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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신칭의(以信得義) (롬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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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以信得義) (롬 4:1-12)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면 의인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고 시도했지만, 하나같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와 무능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과 무능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의롭게 되는 길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을 받아온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복음의 진리를 납득하는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를 믿더라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 진리를 한자말로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로마서 4장의 말씀은 이신칭의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그는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존재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최고의 영예요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도가 사용하는 논법은 이렇습니다. 곧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과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게 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대인들이 그 때까지 알고 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본디부터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선택 받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위대한 아브라함이지만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밖의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킨다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이라도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 보다 낫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예를 든 것입니다.

먼저, 사도는 로마서 4:1에서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고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는 인정을 얻었다. 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자격으로 서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시조(始祖)에 대한 이야기에는 과장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를 보면, 천제(天帝)인 환인의 서자 환웅(桓雄)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웅녀를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으니 이가 곧 단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이족(東夷族)은 하늘님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조상에 대한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몇 대 조 조상이 영의정을 지냈느니, 혹은 만석지기 부자였느니 하는 따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출생이나 재산, 혹은 권세 등을 자랑으로 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랑거리를 찾았습니다. 곧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선민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인즉,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처럼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랍비들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세 살에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고 또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지만 온전히 율법에 따라서 행하였고, 또 할례를 행하였기 때문에 그의 의가 완전해 졌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의 공력에 의해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자기의 공력으로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처럼 자랑스러운 일이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2) 하심으로 유대인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지적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온전히 지켰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죄와 허물을 지닌 인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들이 자랑할 만한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24장에 보면, 가나안 정복을 마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고별 설교가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자였는지 아닌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 숭배자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역시 어려서부터 우상 숭배의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므로 우상 숭배의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아브라함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에 그는 곡식이 있는 애굽에 내려갔다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 애굽 왕 바로에게 시집보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누가 보아도 떳떳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흠집 내기 위한 의도가 아닙니다. 옛말에 성인(聖人)의 실수는 일식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인품을 갖춘 분들이므로 심지어 그들의 실수조차도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인간들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성현군자들도 영락없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누구 하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하신 성경 말씀에서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슨 방법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일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이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 기독교 신앙을 거론하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개 과학자가 무어라고 말했다, 혹은 아무개 철학자가 무어라고 말했다고 내세우는 것을 봅니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창안해 낸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버렸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은 생명의 도를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뭐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이 외에 것들은 신앙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단들이 잘못된 것은 그들의 교주들의 말을 성경처럼 여기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옳다 인정하는 것은 우리도 옳다고 하고, 성경이 틀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도 틀렸다고 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라면 가고 성경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어 서야 합니다. 여기서 더 하거나 덜 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맨 끝 부분에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이 요한계시록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성경에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아브라함이 얻은 의로움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창세기 15장 6절에 이르기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무찌르고 포로로 잡혀간 소돔 거민들과 조카 롯을 찾아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86세쯤 되었지만, 여전히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가 어려서부터 키운 총명한 종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합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늙은 몸으로 아들을 낳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결코 그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4장 3절에 보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만한 의로운 삶을 살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마치 일꾼이 떳떳하게 삯을 받아가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훌륭한 인물도 자기의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받은 의로움 곧 칭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칭의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장 6절로 8절에서 사도는 다윗의 이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칭의는 채무나 정죄를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임금이 그 신하들과 결산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일 만 달란트 빚진 신하 하나가 임금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치 품삯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10장 14절에 보면, 솔로몬의 일 년 수입이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였다고 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의 일 년 수입이 금 666달란트였다고 하면, 일 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이겠습니까?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치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신하는 임금에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입니다. 임금이 명하기를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신하가 엎드려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그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일 만 달란트 빚진 신하는 우리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일 만 달란트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 만 달란트의 빚을 진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일 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은 우리의 본성이 깨끗하고 무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의는 죄사함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칭의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불법 곧 죄를 용서함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저 선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으므로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데 무슨 도움이 된 것일까요? 초대 교회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 신자들이 선민의 상징인 할례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그 가운데는 할례를 구원의 한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에서 온 어떤 유대인 신자들이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문제로 인해 안디옥 교회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에서 목회하던 바울과 바나바와 교인 몇 명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어 해답을 받아오게 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한 후에 이방인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요즘도 어떤 종파는 모세의 율법대로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고, 돼지고기나 비늘 없는 물고기를 부정한 음식으로 여기고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이미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에 의해서 율법주의로 정죄 당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건, 할례를 받지 않은 자건 상관없이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할례 받은 것을 그가 의롭게 된 하나의 근거로 내세우지만, 성경을 읽어 보면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때는 그가 할례 받기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4장 9절 이하에 이르기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86세쯤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사건은 창세기 17장에 나오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구십구 세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10년 더 전에 이미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할례가 칭의의 조건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할례는 그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에 불과합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도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자건 무할례자건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로운 행실을 칭의의 근거로 삼으신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닌 믿음을 구원의 방편으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선민의 조상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육신의 혈통에 상관없이 아브라함처럼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만, 이 시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의인의 신분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의로움이 없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값없이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영육간의 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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