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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착한 성도인가?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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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착한 성도인가? (행 11:19-26)

한국교회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교회의 부도덕한 사건 사고들이 연일 세상언론에 들추어내지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목사가 여성도를 성적 노리개로 사용했다는 뉴스가 올라와 교회 망신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고 있고 점점 교회 안티세력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행하고 있는 좋은 일들, 선한 사업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것은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부 잘못된 사람들의 행실이 들어나면 벌떼처럼 일어나 한국교회를 비판합니다. 그래서 마치 한국 교회 전체가 다 그렇게 타락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한국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들도 많고 잘못된 신학교도 많습니다. 경건의 모양도 없고 능력도 없는 무자격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교회들이 세속화되어 있고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물질만능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 대형교회면 성공한 교회라 하고, 작은 교회 개척교회는 실패한 교회로 인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 배후에는 사단의 교묘한 전략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이 마지막 때 한국교회를 무너트리려고 갖은 계교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내의 갈등을 들추어내고 교회 이미지를 실추시킵니다. 목적은 어떻게 하든지 한국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는 것을 막아보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 한국 방송언론의 보도방향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천주교, 불교는 좋은 모습을 많이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정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사단의 전략이란 말입니다. 선한일, 사회복지, 구제를 교회가 훨씬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한일과 구제사역은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묘한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악이나 타락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두 사람의 악행을 한국교회 전체로 호도하고 비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통탄할 일들이 버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부터 회개하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요?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 본질에 매여 있으면 교회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교회가 급속히 부흥했고 엄청난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인들 간에 구제문제로 파당이 생기고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때 사도들이 행한 것은 뭡니까?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 본질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 사역과 기도사역에 전무하고 구제사역은 일꾼들을 세워서 하게 했습니다. 

그 아름답던 초대교회가 핍박을 당합니다.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합니다. 8장에서 엄청난 박해가 가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박살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중요한 것 하나를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가라"는 것입니다.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자세히 보세요. 선교가 빠졌습니다. 분명 주님은 가라 했는데, 온천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했는데 그들은 안 갔습니다. 가다려도 기다려도 안 갔습니다. 오로지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분명히 가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루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핍박입니다. 그 사랑이 넘치고 은혜가 충만했던 교회가 박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힙니다. 야고보 사도도 순교하고 스데반 집사도 순교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나 피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온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이방 땅까지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도망간 곳에서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몇 사람이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봅니다. 그런데 전하는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 이방인들이 신기하게도 잘 믿었습니다. 

원인은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20~21절을 보세요.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할렐루야! 

누가 함께 했다고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가서 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그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다시 말하면 안디옥 교회 초대 담임교역자로 바나바를 파송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를 한 줄로 표현합니다. 2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라 하십니까? 두 가지입니다. 
그는 1)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2)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다. 이 두가입니다. 이것이 그의 이력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표현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쓰셨냐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바나바를 표현할 때 무엇이 먼저 언급되나요? 성령과 믿음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다.”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라고 하기 전에 “그는 착한 사람”이라 합니다. 영어 성경에 보니 “He was a good man” 이라 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 성령 충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착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다 능력 있는 사람을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함과 착함은 목적 성취를 위하여 거추장스러운 도구가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밥먹여 주냐?" 

부모들은 너무 착한 자녀를 향해 "저놈은 착해 빠져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고 걱정합니다. 너무 착하면 안되는 시대가 된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착한 것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착함은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의 주인공 바나바는 ‘착한 사람’인데 성경이 말하는 착함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착하다”는 말은 형용사로서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어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착함은 이것과 다른 것입니다. 
만약 착함을 세상이 말하는 그 정도라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 중에도 착한 사람은 수없이 많이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착한 사람”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보는 착한 사람과 하나님이 보는 착한 사람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면 

1. 착한 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자입니다. 

착함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말합니다. 
세상은 사람에게 속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악한 사람이 많습니다. 또 반대로 악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지내고 보면 착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착한 사람이라 할 때 그 착함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헌신하는 자를 두고 착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본명이 요셉입니다. 사도행전4:36~37절을 보세요.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난 레위족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그에게 새 이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나바’입니다. 그 뜻은 ‘위로의 아들’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자신의 밭을 팔아 드렸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헌금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헌신은 사도들에게도 감동을 줄만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운 것이기에 그저 감사하여 드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가 많으면 헌금이 많을까요? 왜 대답이 없습니까? 
100만원번 사람이 십일조 하기 쉬울까요, 일억번 사람이 십일조하기 쉬울까요? 

