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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압을 위해 부르짖는 선지자 (사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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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을 위해 기도하는 선지자’. com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2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3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4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 5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6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7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8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9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사15:1-9)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이사야 15장 1-9절 말씀으로 ‘모압을 위해 부르짖는 선지자’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왜 하나님의 선지자인 이사야가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 도다”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깨닫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 위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길 바랍니다. ‘모압을 위해 부르짖는 선지자’

오늘 성경을 기록한 이사야는 그 이름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는 뜻입니다. 이사야서는 예언이 대부분입니다. 예언서입니다. 그러면 예언서인 이사야서의 주제는 무엇이냐? 이사야서의 주제도 똑같이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 유다의 웃시야 왕이 죽던 B.C. 740년부터 요담과 아하스를 거쳐서 히스기야왕의 통치인 B.C. 680년까지 거의 60년을 활동 하였는데 그는 자기 예언의 대부분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살아있을 때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B.C. 722년)하고 그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남 유다 역시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유다가 반란을 시도하자 앗수르는 그 땅을 침략하여 예루살렘 주변지역까지 점령을 합니다. 이때가 B.C.701년 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는 유다의 회복의 예언이 있습니다.  ‘유다가 누적된 죄악 때문에 멸망하지만,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여 새롭게 회복하시고, 메시야를 통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주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는 앗수르, 바벨론, 블레셋, 모압, 구스, 에굽, 에돔, 고대 근동 전역의 나라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언들로 가득합니다.  왜 이방나라들을 향한 예언들이 이렇게 많을까요? 왜냐면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열방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나 신앙, 법, 제도, 관습, 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그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유일한 심판 주이시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온 세계의 하나님,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주제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 우리의 구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聖經)은 경전(經典)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망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는 채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재미없고 무의미하고 부담 가는 책이 됩니다.  특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복에 성경을 억지로 연관지어 보게 되면 성경은 ‘로또’를 보장하는 책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세상의 복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물질과 권세와 육신의 건강을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천국과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의 복을 받은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영혼을 구원하는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없어질 세상의 복을 사용하여 영원한 천국 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세상의 복이 우리의 눈을 가려서 심지어 구원에 걸림돌이 됩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언제나 사람들의 구원과 연관 지어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십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오늘 본문인 15장의 앞을 보면 8장에서는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재앙에 대해서, 10장에서는 앗수르를 벌하시는 이야기가, 13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14장에서는 블레셋에게 내릴 재앙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의 뒤인 17장에서는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멸망을, 19장에서는 에급의 멸망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누가 이런 예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벨론의 신이나 블레셋의 우상이나, 애급의 태양신이 이런 예언을 하고 그 예언대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이런 예언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심판은 교만(驕慢) 때문입니다. 나라의 부강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힘을 제일로 여기는 교만이 심판의 원인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심판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 되는 것을 의지하면 망한다’ 는 것입니다.  앗수르나 블레셋도 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 부정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역사상 노아시대와 소돔 고모라 이후, 지금 이 시대만큼 타락하고 악한 시대는 없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열방의 심판을 보면서 ‘아하, 열방이 저래서 심판을 받는구나. 우리는 열방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하는구나’ 해야 합니다.  이방 나라가 심판 받고, 모압이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들이 심판 받았던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방 나라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는 것과 모압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이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5절에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라는 말이나 16:11절의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모압을 위해 창자가 수금소리를 내도록 모압의 심판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유를 알려면 모압이란 나라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알면 됩니다.     

