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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아들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습니다 (요일 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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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습니다 (요일 5:11-13)
   
오늘 우리 교회에 처음으로 참석하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시대,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 중에 아주 특별하신 분들입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우리 영주교회에 나오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초대를 받으시고, 교회를 나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아주 많은 생각과 고심 끝에 결심하시고 나오셨기에 여러분은 탁월한 선택의 주인공들이십니다. 모두 소중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수도 서울에 살면서 아주 소중한 세월을 살아오셨습니다. 꿈과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오늘까지 달려오셨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꿈과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하여 숨 가쁘게 뛰어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집, 교회에 오셨으니, 지금까지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시고, 자신을 되돌아보시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오늘 내가 결심하고 교회에 나온 것 같은데, 깊이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감동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살아왔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하나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마치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친한 친구의 초청을 받으셨거나 우리 영주교회의 초청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도 오늘 한 분을 정중하게 초대하였습니다. 참으로 바쁘신 분인데,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시고, 초대에 응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를 만나시고 가시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줄 압니다. 

저는 오늘 ‘선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오늘 어디를 갈까? 누구를 만날까? 오늘 무엇을 할까?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기에 꼭 해야만 하고, 우선해야 하는 일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 탁월한 선택의 주인공은 성공도 하고 잘못된 선택에는 무서울 정도의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노란고무신’이라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1950년대 초반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에 상수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큰아버지로부터 노란 고무신을 한 켤레를 선물 받았습니다. 난생처음 받아본 새 고무신이 너무 아까웠던 상수는 신지도 않고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상수는 개울을 건너다가 그만 그 신발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고무신은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상수는 고무신을 찾으려고 무작정 개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무신은 계속해서 계곡을 따라 떠내려갔고 시냇물을 지나 큰 강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무신을 따라 갔는지 상수는 결국 길을 잃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상수는 온갖 고생을 다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초로의 노인이 된 상수는 TV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나와 굵은 눈물을 흘리며 그때 상황을 이야기 했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 그의 형님이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동생을 알아보고 연락이 되어 가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얼마 못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살아계셨지만 치매로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된 상수는 그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생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노란고무신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알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계곡을 따라 달려오고, 시냇물을 따라 달려가고 어린 아이가 강가에 나와 보니 이제는 집이 어디인지, 어떤 동리에서 살았는지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보니 그의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아니라, 백방으로 자기의 뿌리를 찾아보려고 하다가 실낱같은 희망으로 TV 이산가족 찾기에서 노란고무신 이야기를 늘어놓으므로,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노란고무신이 하나가 가장 소중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우리에게도 노란 고무신 같은 화려한 물건에 현혹이 되어 더 소중한 것을 모르고 오늘 지금까지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해야 하고, 내 것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여러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뿐입니다. 

어떤 돈 많은 유태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멀리 공부하던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는 유서를 그의 종에게 남겼습니다. 그 유서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 나는 이 유서를 전달하는 충실한 노예에게 나의 전 재산을 남긴다. 둘째, 내 아들은 유산 가운데 한 가지만 고르게 하라” 

이런 유서를 남긴 채 주인은 죽었습니다. 노예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노예는 재산을 잘 관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노예는 유서를 법적증인인 랍비에게 보여주었고, 랍비와 함께 죽은 주인의 아들에게 찾아갔습니다. 

랍비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죽을 때 당신에게 한 가지밖에 남기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이 노예에게 준다고 했소. 당신은 아버지의 소유 중에서 무엇을 고를 태요?” 젊은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이 노예를 상속받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은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그의 죽은 아버지도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노예를 소유함으로 다시 아버지의 전 재산을 다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예는 그의 소유한 것도 다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집이나, 받을까? 밭이나 받을까? 주식이나 받을까? 보물이나 받을까? 그렇게 어느 것 하나 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은 본래부터 다 아들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참으로 지혜롭게 처리하였고,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다 알고 선택할 것으로 알고 그렇게 유서를 남겼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않으면 노예가 아들 모르게 다 처분하고 아들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이라는 문제가 항상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삶을 살다보면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과 직면합니다. 점심은 무얼 먹을까? 백화점에서 어떤 옷을 살까? 하는 사소한 선택으로부터, 어떤 사람을 선택할까? 어떤 직업, 어떤 일을 선택할까? 어떤 종교를, 어떤 만족을 선택할까? 하는 진지한 선택의 문제도 있습니다. 만족을 모르며 돌아다니는 마음이라면 선택의 기회가 줄어들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지만, 실제로 보면 아직도 세상적이고, 순간적인 것들, 임시적인 가치만 있는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가정, 돈, 명예, 권력, 쾌락, 건강, 일, 같은 들이 소중한 것으로 알고,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절대적인 것도 아니요,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을 알 때는 죽음 앞에 섰을 때에 알게 됩니다. 아, 인간에게는 영원한 것이 있고, 절대적인 것이 있으며,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마지막 죽음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고, 나도 머지않아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찾게 됩니다. 나의 영혼이 돌아갈 곳은 어디라는 말인가? 죽음 저 너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그 수를 더하여 나이가 먹어갈수록 공허감만 넘치고 우울한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교제하면서 인생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어봅니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무신론자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무신론자라는 말은 결코 자랑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용감하신 말도 아니고, 어찌 보면 만용에 가까운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영혼이란 죽어도 없어지지 않으며, 영원을 사는 생명입니다. 우리 사람은 영원한 것,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에 목말라 있습니다. 

인생이란 이대로 죽으면 그만입니까?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는 과연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까? 그러면 내 스스로 하나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흔들리는 감정에 매여 살아갈 것입니까? 내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해주고, 깊은 인생의 의미를 채워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만 종교성이 있습니다. 어떤 똑똑한 동물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에,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동물과 다르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주셨습니다. 전도서3:11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가 있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생명을 마치는 날, 육신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영혼이 들어갈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 인생이란 참으로 짧다는 것을 느껴봅니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을 살게 하시는 것은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것만 하다가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이성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이 있습니다. 영원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세상의 부모님이 채워주지 못하고, 아내나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건강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면서 오직 앞만 보고 질주하였습니다. 입신양명해야 한다, 자수성가해야 한다고 달려왔습니다. 양심에 걸린 적도 있었지만,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악인지 따져 묻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인생의 종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실존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라먹다가 이제는 더 이상 잘라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력을 가진 존재인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으며, 정말로 짧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속아내고, 불러 가는데, 하나님은 한 세기 안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죽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사망은 한 걸음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다”고 했으며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아침안개와 같으며, 잠시 피었다고 시들어버리는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변하고 타락하고 배신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주시며, 영원히 사랑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주실 때에는 그 어떤 죄도 보시지도 않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신 아들 예수님만을 믿어라, 영혼의 주님으로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성경 한 구절 말씀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요한일서 5:11-13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아들’은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생명이 있고, 아들- 우리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증명하시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기록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요절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신 것 입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의 선물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억만 죄악에서 구원받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죄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는 방법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요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호소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며, 도덕적으로 수준 있게 살아왔다고 하는 말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너무나 형편이 없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과신하여 부분적인 죄인이거나 그다지 흉하지 않는 죄인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반드시 구원받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섰을 때에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하시는 자리에 서야할 사람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들어가고, 천국 시민이라는 신분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 우리가 받아야 하는 죄 값을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고 받아들일 때에 주님도 우리를 시인하고 알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따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 지금까지 저는/ 제 자신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의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저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제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주세요./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저의 삶을 인도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을 나의 마음에 구세주로 모시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이란 선물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믿어지는 역사가 있었고, 주님에게 나의 인생을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교회를 나오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실하게 살아가시면서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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