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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지 못하고 위하는 (행 17: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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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고 위하는 (행 17:16-34) 
 
 
바울의 아덴 사역과 관련해서 아레오바고 설교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베뢰아에서 도피한 바울은 “아덴”(Athens)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렸습니다(16a). 헬라의 수도인 아테네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와 플라톤(Plato, BC 428-348)을 배출한 곳이며, 철학과 문학과 웅변과 예술이 발달했고, 민주주의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주전 146년에 로마에 정복되었지만, 헬라 문화는 도리어 로마세계를 정복하여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지요. 그곳에는 커다란 페리클레스 음악당이 있었고, 좌석수가 6만개나 되는 경기장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예술성이 최고조에 달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을 느낍니다(16b). 로마의 시인들이 사람보다 신을 발견하기가 더 쉽다고 풍자했을 만큼, 에덴에는 금과 상아를 사용해 12m 높이로 만든 수호여신 아테나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각종 신전들과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신상들이 넘쳐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술적 재능과 지성적 능력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예술 문화의 최고 걸작들이 모두 우상 숭배를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겠지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도 찬미했던 바울이 에덴에서 분노했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일은 성실하게 예배당에 다니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마음에 분명한 성경적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사도와는 반대로 감옥에서는 분노하고 에덴에서는 찬미하기 십상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넘쳐나는 반신국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마음의 반응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위대한 음악성을 가진 ‘아이돌’(idol, 우상)에 감탄하여 추종하는 현상들이 온 도시에 가득한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야 할 교회가 무감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하나님 주신 재능들과 시간들이 헛되이 낭비되거나 반신국적으로 사용되는 현상들에 대해 마땅히 거룩한 분노를 느껴야 할 것입니다.

분노를 느낀 바울은 무엇을 했습니까?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17). 바울은 종교개혁기의 급진파들처럼 우상을 부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후일에 디모데에게 권면했던 것처럼 유대인 삶의 중심지인 회당과 헬라인 삶의 중심지인 저자(아고라)에서 “날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변론했습니다(딤후 4:2).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아덴 사람들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왔겠지요(살전 1:9).

논쟁자들 중에 “에비구레오” 철학자들은 인생의 목적을 쾌락에 둔 사람들입니다. 원래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2-271)가 주장한 쾌락은 마음을 불안케 하는 모든 외부의 번뇌들에 대해 초연해져서 영혼이 평정을 느끼는 아타락시아(ataraxia) 상태를 뜻했습니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원자론을 받아들인 에피쿠로스는 삶과 죽음조차 원자라는 물질의 모임과 흩어짐에 불과하며, 신은 인간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초월’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철학을 따르면 신의 뜻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나 심판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 없게 되지요.

제논(Zeno, BC 335-263)이 채색된 회랑(painted stoa)에서 가르치므로 스토아학파라 불린 “스도이고”(Stoci) 철학의 세계동포주의(cosmopolitanism)는 로마제국 도덕이 되었습니다.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재위 161-180)도 스토아 철학자였지요. 신은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다는 범신론에 기초해 자연에 순응함을 이성적인 존재가 취할 최고의 도덕으로 여겼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모든 것을 우연으로 돌리며 현실 도피로 쾌락을 추구한 반면, 스토아학파는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감내하며 요지부동하는 아파데이아(Apatheia) 상태를 추구했습니다.

이런 사상들로 무장한 아덴 철학자들은 죽음과 몸의 부활을 전파하는 바울을 아주 수준 낮은 사상을 전하는 “말장이”로 보고 멸시했습니다. 일부는 “예수”와 “부활”(아나스타시스)을 한 쌍의 새로운 “이방신들”로 오해했는데(18), 새로운 것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던 그들은 바울에게 좀 더 자세히 듣기 원했습니다(19-20).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아레오바고”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후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에베소에서 3년 사역했지만 그의 설교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방 문화와 지성의 중심지인 아덴에서의 설교와 비슷했기 때문이겠지요.

바울의 유대 회당 설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청중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약의 약속을 인용하며 십자가와 부활로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는 접근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성경의 약속도 모르는 에덴 사람들에게는 우선 참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의 책임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서 이탈한 죄의 상태에 있음을 지적한 후, 그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접근방식이었지요. 이방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할 필요를 느꼈던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이 설교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22-23절은 최상의 철학적 지식을 가졌음에도 “알지 못하는 신”을 섬겨야만 하는 그들의 한계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며 시작하는 서론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졌다고 해도 사람 스스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어렴풋하게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는 있어도 그분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며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뜻을 가졌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당신님을 계시하셨고, 당신님의 존재와 뜻이 성경에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전해야만 참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롬 10:17).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천지의 주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이 그분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24, 7:48; 왕상 8:27). 또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신지라 뭔가 부족한 듯 사람에게 섬김 받지 않으십니다(25). 그분은 세상으로부터 멀리 ‘초월’해 있어 아무 일도 간섭치 않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신과 같지 않으며, 모든 만물 속에 ‘내재’해 있기만 하는 스토아학파의 비인격적인 신도 아닙니다. 창조주로서 초월하시는 동시에 섭리자로 내재하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또한 “연대” 곧 역사와 각 민족들이 “거주”하는 “경계”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26). 그분은 당신님의 섭리 속에서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하시려는 뜻을 두셨습니다. 인류가 한 조상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민족들마다 다른 신이 있지 않고 오직 한분 하나님만 계십니다. 

그분은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만큼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합니다(27). 실상은 늘 함께 하셔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합니다(28). 바울은 헬라 시인들(에피메니데스 Epimenides, 아라투스 Aratus, 클레안테스 Cleanthes 등)의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표현을 빌려와서, 사람이 “신의 소생”이므로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사람의 작품을 신으로 여기는 일은 어리석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29).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허물치 않으셨습니다(30a, 14:16). 당장 무서운 심판으로 대하지 않고 혹 더듬어 찾아 볼 수 있도록 ‘관대히 봐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계시하셨으므로 어디 누구에게나 “회개하라”고 명하셨습니다(30b).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장차 심판하실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31). 그러므로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거나 그분을 찾지도 발견치도 않으려 하거나 헛된 철학으로 사람들을 오류로 이끌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사도를 통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분이 분명히 알려졌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닙니다. 이제 편견 없는 마음으로 사도가 전한 말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어떤 이들은 조롱했고 어떤 이들은 나중에 다시 듣겠다며 젊잖게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거절하는 그들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몇 사람” 곧 아레오바고의 법정 의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와 “다른 사람들”은 바울에게 달라붙어 믿음을 가졌습니다(33). 이렇게 해서 복음은 회개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고, 배척하는 자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었습니다(고후 2:16).

바울은 예수와 부활에 대해 더 듣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부터 탈선해있다는 사실과 그분을 찾고 발견하려는 마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회개해야 함을 선언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당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했습니다. 참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앞에 철저한 죄인임을 알아야 비로소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청중에 따라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원래 관계로 회복시키려는 내용은 동일합니다.

복음은 받는 자에게는 은혜로, 받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로 작용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 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은 진리를 불의로 누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대항하며 계속 제 고집대로 행하는 반역자라는 사실이 폭로되어 심판을 변명치 못하게 되지요.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 내 복음이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항상 성경의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을 위하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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