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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로 (엡 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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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엡 2:11-22)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는 복잡합니다. 특히 여러 가지 구역을 정해 놓고, 각 구역마다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우선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다음으로 여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여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뜰이 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뜰이 있습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이렇게 성전에는 여러 구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구역마다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 구역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출입 통제가 있었습니다.

제일 첫 번째 출입 통제는 이방인의 뜰 안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안쪽의 내부 뜰 사이에 돌담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돌담에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렇게 써 있습니다. "어떤 외국인이든지 이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죽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담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나누는 막힌 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이 담을 말합니다.

저는 최전방 휴전선 GOP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철책이 막힌 담처럼 높이 서 있는 곳입니다. 남쪽에도 철책이 높이 서 있고, 또 북쪽에도 철책이 높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철저하게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 철책선 안쪽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북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반사적으로 땅에 엎드렸습니다. 대략 2-30미터 전방에 북한군의 순찰조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북한군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가서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적군’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동족이요 지척에서 함께 군생활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교전이 벌어지면 죽고 죽여야 하는 적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 북한과 남한 사이에 허물 수 없는 막힌 담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막힌 담은 단지 눈에 보이는 철책만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간에 마음 속에 그리고 뿌리 깊은 의식 속에 쉽게 허물 수 없는 막힌 담이 굳건하게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막힌 담은 우리 주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정치권에서 여와 야가, 이념의 장에서 진보와 보수가, 삶의 공간에서 기성세대와 다음세대가 허물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담을 쌓고 대립하고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정 안에도 크고 작은 막힌 담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직장에도 사회 공동체 안에도 그리고 교회 안에도 갖가지 막힌 담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막힌 담들 앞에서 답답해하고, 힘겨워하고, 불행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살펴보면 이런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막힌 담과는 다른 또 다른 막힌 담이 있습니다. 바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입니다.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심지어 대제사장마저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만 오직 1년에 한 번 대속죄일 때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을 뿐입니다. 이 휘장은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힌 담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 막힌 담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없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깊은 영적 어둠 속에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쉽게 허물기 힘든 막힌 담들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 막힌 담이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 직장 안에, 이웃들 사이에 막힌 담이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이 있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막힌 담들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 막힌 담들을 허물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힌 담들을 쳐다보면 탄식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막힌 담들을 허물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이런 막힌 담들을 허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무엇이고 그 사역의 구체적인 결과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 사건이고, 이 십자가 사건으로 막힌 담들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고, 또한 인간과 인간 상호 관계의 막힌 담들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죄사함 

본문 2:1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막힌 담을 허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마 27:51에서 이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자 바로 그 즉시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일까요?

우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막힌 담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유롭게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면서 상황이 돌변했습니다. 저들이 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산 나무 밑에 숨게 된 것입니다. 바로 막힌 담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막힌 담은 바로 “죄”입니다. 그 죄를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 받고 죄사함을 받게 되면 그 막힌 담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사함 받은 뒤에 또 다시 죄를 범하게 되면 또 다시 막힌 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십자가 앞으로 나아와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근자에 인터넷이나 TV 뉴스를 보기가 두렵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의 비윤리적인 모습들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고, 교회들의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오늘은 또 누가 어느 교회가 사고를 치지나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뉴스를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죄를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담이 높아져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점점 영적 어둠이 짙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 앞에 엎드려 한국교회의 죄악을 내려놓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영적 어둠을 겉어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으십니까? 혹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은 없습니까? 

이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엎드리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야 합니다.

2. 용납

본문 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시고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을 차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선민으로 택하셨고, 이방인들은 버리셨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할례를 받았지만 저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지만 저들은 율법 없이 자기 뜻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할례를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몸의 할례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한 것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이 땅의 모든 인간을 용납하시는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을 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으실 길을 열어놓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누구라도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 사이에 쌓아두었던 모든 막힌 담들은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 차별이  다 철폐되게 된 것입니다. 민족 차별, 성 차별, 빈부 차별, 학력 차별, 지역 차별 등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이 철폐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에서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여전히 수많은 막힌 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로 그 막힌 담들을 허물고 서로 용납하기를 바라십니다.

1997년 10월 아프리카 케냐의 리무르에서 GCF라는 세계기독교연합 모임이 열린 일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250여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인종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특히 옷차림도 달라서 모두가 이질감에 무척이나 불편해 했습니다. 

개회 예배를 마치고 30명씩 그룹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의 주제가 ‘신앙여정’이었습니다. 각 그룹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의견을 나누고 또 각 그룹에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여 전체 앞에서 나누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각자가 돌아가면서 자신이 구원 받은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간증을 나누었습니다.

간증이 시작되자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인종도 다르고, 교파도 다르고, 신학도 달랐지만 간증의 내용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예수를 만났고 예수의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순서 이후 250여명의 각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서로를 용납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 많은 막힌 담들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막힌 담이라 해도 십자가 앞에서 다 허물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 있는 막힌 담들,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막힌 담들, 교회 안에 있는 막힌 담들, 심지어 남과 북 사이에 막힌 담들 십자가 앞에서 허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이 담들을 허무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하겠습니다.

3. 하나됨

본문 20-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이제 막힌 담을 허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 하나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 2:24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 공동체를 향한 하나의 비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즉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는 비전입니다.

요 17:1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신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예수님의 소원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였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저 유명한 설교가 생각이 납니다. 제목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입니다. 

설교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피부색과 인종과 종교와 빈부의 차이 없이 백인 자녀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뛰어놀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됨의 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됨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가정이 하나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교회가 더욱 하나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우리 사회가 하나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십자가로 남북이 하나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바쳤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아직도 수많은 막힌 담들이 있습니다. 아니 점점 그 담들이 많아지는 것 같고 또 그 담들이 높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힘으로 그 담을 허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로만 그 담을 허물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막힌 담들을 허무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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