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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함정 - 세속화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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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함정 - 세속화 (계 3:14-22)
  

그리스도인은 늘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에 빠지거나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관계의 문제로 미움과 갈등 속에서도 용서하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닥치는 각종 고난들을 잘 이겨내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고 내 신앙이 자꾸만 모호해 지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오늘은 금년으로 494주년이 되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가 너무 세속화되고 타락하여 마침내 개혁운동 일어났습니다. 기독교는 처음 예수님이 오셔서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2명이 120명으로, 3천명으로, 5천명으로, 그리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로마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마침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서 유럽전체가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그때 곳곳에서 기적과 뜨거움과 나눔과 눈물 그리고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흥하게 되자 교황권이 막강하게 되었고 결국 교회가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517년 10월 31일 마침내 중세 기독교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는 길이고 생명입니다. 종교가 길을 잃고 생명을 잃게 되면 하늘로부터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그렇게 길과 생명력을 잃은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계시록 2,3장에 나와 있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곱 교회는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계시록 2,3장에는 여섯 교회 모두에게 칭찬과 권면이 들어 있지만 유독 한 교회 라오디게아교회만은 책망으로 일관합니다. 그 책망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말씀은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이 극심하게 형식화되었음을 질타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교통의 요충지였고 모직공업단지가 있었고 의과대학까지 있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 10여km 떨어진 히에라볼리라는 곳에서 온천수를 끌어다 온수를 사용할 정도로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또 기원 60년에는 대지진이 발생하여 로마가 재건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자력으로 재건하겠다며 거절했을 정도로 자존심과 부요와 풍부를 누린 도시였습니다. 거기다 다른 교회와 달리 그 시대의 핍박도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교회는 신앙이 미지근하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아니면 내 입에서 뱉어버리리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히에라볼리에서 끌어온 온천수는 10km를 흘러오면서 미지근하게 됩니다. 게다가 물속에는 철분과 석회질이 많아서 그 물은 마시기에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내 입에서 내치리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주 무서운 책망입니다. 그 결과 라오디게아 도시는 말씀 그대로 지진으로 인하여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서서 종교개혁이라도 일으켰더라면 그런 재앙은 만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가 길을 잃으면 이렇게 됩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신앙의 최대의 적은 이렇게 뜨뜻미지근한 모호함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은 언제나 내 신앙이 향상되고 순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개혁해야 하고 정화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순전한 신앙을 위해 몇 가지 배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풍부의 적용 

풍부와 평안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잘 관리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도 풍부하고 평안했습니다. 분명 그것이 큰 은혜인데 그것 때문에 신앙이 모호해졌습니다. 그래서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고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스코틀랜드는 장로교의 발상지입니다. 그 도시가 옛날 얼마나 뜨겁고 부흥하였는지 그 도시에 서 있는 웅장한 건물들과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열심 그 뜨거움 다 사라지고 교회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유지가 어려워 술집에 팔리고 회교도들에게 팔려나가 술집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건물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너무 평안하고 풍부하니까 모두 신앙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는 평안과 풍부를 잘못 활용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서양과 서구세계 기독교가 모두 그렇게 변해버렸습니다. 오늘 영국은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 그리스도인 중에서 단지 4%만 교회에 나오고 있고 독일도 5%, 미국은 그나마 20%가 교회에 나온다고 합니다. 

기독교 초기에 핍박이 가해질 때는 믿음이 번쩍번쩍 빛이 났었는데 그 후 평안해지고 풍부해지니까 느슨해지고 미지근해지고 모호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어설프게 핍박하는 독재자는 어리석은 독재자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를 그냥 놔두면 느슨해지고 미지근해져서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세속화 배격 

중세 기독교는 신앙이 점차 세속화 되어갔습니다. 신앙이 세속화 되면 기도와 예배와 믿음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와 믿음이 흐려지면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세교회가 성직을 매매하거나 면죄부를 만들어 파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성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늘이 두려워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영적 상태가 오염되거나 메마르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지는 법입니다. 오늘도 교회건축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 크게 짓자, 한 평이라도 더 크게 짓자 하고 서로 경쟁합니다. 그리고 건축 후 수백억씩 빚을 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빚을 갚느라 수년 동안 전도나 선교에 대한 보조를 중단합니다. 또 빚을 갚게 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하고 빚을 갚아야 하니 헌금하라고 뜨겁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이 기도이고 예배입니까? 오늘 교회도 중세 때 못지않게 세속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예배와 믿음이 흐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화가 무서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내 신앙의 세속화와 교회의 세속화를 배격해야 합니다. 아니면 나도 교회도 세속화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재정의 투명함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로 인한 타락과 방종을 방지할 수가 있습니다. 주일에 드리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고 제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헌금을 위해서 문 앞에 통을 놓지 않습니다. 제물은 예배 때 자신의 손으로 정중하게 봉헌하는 기쁨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정중한 봉헌이고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어른께 자신의 두 손으로 공경하듯이 드리는 것, 그것이 봉헌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도 온라인으로 얼마든지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문해서 직접 두 손으로 드리는 것이 더 공경의 모습이고 정중함입니다. 

