느껴지는 봄이 있건만 나는 초록색을 모릅니다.
아내와 내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은데 
아이들이 재롱부리며 웃는 얼굴을 나는 본 일이 없습니다.
태양과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나는 모릅니다.
이 모든 것 한 번만 보고 다시 눈을 감는다 해도 나는 한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게 감사요 은혜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인생 오늘 십자가 밑에 묻어 두십시다. 감사하기로 결단하십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복을 헤아려 이웃을 더듬어 나눌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단하십시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영혼의 열매를 거두는 결실의 계절에,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내 가족, 내 주변의 사람들을 더듬어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는 기회로 가져 보십시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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