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2)

첨부 1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1:6-12)

 
1. 복음, 기쁜 소식 복된 소식!

지난 8월,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아주 특별한 선수 두 사람이 출전했습니다. 한 사람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25)’로서 두 다리가 없는 그는 남자 장애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양 다리에 ‘J’자 모양의 얇은 탄소 섬유 의족을 착용한 채 참여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시각장애인인 아일랜드의 ‘제이슨 스미스(24)’였습니다. 遺傳的인 문제로 앞을 볼 수 없는 그는 100m에서 ‘10초22’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 기록은 그의 조국 아일랜드의 최고 기록이고, 이 종목의 우리나라 최고 기록인 ‘10초23’(김국영)을 앞서는 기록입니다. 장애를 가졌지만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기록은 가지고 정상인들과 함께 겨루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참여한 것이죠.

성도 여러분, 이 두 사람이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참여한 것만으로 장애우들이나 자신의 문제로 좌절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겠습니까? 

장애우들을 위한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로봇 공학자이자 미국 버지니아 공대 한국인 교수인 ‘데니스 홍’은 시각장애인 용 자동차를 개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야말로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란 자신들의 문제, 장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어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 가능성, 그리고 그것을 이루게 해주는 소식을 말합니다. 창조 이래 인간의 최고이자 최대의 장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삶의 현실의 온갖 부정과 부조리와 악과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시고 모든 죄의 형벌과 현실적인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신 이 소식이야말로 모든 시대, 모든 대륙, 모든 민족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그 복음은 정말 빠른 속도로 세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복음이 퍼져나가던 그 초기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2. 다른 복음 vs 참된 복음

1) 갈라디아 교회의 다른 복음

사도 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행9:15)”이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갖고서 선교 여행을 떠났고, 그 첫 선교 여행 때,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지방, 오늘날의 터키 지방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고, 그 결과 주님의 교회가 여러 개 세워졌습니다. 그 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 갈라디아 지역으로 가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메시지를 전했고, 아직 어린 신자인 갈라디아 성도들은 아무런 여과없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전한 메시지가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어느 복음이 진짜냐’ 하면서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생각이 혼란스러워졌고, 나아가 성도의 삶과 교회까지 혼란스러워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알고,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 즉,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제1차 예루살렘 公議會가 있기 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 즉 <갈라디아서> 중에서 오늘 본문에 보면, “다른 복음” 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먼저 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복음의 씨를 뿌려 막 자라나기 시작한 갈라디아 지방으로 와서 “다른 복음”의 씨를 뿌리자,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들이 전하는 잘못된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바울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상하게 여긴다”는 말은 ‘아주 신비롭고 기이하고 놀라운 일’ 혹은 ‘마술이나 마법 같은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입장에서 갈라디아 성도들이 너무나 쉽게 “다른 복음”에 빠져든 것이 그렇게 신비로운 일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은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가 이토록 빨리 복음을 떠난 것이 바울로서는 이해도 안 될 뿐 더러 너무나 슬프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바울은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하는 것일까요? 왜 바울은 그들의 주장이 복음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냐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할례를 받고, 거기에다 유대인처럼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하나의 수학적인 공식으로 만들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 할례 + 율법 =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됩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을지어다(9)”라는 무서운 비난을 하는데요. 그 이유는 6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은혜라고 하는 것은 받을 공로나 자격이 없는 자가 아무런 댓가를 치루지도 않고 공짜로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 은혜를 떠났다는 것은 이 은혜에다가 할례를 더하고 율법을 더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가 다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져야 구원받는다는 교리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만든 것이죠. 성도 여러분, 복음과 율법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즉 성도의 구원은 ‘복음과 율법이 반반이어야 확실하게 이루어진다’든지, ‘복음이 80% 율법이 20% 정도 함께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99퍼센트의 복음에 1퍼센트의 율법 즉 1퍼센트의 인간의 노력이 더해진다’고 해도 그것은 율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모든 죄를 없이 하시며 심판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것,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첨부 첨가시키면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복음만 변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구원의 방편으로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을 부정하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마치 어린 양처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전부를 부인하고 거부하고 “헛된 것(2:21)”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엄중하게 선언합니다. 8절, 9절“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경우가 뜻하지 않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중세 프랑스의 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François 1er, 1494~1547)가 어느 겨울날 술을 마시고 근위대장과 눈싸움을 하다가 입술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를 숨기고자 수염을 길렀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수염 기르는 것이 프랑스 내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수염을 기르는 것이 국왕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라 하여 귀족 이외에는 수염 기르는 자에게 벌금을 지급토록 하여 유행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러시아로 전해졌습니다. 러시아의 피터 대제(표트르 1세(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1672~ 1725) 역시 수염 깎는 풍속을 정착시키기 위해 풍속개혁을 선포했고, 수염 기르는 자에게 세금을 부과시켰습니다. 그러자 수염이 간판인 러시아정교회의 성직자들이 발끈했습니다. 그들은‘수염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항의했고, 그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소위 ‘수염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왕의 수염 금지령에 반대하여 더욱 수염을 기른 것이 그때부터 이념이나 체제에 대한 반항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물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그 반대로 머리도 깎고 수염도 깎습니다만! 그런데 여러분,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들이 한 말, ‘수염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장이 어느새 정교회 안에서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즉, 풍속이나 정치적 입장 등이 하나의 교리가 된 경우가 역사적으로 제법 많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어떻게 이런 것이 교리가 되어서 사람을 구속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것들이 주님의 복음을 대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2) 우리 시대의 다른 복음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바울 시대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➀ 자칭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라는 집단은 안상홍을 재림 예수로 믿으며, 그 세 번째 부인인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상홍이 안식교 출신이기 때문에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개 교회에 있는 십자가는 우상이라고 정죄하며, 성탄절을 부인합니다. 아예 기독교 축에도 낄 수 없는 사이비 종파이지요.

