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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낭비 (막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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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낭비 (막 14:1-9) 

한 동물학자가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실험해 보았다고 합니다.
먼저 철판위에 불을 켜서 뜨겁게 만들고 그 위에 엄마원숭이와 새끼원숭이를 같이 집어넣고 한참 후에 보았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엄마원숭이는 새까맣게 타죽었고 그 위에 새끼원숭이가 올라가서 살아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미원숭이의 희생으로 새끼원숭이를 살린 것입니다. 

또 다른 실험으로 이번에는 아빠원숭이와 새끼원숭이를 한우리에 넣고 동일한 환경에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한참 후에 보았더니 이번에는 바닥에 새까맣게 깔려죽은 것은 새끼원숭이었고 아빠원숭이는 그 위에 올라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짐승들의 이야기이지만 모성애라는 것은 참 대단해서 그 어떤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그냥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치며 희생하는 부모의 행위는 숭고하고 아름답다고까지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소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립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한 행동은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왜냐하면 향유란 매우 고가품으로 당시 보통 사람이 일년을 꼬박 모아야 살 수 있는 것으로 특별히 여인이 가져온 향유는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국에서 아주 어렵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값어치가 얼마인가 하니 5절에 300데나리온 정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300데나리온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설명 드리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 5천명의 남자들 그 외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아마도 만명이 넘는 사람들로 추산합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들을 굶겨 보낼 수가 없으셔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가 먹을것을 주어라’ 그랬더니 빌립이 불평하며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이들을 먹일 돈이 어디있습니까? 떡이 어디 있습니까? 적어도 2백 데나리온어치의 떡이 있어야 될텐데 돈도 없고 떡도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2백 데나리온이면 적어도 만명 정도를 먹일 수 있는 액수이니 300데나리온은 사실 어마어마한 액수인 것입니다.

한데나리온이 노동자 한사람의 임금이라면 300데나리온은 오늘날로 환산하면 5만원씩만 잡아도 1500만원이고 십만원씩 잡으면 3천만원입니다. 

3천만원이나 되는 가치의 물건을 한번에 예수님께 아낌없이 쏟아 부어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여인이 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즉 율법 선생님, 훌륭한 스승정도로 알았습니다.

랍비라는 것은 오늘날 목회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저희 교회에 김집사님이 “목사님 너무 수고 많으세요” 그러면서 향유를 가져왔는데 3천만원어치를 가져와서 한순간에 제게 부어준다면 이걸 보고 그냥 있을 분들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한마디씩 하지 않겠습니까? 
‘미쳤어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고 하면서 3천만원을 왜 저렇게 낭비하느냐고 한마디씩을 하실 것입니다.

‘차라리 저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을텐데’ 혹은 ‘교회 재정도 어려운데 재정에나 보태지 뭐하는거야?’ 아마 모두가 한마디씩을 하고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만한 액수면 교회 재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선교와 구제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이 여인을 향해서 분을 내면서 여인을 책망했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여인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판단할지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분명 이 같은 행동을 하면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이며 뭐하는 짓이냐고 손가락질 받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 은혜를 꼭 보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이라도 내어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귀한 향유옥합을 가지고 가서 그걸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께 드린 것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에 대한 생각보다 예수님이 너무나 고맙고 귀하게 느껴진 마음이 더욱 앞섰기에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여인이 행한 일은 예수님께 엄청난 위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몇일 후면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도 두려운 것이었으며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서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십가가의 형벌이 두려우셨습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의 고통을 겪으셨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에 채찍으로 맞으시면 아프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그 고통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의 이와 같은 행위는 예수님께 엄청난 위로와 격려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향유를 붓는 것, 곧 기름을 붓는 것에는 몇가지 관습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아주 고귀한 손님이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몸에 기름을 부어주는 관습이 있습니다.

또 왕이 즉위할 때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또는 제사장이 임직할 때 선지자가 임직할 때 기름을 부어서 그 임직을 기념하는가 하면 불결해졌을 때 정결하기 위해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었는가 하면 장례식 때 시신의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서 시신이 썩지 않도록 시신위에 기름을 부어 바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즉위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미 만왕이 왕이시지만 이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 왕중의 왕으로 만왕의 왕으로 즉위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몇일 후에 죽임을 당할 것을 미리 알게 하시고 그의 장례를 준비하는 예식을 치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여인을 비난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7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다른 사람들의 책망 가운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방한 사람들 가운데 그 우두머리가 바로 가룟유다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궤를 맡았기 때문에 그것을 팔아서 돈궤에 맡기면 자기가 도둑질하려고 돈 욕심 때문에 앞장서서 아주 정의로운 척 말한 것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낭비하는가. 이걸 팔아서 가난한자들을 구제하면 얼마나 많이 구제할 수 있느냐?’ 여러분 사실 말은 얼마나 그럴듯 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설령 이것을 판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 마음에 욕심으로 인한 불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난한자들을 생각해서 그의 말에 동조하였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는데 가난한 자들은 너희가 늘 함께 있어서 도울 수 있지만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이라는 것은 다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며 기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마지막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힘을 다하여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였고 이 여인의 행위는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오래오래 기념될 것이라며 제자들이 질투심을 가질 정도로 말씀하셨지만 그만큼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통해서 엄청난 위로와 기쁨을 맛보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거룩한 낭비의 사건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여인과 같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 향유를 붓는 일은 오늘날로 말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란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이 없는 예배는 의미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다른곳에 가있고 몸만 있다고 예배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속에서 일어나야 진정한 에배입니다. 

