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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하게 하는 사람 (마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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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사람 (마 5:1-9)                       

추수감사주일 예배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 중 일곱 번째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화평이 무엇일까요? 화평이란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 없이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평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안전, 번영, 행복입니다. 화평하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더 이상 전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평의 극치는 천국의 삶입니다. 우리가 화평하게 산다면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가장 큰 화평은 무엇일까요? 국가와 국가 사이의 화평도 중요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들보다 더 소중한, 우리가 반드시 누려야 할 화평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엊그제 진영에 사시는 한 장로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지난 연초에 창원의 모 교회에서 연합 집회가 있었는데, 그 때 장로님께서 오셔서 제 설교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장로님께서 찾아오신 목적은 독특했습니다. 장로님은 성경을 무척 세밀하게 읽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설교자들에게 불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요지는 <존경어를 좀 더 많이 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님‘자를 빼고 <예수가 ......>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성경을 번역할 때도 하나님을 언급할 때 <그가>라고 하지 말고, <그 분이>라고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존경과 경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우리는 감히 그 분을 마구 대할 수 없습니다. 마치 앞에 앉아 있는 친구 대하듯이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는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최고의 높임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란 단어를 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라고 하면 높이는 말이기는 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라고 하면 마음에 큰 감격이 밀려옵니다.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위대한 하나님께서 나를 두렵게 하는 분,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날 너무도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당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저를 보고 <김운성씨>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그냥 <아빠!>라고 하면 최고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좋은 말인가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의 마음이 <자녀의 마음>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마음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을까요? 본래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고,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 재산을 방탕하게 다 써버렸습니다. 그리곤 흉년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지자 돼지치기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얼굴을 볼 낯이 없었고, 도저히 아버지라고 부를 용기가 없습니다. 이게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그 사람은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요? 한 십 년쯤 죽도록 일해 드림으로써 아들로 회복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엔 그 자신도 그렇게 해 보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흉년을 만나 배가 고파 살 수 없었을 때 아버지 집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서 아버지의 품꾼으로 살면서 밥이나 얻어먹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끌어안고 사랑해주고,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상징으로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열어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게 하나님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때 아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대목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식을 키워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제 딸애가 묻습니다. <아빠, 오늘 태워다 줄 꺼가?> 그걸 옆에서 보는 아내가 말합니다. <대단해요. 난 바쁜 네 아빠에게 감히 태워달라는 말을 못하는데.....우리 집에서 얘가 제일 당당하다니까.> 여러분, 그 차이가 뭘까요? 아내와 딸의 차이지요. 아내는 제가 피곤할까봐 염려합니다. 그래서 먼 거리도 그냥 간다고 합니다. 태워준다고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알았어. 그럼 그냥 가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속에 쌓여서 <난 안 태워주고, 딸만 태워다 준다. 그 때 섭섭했다>고 합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걱정해주는 게 진짜 마음인지, 섭섭해 하는 게 진짜인지, 아마 둘 다 진짜 마음이겠지요. 이게 애매한 아내들의 마음이겠지요. 그러나 딸애는 이런 갈등이 없습니다. <오 피곤하시고 무척 바쁘신 아빠, 존경해마지 않는 아빠! 오늘 혹시 저를 태워 주시겠사옵니까?> 이런 게 아닙니다. 거침없이 말합니다. <아빠, 태워다 줄 꺼가?> 어떤 날은 아예 <나 태워 줘!>라고 명령하듯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자녀입니다. 너무도 당당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때 부모는 기쁘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야!>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다시 탕자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아버지가 사랑으로 환영할 때 아들이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받고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난 이렇게 쉽게 아들이 될 수는 없어요. 나도 염치가 있습니다. 이러지 마세요.>라고 하면서, 새 옷을 벗어던지고, 잔칫상을 거부하면서 울고불고하면서 <제가 품꾼으로 십 년쯤 일해 드린 후에 다시 생각해서 저를 받아주십시오. 이대로는 너무도 죄송해서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아버지와 그 주변 사람들이 <그 녀석 무지하게 양심적이네. 정말 훌륭해.>라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버지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이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괜히 양심 있는 척, 체면 있는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들이 할 수 있는 효도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아버지와 나 사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루아침에 다시 아들이 되겠어? 뭔가 좀 해 드린 후에 아들이 돼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많은 분들이 <저는 지은 죄가 많아 지금은 못 가니, 좀 더 착하게 살고 열매를 맺은 후에 가겠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돈을 좀 벌어서 헌금을 마음껏 드릴 수 있을 때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이것도 착각입니다. 좀 더 노력해서 살면 깨끗해집니까? 오히려 죄가 더 쌓여 더 더러워질 뿐입니다. 또 아무리 많은 돈을 드려도 구원의 은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돈으로 아버지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냥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화평은 우리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위대함은 모든 대립과 갈등을 한 순간에 제거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엔 유보가 없습니다. <하는 것 봐 가면서 아들로 받아 주겠다!>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즉각적이고도 무조건적입니다. 우리는 그냥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한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수고를 대신 담당한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십 년, 이십 년, 아니 평생을 노력해도 못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고통 중에 사시면서 우리가 해야 할 품꾼 생활을 대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야 할 꾸중과 벌을 대신 받으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 분의 고단한 삶은 우리 대신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놀랍고 엄청난 은혜에 감격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그래서 로마서 5장 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할렐루야!  여러분, 이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가장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오늘은 감사주일인데, 무엇을 감사하면 좋겠습니까?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가장 큰 감사의 조건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품꾼이 되어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들과 딸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가장 크게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화평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연결시켜 화평을 가져오신 것처럼, 우리도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평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을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방법을 한 마디로 말하면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화평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화평에 대해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는 길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이 있어야 화평이 옵니다. 화평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꺼이 죽음 같은 희생을 감행하셔야 합니다. 