그래서 저는 헌금도 그렇게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드려진 헌금은 더욱 정확하고 투명하게 관리되고 사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그 헌금으로 주식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는 헌금으로 많은 복권을 사기도 했답니다. 복권을 타서 교회건축을 하려고 했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오늘 몇몇 큰 교회들이 불화를 겪고 있는데 그 불화는 모두 교회재정을 불투명하게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교회재정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중세시대에 면죄부를 판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개인이나 단체나 나라나 교회가 타락하는 것은 모두 물질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매년 연말이면 교회는 물론이고 각 기관들도 엄격하게 감사를 받습니다. 너무 엄격하다고 불만도 있지만 감사는 정말 엄격해야 합니다. 그래야 훈련도 받고 헌금 귀한 줄도 알게 됩니다. 혹자는 남여전도회가 교회 보조도 받지 않는데 왜 감사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문의해 오기도 하는데 그러나 감사는 꼭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낸 재정도 모두 헌금입니다. 그 재정을 정확하게 사용하였는지를 감사받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재정에 손을 대는 신자들도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습니다. 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감쪽같은 방법으로 헌금에 손을 대는 사례들을 듣고 있습니다. 어떻게 헌금에 손을 댈 수가 있습니까? 그만큼 물질에 대해서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교회분열 회개 

한국교회의 특징은 분열과 갈등입니다. 일제강점기시대에는 한국교회가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공동의 타깃이 없어진 한국교회는 곧 바로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초부터 마치 핵분열 하듯이 갈라져서 오늘 장로교만 100개 교단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 분열은 하나의 체질화를 이루어 오늘 교회들이 조용한 교회가 없습니다. 온갖 갈등에 휩싸이고 분열직전에 처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가 되라고 하셨는데 들은 척도 안합니다. 그 불화와 갈등의 원인을 보면 별 이유들도 아닙니다. 어느 교회는 성가대가 부흥해서 의자를 서너 개 더 놓아야 하는데 이 문제를 당회에 부쳤더니 결정을 못하고 3년간이나 회의를 했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같은 교회의 갈등풍토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각종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 있던 젊은 층들의 이탈현상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이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안티들로 나타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들을 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결과들입니다. 오늘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합니다. 

교회의 기득권자들인 노년층이 젊은 층에 대한 이해가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위해서 찬송도 예배도 현실성 있게 변화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노년층들이 한사코 반대합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찬송을 부르면 교회가 망하는 줄 알고 야단을 치기만 합니다. 그러니 그 교회에 젊은이들이 출석하겠습니까? 교회에 구세대들만 자리 잡고 앉아있으면 그 교회에 미래가 있겠습니까? 희망이 있겠습니까? 

오늘 교회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부흥을 위해서 예배당을 내주고 교육관으로 옮기는 아량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야 그 교회에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공기가 신선해지고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교회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올 수 있도록 온갖 배려와 애정과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가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자기고집 때문에 분열하고 갈등하고 불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갈등과 분열의 일반화된 체질이 오늘 한국교회로 하여금 위기로 빠트렸고 젊은 층들을 대거 탈교회화 하게 만든 원인이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갈등과 분열을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이르게 된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시편 18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표제를 보면 다윗이 모든 적의 위험으로부터 건짐 받은 후에 지은 시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윗은 산전수전 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이 시를 보면 다윗 안에 확신이 가득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뜨겁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아주 흔쾌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에서 말씀과 기도와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먼저 내 안부터 부흥시켜야 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믿음과 소명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무조건 “아멘” 할 수 있는 신앙의 여정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이라는 뜻 속에는 “예”만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의 종교이고 “아멘”의 종교입니다. “예”가 있을 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에게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중심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파워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버스나 봉고차를 보면 교회이름표를 붙이고 다닙니다. 물고기모양을 달기도 하고 다른 기독교 마크를 달기도 합니다. 그런데 얄밉도록 끼어들고 추월하고 난폭운전을 도맡아 합니다. 제가 지방에서 목회할 때 어느 여 집사님이 남편을 전도해 달라고 해서 집에 찾아가면 남편이 나가버리고 집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 남편이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서 옳거니 하고 갔더니 저를 보고 깜짝 놀라며 “목사님 회개합니다.” 하고 말하며 “사실은 제가 세례를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한번은 어렸을 때 시골교회에서 받았고 또 한 번은 군에 가서 받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부인이 너무나 놀랐습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남편이 세례 받은 것을 그날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자아상이 불투명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문제가 있다면 신앙인으로서 자아상이 너무 불분명하고 흐리멍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안에 영성이 너무 허약하고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내안에 무슨 힘이 있어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하고 신앙을 불같이 고백하게 하겠습니까? 

중세시대 종교지도자들은 믿음도 성결도 사명감도 신앙양심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세속화된 것입니다. 면죄부를 팔아먹는데도 사제직과 주교직을 돈 받고 팔면서도 양심에 거리낌도 없었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영성이 메말라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세속화 되면 인간주의가 나타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젊은 신앙인들이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회복운동입니다. 잃어버린 말씀과 믿음과 은혜를 회복하자는 운동입니다. 종교가 길을 잃으면 이렇게 버림받게 됩니다. 먼저는 하늘로부터 버림받고 다음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습니다. 버림받은 종교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을 살피고 내 교회를 살피며 내 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안에 있어야 할 말씀과 영성, 은혜와 믿음이 고갈되면 나는 더 이상 신앙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입에서 진정한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고 그 고백으로 살고 사역하고 기도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영이 임재하시고 성령역사가 나타나고 기적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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