찬양을 해도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하며 기도를 해도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고백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에 있어 물론 의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폴틸히라는 신학자는 이 본문을 가리켜서 ‘거룩한 낭비’ 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를 낭비라고 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아까운 시간과 물질과 인생을 낭비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지만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낭비이며 사랑의 낭비입니다. 

낭비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낭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부모는 다른 일을 위해서라면 아까워하고 선뜻 무언가 사는 것을 망설여 하지만 자식을 위해서 사용하는 일에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낭비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사랑이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님이 아파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비가 수천만원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정상적인 자녀라면 감당하고자 합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부모를 위해 낭비 하냐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어떤 부부가 30년 동안 물론 중간 중간 어려움도 있었지만 검소하게 아끼며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결혼 30주년 기념일을 맞이해서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아니 평소에 그렇게 구두쇠같이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해외여행을 가면서 낭비하지? 가까운 관광지나 다녀오면 되는거지 뭐 그렇게 외국까지 나가야 하나?’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낭비라고 할 수 있을까요? 

30년동안 자식들 잘 키워준 아내가 너무나 고맙고 남편이 고마워서 해외여행을 난생 처음으로 간다고 해서 그것을 낭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여인에게 향유의 가치는 너무나 큰 것이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림으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렸고 위로를 드린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낭비하고 있습니까?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일날 왜 교회를 가냐고,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단풍도 멋지고 구경할 것도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답답하게 매주 교회에 가서 헌금까지 내어가며 힘들게 봉사까지 하냐고 합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가면 이해가 가지만 일주일 내내 새벽에도 교회를 나가고 수요일도 금요일도 시시 때때로 교회를 나가는데 시간을 너무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낭비입니까?
우리는 이것이 결코 낭비가 아닌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이 낭비라고 하는 그 시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때 우리의 영혼이 새로움을 얻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할 때 내 마음에 새로운 힘이 샘솟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일하니까 더 잘살고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결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이 낭비라고 생각되니 예배를 줄입니다. 
매일 교회를 나오던 것에서 다섯 번, 네 번, 세 번,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번 교회를 나가는 시간도 아깝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아무리 귀한 것으로 드린다 하더라도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몸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호르몬이 생성되는데 그 중에 잘 아시는 ‘엔돌핀’ 이라는 호르몬은 모르핀의 200배의 효능을 가진 만병통치약으로 웃거나 즐거우면 나오는 호르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비싼지 그것을 동물에서 추출하는데 1mg에 2,00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뻐하면 펑펑 쏟아져 나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가 하면 ‘다이돌핀’ 이라는 호르몬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감동 받을 때 나오는 호르몬으로 설교나 찬양이나 기도로 은혜를 받을 때 분비되는 것으로 엔돌핀의 무려 4,000배의 효과를 가지고 있어 이것이 나오면 어떠한 크기, 어떠한 형태의 암도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사려고 하면 너무 비싸서 도저히 상상도 못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것들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면 결국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옥합을 깨뜨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이며 주님 앞에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위해 시간을 내야 합니다. 내 힘을 드려야 합니다.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옥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물을 드리는 것, 헌금을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는데 번제라는 것은 제물을 태워드리는 겁니다.
고기고 뭐고 태우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천번제 드렸으면 소를 천마리를 드렸습니다. 그게 적은 것입니까? 낭비입니까? 물론 낭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면 얼마나 많이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천번제를 받으시고 너무나 기뻐하셨으며 솔로몬이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더하여 주셨습니다.  

매주 월요일 새벽에는 ‘월행사’ 라고 해서 아침에 출근하시는 분들에게 차와 계란을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벌써 시작한지 2년이 넘었습니다.

사실 개척교회에서 매주 이 일을 감당하는 것도 물질적으로는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래도 지금껏 감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를 마시고 계란을 받는다고 교회를 나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렇게 해냐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직접 교회를 나오지는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만으로도 거룩한 낭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매주 강단에 꽃꽂이를 장식하는 것도 이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집사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때로는 꽃꽂이를 신청하신 분들의 헌금으로 강단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아니 꼭 이렇게 꽃꽂이를 할 필요가 있는가? 낭비가 아닌가? 이 돈으로 차라리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강단의 꽃도 제물로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잘라서 꽂는 꽃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웃을 돌아보고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까지 낭비라는 이유를 들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것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낭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 부족하여 조롱받으면서 손가락질 받으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시고 영원한 회복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거룩한 낭비를 십자가에서 행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죽음 같지만 그것은 사랑의 낭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과연 너는 나를 위해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느냐?
시간의 옥합, 물질의 옥합, 생명의 옥합, 내가 꿈꾸는 옥합을 깨뜨릴 수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묻고 계실 것입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드릴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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