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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운 바를 행하는 믿음 (빌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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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바를 행하는 믿음 (빌 4:1-9)


한나라당 이해봉 의원이 지난 국정 감사 자료에서 OECD 대부분 회원국들의 자살 사망률은 감소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자살 사망률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자살은 우리나라 사망 원인 순위 중 암, 뇌혈관성 질환, 심장 질환 등에 이어 4위이며, 10대에서 30대 사이에서는 사망 원인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지난해에만 15,566명이 자살로 사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연예인들도 툭하면 자살하고 운동 선수들도 자살합니다. 공무원들도 자살하고 은행 간부들도 자살합니다. 재벌 회장도 자살하고 놀랍게도 전직 대통령도 높은 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자살 원인으로 우울증 증가, 정보화로 야기된 지나친 개인주의와 생명 경시 풍조, 죽음을 통해 현재의 고통이나 부정적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극단적 심리, 이혼율의 증가, 성인으로서의 책임감, 사회적 의미의 상실, 이기적 인간 관계의 만연, 그리고 현재 생활에 대한 불만족 등을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런 이유보다는 세상 살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같습니다. 살맛이 나면 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세상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 책임이 바로 한국 교회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가 아닙니까? 그 주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 살맛이 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때문에 입맛만 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오랜 교제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고마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인물입니다. 그는 비록 억울하게 빌립보 감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지만 오히려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이 믿고 그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가 떠날 때에, 그리고 그가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에도 그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물심 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물질적으로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른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아름다운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깨달았으면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도들이란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주님과 연합했기 때문에 성도들의 삶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더욱 민감해야 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렇다면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는데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성령의 열매는 희락이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까닭도 그가 비록 이 세상을 살고 있지만 그의 시민권은 하늘에 속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뿐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이란 사랑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서 어떻게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의 구원 또한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너그러운 용서로 말미암지 않았습니까?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오늘 교회는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관용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염려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근심할 것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주님 앞에 아뢰야 합니다. 만약 근심과 걱정의 원인이 우리 자신의 실수나 죄 때문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또 만약 염려의 이유가 밖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주님의 능력과 그 선하심을 믿고 의지하며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도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는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성도들의 삶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간직하고 사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주님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오늘 우리도 듣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삶이 점점 더 힘들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또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세상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이겠습니까? 한국 교회와 자칭 교회의 지도자라는 자들의 행태를 보면 역겹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다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 환경을 탓할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소금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소금으로 녹아지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살맛 나게 하게 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가 녹아야 합니다. 맛이 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녹지 않기 때문입니다. 녹는다는 것은 온전한 희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부르심 받은 사실을 기뻐하며 녹아야 합니다. 이왕에 우리가 녹을 바에야 모든 것을 용납하는 자세로 녹아야 합니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녹는 마당에 우리가 무엇을 염려합니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철저히 녹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완전히 녹임으로 말미암아 평강의 주님과 함께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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