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요일 3:1-3)

첨부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요일 3:1-3)


여러분 가운데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신분차이를 극복하고 맺어진 두 남녀의 숨겨진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배가 침몰을 한지 한 80년이 지난 어느 날 탐사 작업을 벌이던 사람들이 궤짝 속에서 목걸이만 걸치고 있는 누드 그림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뉴스로 보고 알게 된 타이타닉의 생존자 101세 되는 로즈 할머니는 그 그림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80여 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여인은 무려 80년 동안, 단 4일간 사랑을 나누었던 잭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 오고 있었습니다. 빙산과의 충돌로 배가 침몰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에 잭은 로즈를 부서진 배의 파편 조각 위에 올려줍니다. 그 잠시 동안 잭은 로즈에게 반드시 살아남을 것을 부탁하고 차디찬 죽음의 바다 속으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잭과의 그 마지막 대화를 회상하면서 로즈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내 생명만 구해준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구원해 주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도 자신 안에,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로즈로 하여금 17살에 만나 단 4일 동안의 나눈 사랑을 101살이 될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아직도 그는 살아있다"고 이야기하게 했을까요?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진실로 사랑했던 사랑은 잊혀지질 않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떠올리면 여전히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상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그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아마 성경기자들 가운데 사도 요한 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강도 있게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특별히 '어떠한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살펴보면 절대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이란 말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할 때 잘 쓰입니다. 

마8: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풍랑 이는 호수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자 함께 있던 제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바람과 바다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그들은 '어떠한'이라는 말을 써서 놀라움과 경탄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어떠한' 사랑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아무 조건이 없이 파격적으로 우리에게 주셨음을 요한은 고백을 합니다. 
  
그 표현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라는 단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 주사는 '샤워하다(shower)'라는 표현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 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또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폭우같이 넘치게 부어 주셨는가!"라며 흥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도대체 이 사랑에 대해 아직도 마음에 썩 와 닿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얼마 전 화재가 난 현장에서 소방관 6명이 아까운 목숨을 던져 순직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 한 일이 있습니다. 방화범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약간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정신병원이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날도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때리고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급히 밖으로 뛰어 나와서 소방관을 붙들고 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방관 6,7명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 갔다가 불더미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벽돌더미 아래 그 고귀한 생명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TV를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 방화범은 오히려 멀쩡하게 살아서 밖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죽어야 될 사람은 저 사람인데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 처자가 딸린 6명이 희생을 당했구나. 저 사람이 평생 살면서 자기가 6명의 소방관의 생명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빚진 감정을 가지고 살까? 정말 사람이 좀 달라질까? 인간다운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던져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애를 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참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죄 때문입니다. 롬5:12절은 이 진리를 가장 간단하게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죽음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든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코미디안 자니 칼슨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또한 “죽음의 확률은 100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죽습니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죽습니다. 배운 사람도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도 죽습니다.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죽습니다.문제는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의 죽음은 존재의 중단이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죄를 범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아담이 죄를 범하고 바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성경에서 죽음이란 단어는 일관성 있게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생명도 떠나간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입니다. 이는 살아도 죽은 것입니다. 삶의 의미도 삶의 보람도 삶의 영광도 없는 인생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죄를 범함으로 인함인 것입니다. 

롬3:23에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고.문제는 이런 결과를 알고서도,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인생들이 죄를 범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가져다주는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미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쾌락의 정체를 “잠시의 죄의 낙”(히11:25)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잠시의 쾌락, 그 찰나의 쾌락의 순간, 길어야 한 시즌이 지나가면 죄가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곧 사망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죽음-창조주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더 나아가 육체적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망조차 마지막 우리의 실존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된 인생의 결국을 히9:2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이 심판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의 희망이 없이 그 분에게서 영원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까? 천만에요!! 우리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는 어느 누구도 죄의 문제, 죽음의 이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엄청난 기쁜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죄의 삯으로 사망을 피할 수 없었던 인생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셔셔 우리에게 은사 곧 선물로 영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느냐구요? 사랑이 그분의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10절의 말씀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드리심으로 우리 죄는 사함 받고 사망을 피할 수 없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은 자신이 도무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사실에 감격하여 “어떠한 사랑”이라는 우리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떠한 사랑이란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우리에게 보낸 그 엄청난 사랑을 말합니다. 이 예수의 뜻은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 바로 그 분이 내 인생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 이름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예수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 길래 역사 속에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도대체 그 이름,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던져 버릴 수 있습니까? 그 이름 속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입니까? 왜 여기 안 목사가 이렇게 피를 토하듯 이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까?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어령 교수를 아시죠. 이대 명예교수이며 전 문화부 장관으로 한국 최고 지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삼년 전에 동경에서 있던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분입니다. 평소에 종교란 문화의 한 분야라고 일관되게 믿고 주장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얼마 전에 책 한권을 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책입니다. 그 서문을 보면 “요즈음 나는 70평생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삽니다. 세례를 받은 것과 시집을 낸 것이 그렇습니다. 나이 많이 먹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면 망령이 났다고들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어쩌다 예수 믿게 됐느냐?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 하고 내뱉듯이 비웃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나라의 최고의 지성인으로 자처하는 그가 심지어 기독교를 반대하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자기 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미국의 변호사로 있는데 갑상선 암으로 수술 후, 두 번이나 재발하는 가운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암은 고쳤지만, 그 후유증으로 고도근시로 인해 망막이 찢어져 시력을 잃을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의 자녀 가운데 둘째가 자폐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상황입니까? 단 하루도 울지 않고 잠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인 이어령 교수도 딸의 불행 앞에서는 그의 뛰어난 지성으로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민아씨가 기도와 간구 가운데 시력을 되찮았고, 아들까지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이어령씨가 무릎을 꿇고 70년이 넘게 부정했던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영역 너머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 천상의 언어”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멋있게 표현해서 그렇지 간단히 말하면 영적인 눈이 떠졌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생이죠.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된 겁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고서,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왜 우는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하루 하루 간증하며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간증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묻습니다. 이 행복이 다만, 이어령 교수만이 누리는 행복이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참 행복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와 이 부족한 사람은 우리의 남은 삶을 여러분과 함께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행복에로의 초대를 하고 계십니다. 삶에 지치고 목마른 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무거운 짐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만일 이 예수를 우리의 인생의 축제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이제 곧 여러분에게도 잔치가 시작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