모압이란 나라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그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롯의 아들도 되고 손자도 되는 아이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해야 할 인간이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로 인해서 구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롯의 부인은 멸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후 롯의 두 딸이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롯에게 술을 먹이고 같이 동침해서 낳은 아이가 하나는 모압의 조상이 죄었고, 또 한 아이는 암몬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모압과 이스라엘은 전혀 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삼촌 조카이니, 이스라엘과 모압은 5촌입니다. 숙질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모압은 서로 형제처럼 잘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전쟁을 합니다. 호르마란 곳에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 이기고, 아모리를 이기고, 바산을 이깁니다. 그리고 민2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는데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거민을 하나하나 물리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이 자기들도 칠까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모압의 죄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모압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아브라함 때문에 존재하게 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모압은 항상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 나라’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선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발락이 자기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은혜(恩惠)를 원수(怨讐)로 갚는 행동입니다.  모압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저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며,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되며, 그것이 자기가 축복을 받는 이유가 됩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의 축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 안에 거하게 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신 23:3-5절을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합니다.  모압의 심판의 이유를 첫째는,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 홍수 심판 때에나, 앞으로 다가올 불 심판 때에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똑 같습니다.  첫째로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 은혜를 무시하며 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도 거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세상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도록, 복음을 영접하지 않도록 꼬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소유로, 물질로 산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돈이 없으면 못산다. 돈이 가장 소중하다’ 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게 됩니다. 복음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사탄이 사람들에게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세상 것을 손에 쥐어줘서 스스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망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님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에게 불효하고, 부모를 잊어버리면 그것이 스스로 망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지고, 세상으로 눈을 돌릴 때 자연히 믿음에서 멀어지게 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영원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면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모압의 멸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모압의 멸망은 갑자기 일어납니다. (1절)“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하룻밤에 모압의 가장 중요한 두 도시들이 황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돌연히,  심판이 임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2-3절)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3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그 심판이 얼마나 크고 나라의 재난이 얼마나 큰지, 자기들의 산당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머리카락을 밀고, 수염을 깍고, 베옷을 입고 통곡합니다. 
 
(4절)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부르짖는 소리가 30Km나 떨어진 야하스까지 들립니다. 모압의 전사들마저도 두려움을 느껴 부르짖으며 혼이 속에서 떨 정도의 큰 심판입니다. 
  
(9절)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모압의 모든 도시에서 울부짖음의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간신히 피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는 곳마저도 물이 마르는 고통이 따릅니다. 모압에 곡성이 그치지 아니하며 디몬 물이 피로 물들일 정도의 극렬한 심판이 임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도피하는 자와 남은 자에게 사자(獅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도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그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도 모압의 이런 심판을 예언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5절)“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심판이 얼마나 큰지, 비록 이스라엘의 적이지만 같은 혈통인 그들이 심판을 받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왜 이토록 큰 심판을 모압이 받을까요? 

 **  모압이 타락할 대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타락이 어떤 것입니까? 렘48:11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모압은 전쟁에서 크게 패해본 적도 없고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어 본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런 안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바로 타락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것을 술에 비유합니다. 술을 빚어 오래두면 찌꺼기는 가라앉고 위에는 맑은 술만 고입니다. 

맑은 술을 청주라고 하는데 이것을 따로 옮기지 않고 두면 보기에는 청주 같지만 저어보면 청주가 아니라 탁주입니다. 모압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부강하고 찬란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부패하고 타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계속된 번영 가운데 겉모습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세상 수백 개의 나라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다 잘 사는 것 같고, 다 말쑥하게 입고, 빌딩은 치솟고 자동차는 거리를 누비며 자유와 민주와 정의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맑은 청주인가요?  문제는 속입니다. 이 사회의 윤리관은 황금만능주의입니다. 속은 탐욕으로 가득합니다.

** 모압은 믿는 인생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모습을 가졌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복술가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또 조롱합니다. 렘48:27에 “네가 이스라엘을 조롱하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도적 중에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를 말할 때마다 네 머리를 흔드는도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도적 취급하면서 머리를 흔들며 저주했습니다.    스바냐서에도 “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습 2:8) 했습니다.  이것이 모압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죄악처럼 인정머리 없는 것은 없습니다. 모압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압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따라 나온 조카 롯의 자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잡혀갈 때 목숨 걸고 전쟁하면서 그를 보호했고,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간에 다툴 때도 아브라함이 전적으로 양보했으며, 롯이 소돔성에서 멸망 가운데 있을 때도 간절한 기도로 살려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뗄 수 없는 친척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모압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저주했습니다.  이것이 죄악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악을 아무리 사모해도 죄악은 우리를 축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죄와 죄인’ 이라는 친척관계에 있어도, 죄는 인정도 사정도 없이 죄인인 사람들을 저주와 지옥으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귀신을 좋아해도 귀신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무당을 보셨습니까?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무당을 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귀신을 그렇게 섬겨도 귀신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술 담배, 도박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좋아하고 따라다녀도 그것들은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가장 불행하게 만듭니다. 죄와 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비참한 삶으로 마칩니다. 사람들이 죄의 전파에 앞장서도 죄는 죄인인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우리가 잘못되기만을 바라는 영원한 원수입니다. 이런 철천지원수인 죄를 사람들은 무엇이 좋다고 그렇게 따라다니고 좋아하는지 정말 모를일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반(反) 기독교적 정서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기독교인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박멸하려는 사단의 조직적인 공작도 있습니다. 그들은 타 종교의 상상할 수 없는 부패는 덮어두고, 불신자들의 죄를 먹고 마시는 악취는 다 덮어두고, 소수의 사람들의 잘못만을 문제 삼아 전체 기독교를 공격합니다.  기독교 선교 100년이 넘도록 교회는 모든 재정을 회중의 결정에 따라 하고 있고, 매 분기 재정을 회중 앞에 보고하며 교회처럼 투명한 곳도 없는데 세상은 모압처럼 도적 떼를 보듯이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매 분기 재정을 회중 앞에 보고하는 다른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자기 사욕을 위해 재정을 맘대로 하는 교회가 몇 %나 되겠습니까?  이 사회가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저주하던 모압의 죄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모압처럼 될 것입니다. 

