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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이 전한 복음 (고전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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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전한 복음 (고전 15:1-8)

본문의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의 기독론이요, 기독교의 부활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한다음,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성도 부활의 증거이며,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고, 또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 그리고 교회역사가 시작된 지 10년 20년이 지난 뒤 복음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때 부활은 가장 큰 이슈중의 하나였습니다. 부활을 잣대로 신앙을 규정하였고, 부활의 신앙으로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졌습니다. 반면에 부활신앙 때문에 교회는 거센 핍박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교회도 이러한 부활논쟁에 휘말렸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과 죽은 자의 다시 살아남에 대해 의심을 가졌던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자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듣거나 글을 읽어서 알게 된 사람들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가 부활을 의심하게 된 것은 헬라 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적인 부활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특히 유대교 분파인 사두개인들은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영향을 받은 헬라인들도 영혼불멸은 믿으면서도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크게 둘로 나뉘었는데, 한쪽은 당시의 헬라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로서, 사람의 영혼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육체 속에 갇혀 지내다가 죽으면 이제 그것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세는 천국의 그림자요, 육체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육체의 부활이란 것은 이제 자유롭게 된 영혼을 또다시 부자유스럽게 구속하는 것이니 오히려 인간에게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부활이란 예수를 믿고 나서 새롭게 시작되는 이 세상의 생활을 두고 하는 말이지 결코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은 아니라고 주장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유대교적 사상과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므로 복음의 중심이 무너질 위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하고, 장차 우리 모두도 부활의 은혜에 참여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제시한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먼저, 사도 바울은 부활의 증거를 성경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가 말해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은 성경대로, 즉 하나님의 예언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셨기 때문에 예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내가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회심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계시 받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았고, 또 그대로 전해 왔던 복음의 핵심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사실과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은 이처럼 중요한 복음의 두 가지 핵심을 언급하면서 두 번 다 “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사건을 논할 때, ‘누가 그것을 목격했다’라든지 ‘어떤 사람이 전해 주었다’라는 것보다도, 이 사건들이 오직 성경에서 예언하신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히 여겼고, 그래서 여기서도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부활했을까?’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의심으로 시작하여 불신으로 빠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경을 펴고 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바를 읽어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 성령께서 부활을 확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도 중요하고, 신학자의 논리 정연한 학설도 중요하지만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믿고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목격자들과 이들의 변화된 삶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5-8절까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와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그리고 야고보,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 부활은 증인이 있는 역사적 사건이요, 내가 직접 만난 체험적 사건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겁이 많았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두려움을 모르는 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행 4:19-20절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결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다른 모든 제자들도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으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를 증거했고 마침내 순교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이런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있었기에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전원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했겠습니까? 여러분은 거짓말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절대로 거짓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요, 확실한 것을 그들은 증거한 것입니다.


3. 교회의 확장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합니다. 

부활체를 목격한 사도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할 때에 많은 무리가 은혜를 입어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정해 준 규례를 생명 내놓고 지켰고, 성전에 모여 기도하며 순전함으로 예전을 행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도왔기 때문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동한 교회가 오늘날엔 전 세계에 퍼져 교회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시대 황제들의 박해, 종교개혁기의 구라파에서 교황권의 박해, 영국 국교회 여왕의 박해, 2차 세계대전의 독일 히틀러, 소련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일본의 천황, 6.25전쟁 김일성 등 수 없는 기독교인을 학살하고 교회를 잔해했습니다. 그래도 기독교는 없어지지 않고 가장 많은 곳에 전파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종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기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사도 바울은 12절부터 구체적으로 부활이 없다고 가정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 후반절과 16절 후반 절에서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헛것’에 해당되는 헬라어 ‘케논’이란 말은 ‘내용은 없고 외형만 가진 빈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속이 비어 있는 껍데기란 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믿음과 신앙에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심과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어주심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과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 얻는 믿음을 부활을 믿는 일과 연관시킵니다. 롬 10: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구원 얻은 성도라면 그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이 마음에 믿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짓증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14절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라고 했고, 15절에서도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만약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사기꾼이요, 제자들은 거짓말한 자들이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주님의 말씀은 진리가 아닌 것이고 성경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죽은 후 12사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맛디아를 뽑을 때, 베드로는 행 1:22절에서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그들이 증거할 내용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교하기까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들이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성경의 핵심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뜻이 됩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여기면서도 부활을 부정하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몸의 부활을 부정하고, 어떤 이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단지 부활의 의미만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의 가르침이 합리적이고 학문적으로 탁월해 보일지라도 본문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헛것입니다. 

비록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고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을지라도 그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의 설교 역시 헛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적인 가르침이나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전제 위에 있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17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그분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인지, 그분의 죽음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에 따라 자기 죗값을 지불한 한 인간의 죽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에 갇혀계신 분이라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구주로 믿을 수가 있을까요? 그분의 죽음과 함께 그분을 생명의 구주로 믿었던 믿음은 헛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조차 해결하지 못한 죄는 여전히 성도들에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사함을 확증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지옥에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부터 영원히 면제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사함 받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준하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부활을 확신했는데 만약 부활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눈물과 땀과 피로 부활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헛되게 믿은 것이고, 헛되게 산 것이고, 지금까지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핍박 중에도 부활의 도를 전했는데 히 11:35절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스데반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들은 너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성도의 소망이 이 땅뿐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졌던 사람일수록 불쌍한 사람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좁은 길로 걷기 위해 외로움과 힘겨움을 참고 견디며 싸웠던 사람들일수록 더욱 불쌍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자랑했던 사도 바울은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말씀을 적당히 믿고 사는 사람, 자기의 유익에 따라 말씀을 따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불쌍하지 않습니다.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는 이 말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정을 역전시키는 말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헛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분을 믿는 성도의 죄는 온전히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됩니다. 성도는 부활을 소망하기에 이 땅에서 어떤 모진 슬픔과 아픔과 고난을 겪을지라도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부활이 있기에 그분을 위해 고난 받음을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부활이 없다면, 믿음의 의미가 없고, 우리는 거짓 증언자이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부활을 믿기에, 우리의 믿음은 분명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쌍한 자가 아니라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이 믿음으로 한주간도 부활의 주님과 함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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