중국 내몽고의 <호화호특>시에 유명한 한 여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녀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원제는 많은 궁녀를 모집했고, 전국에서 수천 명의 여인이 선택되었습니다. 그 여인도 궁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궁녀가 너무 많아 황제가 직접 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모연수>라는 화가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오게 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고르곤 했습니다. 그러자 궁녀들은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너무 가난해서 아무 것도 바칠 게 없었습니다. 탐욕스런 모연수는 그녀를 미워했고, 그녀를 못 생긴 얼굴로 그렸습니다. 그림을 본 황제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늘 나라를 괴롭히고 대립하던 흉노족의 우두머리 <호한야>가 황제에게 와서 사위가 되길 청했습니다. 황제는 당황했습니다. 원수 같은 사람에게 공주를 내 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연회가 열렸고, 황제는 그림들을 넘기면서 아름답지 못한 궁녀들을 지목하면서 연회의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그녀도 연회에 불려왔는데, 그 여인을 본 호한야는 황제에게 자신의 배필이 꼭 공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궁녀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공주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크게 기뻐하면서 궁녀들 중에서 마음대로 고르라고 했습니다. 호한야는 그녀를 택했습니다.  

황제는 마음속으로 호한야의 안목이 형편없다고 비웃으면서 그가 택한 여인을 가까이 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멀리서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던 황제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다가오는 여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경국지색의 절세가인이었던 것입니다. 황제는 그녀의 그림을 다시 가져오게 했는데, 그림과 실제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황제는 화가 나서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습니다. 황제는 그녀를 보내기 싫었지만, 나라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슬픈 마음으로 고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비파를 가슴에 안은 채로 말을 타고 고개를 돌려 정든 모국을 바라보면서 흉노족의 땅으로 갈 때 하늘의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날개 짓을 하는 것을 잊어버려 그만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러기가 떨어진다고 해서 <낙안, 落雁>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절세 미녀를 <침어낙안, 侵魚落雁>이라고 하는데, 침어는 <서시>를 두고 하는 말이고, 낙안은 바로 이 여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남성 여러분, 미인을 보신다고 해도 날개 짓은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죽습니다. 그리고 여성 여러분, 혹시 <나를 보고 기러기가 떨어지지 않나>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보지 말고, 빨리 갈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이 비운의 여인이 누구일까요? 그녀는 다름 아닌 <왕소군 王昭君>입니다. 왕소군의 팔려가듯 고국을 떠나 이국으로 간 희생으로 인해 흉노족과 한나라 사이에 평화를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희생하고 죽어야 화평이 온다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부모님들께서 자신들의 욕심과 꿈을 죽이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데서 가정이 유지됩니다. 부부간의 화평도 서로 자신을 죽여야 유지됩니다. 교회의 화평도 성도들이 서로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고, 교만을 죽이고, 자기 뜻을 죽여야 유지됩니다. 

잊을 수 없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려드리겠습니다. 6.25 전쟁 때 피난오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이북에 있는 아내를 생각하면서 재혼을 하지 않으시고 독신으로 지내셨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을 성자처럼 존경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목사님은 한 불쌍한 여학생을 아버지처럼 돌보고 공부시켰습니다. 학생은 자라서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 집에 갓난아기가 하나 나타났습니다. 교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처녀를 건드려 아기를 낳은 게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목사님은 부도덕한 목사로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은 자진해서 교회를 사임하고 아기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모든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그 아기는 목사님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처녀가 한 남자와 실수를 해서 아기를 낳았고, 당황한 아기 엄마가 목사님 사택에 놓고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당황했습니다. 너무 죄송해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목회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고 계셨습니다. 성도들이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왜 그 때 모든 사실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하나가 죽으면 모든 것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상을 밝히면 날 믿어주는 교인이 있겠지요. 그러나 불신하는 사람도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러면 교회는 두 편으로 나눠지고 다툴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몸인 교회가 아픔을 겪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사랑했던 딸 같은 그 아이에게 아픔을 주는 것도 참을 수 없고, 아무 죄도 없는 이 핏덩이가 무슨 큰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취급받는 것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저 나 하나가 죽으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제 이 아기 하나를 목회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기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 키우셨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길 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화평을 가져온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교만과 욕심을 죽여 화평을 가져오면 그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복>은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그 앞에 나오는 여러 복들, 즉 천국, 위로, 땅, 배부름, 긍휼, 하나님을 뵙는 것 등 모든 복은 당연히 함께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복 안에 다른 모든 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을 누리고, 또 우리도 화평을 가져옴으로써 이 복을 누리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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