처음에는 <예수교복음침례회>란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기쁜소식선교회’ 및 ‘IYF’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원파인 박옥수파는 일반 성도들로서는 그 이단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당 부분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론 특히 칭의론을 매우 쉽게 잘 가르치는 장점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파의 오류는 구원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자기들만 알고 일반 교회는 모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류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죄용서 받고 의인이 되므로 다시는 죄인으로 여기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한 번 회개할 뿐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이 자꾸 회개하는 것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죄인인 이상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구원파 교리의 결정적인 오류입니다. 여러분,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단회적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계속적인 회개”입니다. 

단회적 회개란 죄인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느냐,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죄를 짓는 본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생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신앙이 성장하면서 죄짓는 횟수나 그 죄으 내용이 달라지겠지만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천국갈 때나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럴 때마다 회개함으로 주님의 은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회개는 평생 계속되지요. 구원파는 이것을 부정합니다.  따라서 이러한 구원파의 교리대로 살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성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천지>는 어떻습니까? 신천지의 삼위일체론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성령님을 삼위일체의 한 위로 이해하지 않고 악령의 반대 개념으로 보아 ‘모든 것이 신’이라는 汎神論에 가까운 신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얻는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적 사명자, 즉 이만희를 믿어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계시론 즉 성경관에도 문제가 있는데, 기존의 성경보다 이만희에 의한 새로운 계시를 더 우선에 둡니다. 궁극적으로 이만희를 구원을 주는 자이자 재림주로 보는 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➁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드러난 이단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email protected]의 설교를 참고했습니다.

우리 시대를 소위 철학사조로 “Postmodernism”의 시대라고 하는데요. 이 시대의 특징은 ‘무엇이든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성경도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입니다. 즉 성경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 예를 들면, 유교의 <사서오경>, 힌두교의 <베다>, 이슬람교의 <코란>도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타종교가 통합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지요.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교회의 권위나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로 봅니다. 권위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번째 주장은 ‘모든 것이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고, 따라서 모든 것은 내게 달렸다고 주장하지요. 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한 가지 사상은 모든 것이 ‘정서위주’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내 기분에 안 맞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내 기분대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예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기분에 맞도록 예배 형식을 고쳐서 예배하려는 것이죠. 한 개혁주의 신학자(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email protected])는 이런 예배를 부추기는 대표적인 인물이 Joel Osteen, Bruce Wilkinson, William Paul Young, Rick Warren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Joel Osteen의 <긍정의 삶>, 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 Rick Warren의 <목적이 이끄는 교회>, Paul Young의 , Napoleon Hill의 <성공하는 비결> 같은 책들을 기독교 교리를 어느 한쪽만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결국 가짜 복음으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주의해야할 또 한 가지 사상은 ‘개인주의’입니다. 개인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주일성수와 예배를 개인이나 가정사로 불참하는 것,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개인 위주이고, 모든 생활이 자신에게 이익이 안 된다면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따릅니다. 하나님이 주님이 아니라 자신이 주가 된 것이죠. 

➂ 마지막으로, 주님의 복음을 변질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저와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지 않는 것, 주님의 말씀을 取捨選擇하고, 자기 마음에 따라 순종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가리고, 말씀의 눈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며, 모든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말씀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도 부귀영화, 무병장수, 성공, 신비한 체험을 말하면 얼마나 많이 관심을 보이는지 모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돈이나 건강이나 성공이 복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돈, 건강, 성공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여러분 역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저주를 선포받은 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3) 참 복음은?

그렇다면 여러분, 참된 복음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믿음을 통해서(sola fide), 하나님의 은혜로(sola gratia), 그리스도 안에서(solus Christus)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는 “오직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찌하여 다시 율법에 매이겠는가(1:6; 3:3, 5:4 등)?’ 하면서 탄식했습니다. 어떤 儀式이나, 行爲나, 禮式이나, 善行으로 구원 얻을 길이 없습니다. 구약 이사야서는 사람은 아무리 선행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운 걸레조각”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선행이나 공로나 의식이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필요가 없지요. 내가 조금만 더 착하게 살면 되는데요. 우리가 조금만 더 남을 돕고 베풀고 살면 구원받는데 굳이 예수님이 죽으실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말하지 않는 구원관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하나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3. 복음, 복음적인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관심을 받기 위하여 하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여러분이 하신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하여 하신 일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사람은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온갖 부정과 부조리와 악과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시고 모든 죄의 형벌과 현실적인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셨다
그리고 장차 심판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게 된다
믿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그 믿는 자의 것이 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복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