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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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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6-18)


적극적 사고방식을 강조해 온 필(N.V.Peale) 박사가 하루는 기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 어떤 부부가 앉게 됐습니다. 부인은 계속해서 모든 일에 불평이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고 시트가 지저분하고 청소도 제대로 안 돼 있고 승무원도 불친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서로 간에 인사를 교환하던 중 남편이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필 박사가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제조하십니까?”
그러자 남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불평을 만들어 내는 제조업자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면서 참아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불평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할 것입니다.하나님의 자녀들은 불평 제조업자가 아니라 감사 제조업자가 돼야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 요한입니다.
요한은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인 아버지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인 어머니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요한의 부모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어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이 아이를 갖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제사장의 반열에 따라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사가랴가 천사에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천사가 대답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그리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 친족들이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하자고 하나 어머니 엘리사벳이 “아니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해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니 말을 못하는 고로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깁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이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로부터 빛이 되신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역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는 것이요 그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자기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요단강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칠 때 그에게 나아와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그를 선지자라고 하며 따르고 있음에도 결코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이삭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도 결코 자기의 역할 이상을 원하지도 않았고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의 그의 역할에 충성하였던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실 때 요한이 말립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합니다.  

그리고는 그가 외쳐 증언합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이렇듯 요한은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하는 사실을 아주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역할을 다한 다음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이 요한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세상에 왜 왔는가?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을 언제든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는 결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있게 하시는가를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섭섭해 하거나 방황하지 않게 될 것이요 항상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귀한 직임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 하나님이 나를 불러 복되게 하시고 복의 근원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들에게 주어진 직임을 따라 열심을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리고 사람까지 지으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던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실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래 반드시 죽게 될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죄 가운데 태어나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될 인생, 그리고는 지옥불 속으로 던져지는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될 인생들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그 가운데 충만해야 할 인생들이 거꾸로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에서 헤매다가 불 못으로 던져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도 마음이 아프셨던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계셨고 각 사람에게 비취었지만 참 빛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증언하러 왔던 것이요 요한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왔으되 자기 백성이 영접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 그런데 이게 빛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주어도 빛이 비추고 있어도 두 눈이 먼 사람은 그 빛을 알 길이 없습니다. 더욱 빨간 색과 파란 색을 두 눈이 먼 사람에게 한 번도 색깔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빨간 색을 따뜻한 느낌이라고 한들 빨간 색을 만져보면 더 뜨거운 느낌이 있을까요? 파란 색은 차가운 느낌이라고 한들 보지 못하는 사람이 차가운 느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세상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건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영혼이 이미 죽어있는데 죽은 자가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고전 12:3을 통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며 롬 8:15~16을 통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우리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하고 주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이 모든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내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게는 구원받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에 의인이 있는가 하여 본즉 하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롬3:10~12은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고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롬 3:23~24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롬 8:2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계 3:20에서 말씀하시거니와 우리에게 그 음성을 들려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단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는 믿었고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습니다. 