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첨부 1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고 그 옆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랐습니다.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 와서는 온천에서는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는 헹구어 집으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하던 사람에게 ‘여기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안내원은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비눗물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더운물과 찬물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사람의 마음 역시 감사와 불평이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감사하는 마음과 불평하는 마음 중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메말라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끝 날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이 변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5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에 나타나는 모든 말세의 증상들은 오늘날 우리에게서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 ‘감사치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세상의 끝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사람들에게서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감사가 사라진 가정, 감사가 사라진 이웃 관계, 감사가 사라진 직장, 감사가 사라진 교회 생활을 생각하면 그곳은 원망과 불평이 뒤덮인 삭막한 세상이 됩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감사하는 마음이 말라버려 삭막한 사막과 같은 곳으로 변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 지역과 갈릴리 지역의 사이 길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마을에 이르렀을 때에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외친 것은 나병환자는 저주 받은 병으로 인식이 되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마을에서 쫓겨나 성 밖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것은 몸이 깨끗하게 나았으니 제사장에게 보이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그 말씀 뒤를 보면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몸이 예수님의 명령과 함께 깨끗이 나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의 몸이 나을 줄로 믿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고름이 흐르던 살결이 아이와 같이 부드러워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열 명의 나병환자가 나병을 고침 받았을 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함께 부둥켜 앉고 펄쩍펄쩍 뛰며 감격했을 것입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뻐했을 겁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얻은 것보다도 더 행복했을 겁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통해 나병에서 고침을 받는 동일한 경험과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은혜와 감격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인 반응에 있어서는 다른 행동이 나왔습니다.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열 명 중에 아홉 사람은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해 자신들의 몸이 깨끗이 나았음을 확인 받은 후에 기뻐하며 가정과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한 사람은 몸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사장에게로, 가족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향을 돌려 예수님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나병에서 고침을 받는 은혜를 주신 예수님께 달려와 감사했습니다.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믿음으로 나병에서 치료를 받을만한 믿음은 있었지만 감사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4절을 다시 한 번 보면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말씀에서 열 명의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을 낫지 않았지만 낫을 줄로 믿고 제사장에게 보이러 간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만큼 절박함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낫지도 않은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러 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일입니다.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대단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단한 믿음은 있었지만 믿음이 감사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믿음의 크기가 감사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있지만 감사가 없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믿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결과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감사에는 인색한 절름발이 신앙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짖어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나병을 고침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은혜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열 명의 나병환자에 속해 있었고 그 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었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로 숨가쁘게 달려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17, 18절에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내 안에서 축복을 사모했고 그 축복을 받았는데 축복 받은 것을 기뻐하면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없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해서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고 막막할 때에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 어려움을 이기고 나면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고 나면 그 마음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이런 저런 핑계와 이유를 말하며 감사를 미룹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감사함을 배우지 못합니다. 더 못된 사람은 도리어 감사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믿음의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교만하며 이기적인 신앙은 감사하는 믿음을 보고 비웃습니다. 겸손하며 이타적인 신앙은 감사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고 자신의 신앙이 그렇지 못함을 부끄러워합니다. 

14-16절을 보면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라아 사람이라’ 고침을 받은 한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즉 감사하며 돌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나머지 아홉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을 보고도 감사하는 신앙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낙인을 찍고 짐승처럼 취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나머지 아홉 사람은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고 했던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깨닫는 교훈이 있습니다. 감사는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더 감사에 인색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우월감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함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 19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는 축복을 자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향해 하시지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간구를 하는 믿음의 사람을 향해 하시지도 않았고, 치유를 받은 믿음의 사람을 향해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는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을 향해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축복을 받은 믿음보다, 간구하는 믿음보다, 치유되는 믿음보다, 감사하는 믿음이 더 큰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은 감사할줄 아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감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평과 원망이 더 커진다는 말입니다. 감사한 것을 감사한 것인 줄 모르는 세상은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이 됩니다. 그런 곳은 하나님의 영이 아닌 사단이 뛰어 노는 곳이 됩니다. 우리 생활 속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 속에서 ‘감사합니다’ 라는 표현이 익숙해지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직장생활 속에서 ‘감사합니다’ 라는  표현이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는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삶의 자리,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향해 ‘네 믿음이 구원을 받았느니라’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