  ** 모압도 역시 교만할 대로 교만합니다. 
사16:6에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

렘48:29-30에도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 자고와 오만과 자긍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했습니다.  모압은 교만하였습니다. 가장 악한 죄가 교만 죄입니다.   타락의 척도를 보려면 교만지수를 보면 됩니다.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교만지수가 높아갑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강조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선생님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훈계를 해도 학생들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경찰에 신고해 버립니다. 부모들 무조건 아이말만 듣고 교사를 공격합니다. 망해가는 나라의 모습 아닌가요? 전교조하는 사람들이 이런 교육을 부추킵니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교사들이 10만원의 촌지를 받으면 뇌물이라고 하여 그렇게 법을 만들었습니다. 교사를 처벌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2억원을 대가성없이 주었다면서 뇌물이 아니기에 끝까지 교육감자리를 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입니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괞찮다. 나는 다르다. 나는 위법, 탈법, 초법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국민의 교만지수가 높아지면 국가는 반드시 망합니다. 

우리는 교만한 모압의 멸망을 이사야 15장에서 봅니다. “황폐할 것이라. 울며 통곡할 것이라.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게 될 것이라. 심히 애통하며 울 것이라. 그 혼이 속에서 떨 것이라. 도망하여 울 것이라. 패망을 부르짖을 것이라. 물이 마를 것이라. 청청한 것이 없을 것임이라. 재물을 가지고 도망갈 것이라. 부르짖을 것이라. 피가 가득할 것이라. 재앙을 더 내릴 것이라.”  여러분,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겸손하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교만의 특징은 우상숭배입니다. 특히 모압의 ‘그모스’ 라는 우상은 유명합니다. 성경은 모압 족속을 ‘그모스의 백성’ 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자기의 신을 달래기 위해서 맏아들을 태워 제사하는 백성들입니다.(왕하3:27). 이처럼 사람들은 죄악의 정열에 자기를 불태우며 자식을 불태우면서 살아갑니다. 죄 지으면 지옥 가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얼마나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자기 몸 타는 줄을 모르고 우상을 숭배하는지요. 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은 적어도,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를 위해 목숨 바치는 자는 많습니다. 이러니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겠습니까?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모압은 수치를 당합니다. 

렘48:13에 “모압이 그모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리로다”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루 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루 밤에 모압 길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하루 밤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압은 B.C. 580년에 바벨론에 의해 하룻밤 만에 멸망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선지자가 모압을 위해서 부르짖습니다. 비록 죄로 인한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이지만 그들의 멸망은 선지자의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잃었다 찾은 양 한 마리를 인하여 잔치를 열고 즐거워하시는 예수님은 죄인들이 죄악 중에서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아니 하십니다.   (겔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 우리는 모압과 너무 닮은 이 대한민국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이사야처럼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힘을 모아서 이 영혼들을 구원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십니다.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뜻은 이들의 구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선지자는 모압을 위해 부르짖습니다.   (5절)“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16:11절)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우리도 모압을 위하여 선지자처럼 이런 기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모압을 위하여 창자에서 수금소리가 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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