아울러 그렇게 믿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하셨고 그 성령 안에서 오늘도 우리가 성전으로 지어져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전 3:16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주시라 시인하고 우리 마음에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님이 내 안에 함께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법에 따른 노예가 아닙니다. 죄의 굴레 아래 세상에 살다가 덧없이 죽어 불 못에 던져질 무의미한 인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 모세로 말미암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 한 죄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깨닫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하는데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게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진리가 없다 하거나, 있다 하여도 끊임없이 희석시키기까지 합니다. 은혜는 진리로 말미암지 않게 하고 진리 또한 은혜와 동반하지 못하게 합니다. 심각한 경우에는 은혜와 진리를 가능한 한 분리시켜서 그저 은혜만 받게 하거나 진리만 받게 하는 자로 추락시킵니다. 그로 인하여 진리는 없을지라도 은혜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고 또 어떤 자들은 은혜 없는 진리만을 강조하게 됩니다. 은혜와 진리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되려면 반드시 진리가 동반하여야 합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으려면 반드시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중도에 탈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은혜와 진리임을 알아서 은혜 될 때마다 진리로 말미암은 은혜인지를 돌아보고 진리에 속한 자는 은혜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할 것은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땅과 하늘에 충만한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것 아닌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주셨음에도 그 주신 것을 끊임없이 왜곡하는 자가 마귀입니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며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이심을 잘 알았습니다. 율법도 하나님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주기도 하고 오게도 한 것은 은혜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려면 모세의 율법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모세의 율법도 없고 은혜와 진리도 듣지 못한 자들은 각 사람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라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곧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분만이 참된 진리가 되십니다. 그분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 밖에서 구원을 찾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예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외에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게도 세상을 방황하며 은혜와 진리를 얻으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열심히 알아 가면 우리 안에 은혜와 진리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십시오. 우리 생각을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우리 삶을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장식하십시오. 오직 말씀을 따라 말씀 안에서 살아가노라면 내 안에 날마다 은혜와 진리로 가득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은혜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을 품어 간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날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감싸 안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불쌍히 여기심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멸망에서 건져 구원하여 주신 은혜에 더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고 깨우쳐 주시고 능력으로 채워주시어 주님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귀한 은혜 위에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시간 주 트래버스에서 한 소녀가 음악, 코걸이, 짧은 치마 때문에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리자 딸은 부글부글 끓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어 아빠가 미워요! 하고 소리를 친 다음 그날 밤 가출을 하였습니다. 딸은 부모가 찾아 나서기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지역, 갱단과 마약과 폭력이 판을 치는 디트로이트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주 값비싼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 남자는 점심도 사주고 차도 태워주고 머물 곳도 마련해주고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알약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과 함께 몇 번 잠을 자주면 고급음식과 고층빌딩 주택에서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우유팩 뒤에 “사람을 찾습니다”란 글자와 자신의 사진이 실린 것을 보고 잠시 놀랬지만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1년이 지나면서 딸의 얼굴에 병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친절하던 그 남자가 돌연 낯빛이 변하여 그를 길거리로 내몰았습니다. 딸은 이제 마약을 살 돈도 구하기 어려웠고 잠은 대형 백화점 쇠창살을 기대고 자야 했습니다. 배가 고파옵니다. 신문지를 덮었으나 몸이 떨려옵니다. 춥고 어두운 도시의 밤이 무섭게 달라붙습니다. 그 순간 불현듯 천지에 벚꽃이 만발한 고향 트래버스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쩌다가 집을 나왔을까요? 그는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집에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전화통을 붙잡고 집으로 연거푸 전화를 걸었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어 메시지만 남겼습니다. “아빠 엄마 저예요. 집에 갈지도 모르겠어요. 집 방향으로 버스를 타요. 거기까지 가면 자정쯤 될 거예요. 만약 아빠 엄마가 없으면 저는 그냥 버스에 앉아 캐나다까지 갈지도 몰라요.” 그리고 딸은 차를 타고 가면서 걱정과 후회를 계속합니다. “만약에 아빠가 출타중이시라면, 그래서 메시지를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조금 기다렸다가 직접통화를 한 후 차를 탈 걸.” 드디어 7시간이 지나서 그 버스는 트래버스 터미널 안으로 들어섭니다. 

운전사가 방송합니다. 정차시간은 15분입니다. 딸의 운명은 15분 안에 달려 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딸이 터미널로 들어섰을 때 그녀가 정말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습니다. 터미널 앞에는 아빠와 엄마는 물론 오빠와 동생들부터 시작해서 삼촌들, 사촌들, 할머니, 이모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무려 40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이 다나와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터미널 벽은 온통 “환영”이라는 현수막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 환영의 인파속에서 아빠가 다가오자 소녀는 녹아내리는 수은처럼 눈물을 아른거리며 그 동안 연습했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빠 죄송해요.” 그때 아버지는 딸아이를 꼭 껴안고 그의 입술에 가만히 손가락을 갖다 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쉿!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집에서는 널 위해 큰 잔치가 기다리고 있단다.” 

탕자의 비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배반하고 떠나간 아들, 허랑 방탕하며 몸과 마음을 다 더럽힌 아들, 냄새나고 병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가 회개했기 때문에 나가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이미 먼저 용서를 베풀어놓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저 종으로 거두어주시기만 해도 은혜인데 예전과 똑같은 아들로 대하여 주시니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주님의 은혜 위에 은혜로 가득한 삶을 날마다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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