솔직히 말하세요. 그러면 왜 백만원 벌고 싶어요? 일억 벌고 싶어요?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나바를 보세요. 그는 드렸습니다. 그가 부자인지 가난한자인지 모르나 드렸습니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바나바를 열네 번째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13번째 바나바가 14번째입니다. 행14:14절에 그들을 사도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자신의 헌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착한 자입니까? 
착한 자는 받은 은혜를 헤아릴 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보답하려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인색한 마음을 품게 될까요? 

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헌금은 아깝고 자기 자식을 위해서 쓰는 것은 아깝지 않는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의 크기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드리는 것이 아까운 것입니다. 자식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착함을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가치관에서 보고 계십니다. 
정말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주신 은혜를 올바로 헤아리며 감사하는 자는 착한 자입니다. 그러나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엄청난데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니 아까운 것입니다. 그러니 착함이 없는 것입니다. 

착함의 반대는 악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착함의 반대는 인색함 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함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악함을 벗는 방법이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접하셨습니까? 그러면 구원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제 구원받은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착한 행실을 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마태복음 5:16절을 보세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착한 행실이 들어나야 진짜 착한 것입니다. 그 행실은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시게 됩니다.  

흔히들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자 실력 있는 자를 쓰신다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실력과 능력은 하나님께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보다 더 많이 쓰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그는 헌신하는 자입니다.  


2. 착한 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착함의 기준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착한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생각과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에 두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착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 착함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나바도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가라는 사도들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당대에 안디옥은 이방인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니 가라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총회에서 인정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러 사도들을 제쳐 놓고 바나바를 선택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의 믿음과 헌신도 있었으나 그의 착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고향도 아닌 안디옥으로 즉시 순종하여 간 것입니다.  

솔직히 그는 예루살렘교회가 좋았을 것입니다. 그 교회는 자기 정성과 헌신이 남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기에 떠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안디옥은 위험한 동네입니다. 거기는 유대인들이 대접받는 곳이 아닙니다. 문화시설도 열악하고 형편도 열악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착하다 하시고 쓰시고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마25:21절을 보세요.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여기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십니다. “충성”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앞에 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착함”입니다.  

왜 착함이 중요할까요? 5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딴생각을 안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착함입니다. 그 착함이 있어야 충성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떤 소리를 듣습니까?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했습니다. 착함의 반대가 악함도 되지만 게으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악함과 게으름의 핵심이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한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까?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까?  


3. 착한 자는 교회와 사람을 세우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착한 자 바나바를 통해 교회를 개척하게 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개척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곳에 베드로나 주의 사도들을 세우지 않고 바나바 같은 사람을 쓰십니다. 

왜지요? 그는 착하기에 늘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그런 사람은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악인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를 미워하고 멀리하십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과는 늘 함께 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를 보세요. 이 교회는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세워가게 하십니다. 착한 사람이어야 남을 섬기고 세워 갈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교회가 부흥하자 사울을 찾으러 다소라는 동네를 찾아갑니다. 
왜냐면 사울을 데려오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누군지 바나바는 잘 압니다.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악하기 그지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에 예수쟁이들 잡으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바나바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울을 바나바가 찾으러 갑니다. 요즘은 교통이 좋고 전화도 있지요. 그 때문 수 천리를 걸어가서 만납니다. 만나서 안디옥으로 데려와 교회 사역자로 세워 사용합니다. 그야말로 섬김입니다. 이것이 바나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게 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바나바가 합니다.  

25절~26절을 보세요.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성도 여러분! 
악한 사람은 사람을 섬기지 못합니다. 내가 왜 그놈들을 섬겨야 하냐며 펄펄뜁니다. 그리고 오히려 악한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원망 불평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이질 않습니다. 그러기에 혼자 상처받고 혼자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만들어 사용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람을 만들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사람들을 보세요. 제자들 전부 갈릴리 출신이고 가롯 유다만 남쪽 가롯 지방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분을 보면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이고 평범하기 그지없습니다. 당대에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세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적어도 네 명 이상입니다. 예루살렘 출신은 한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그 사람들이 변하여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죽는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전부 주님이 만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핍박자 사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전도자 바울로 만들어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실력 있는 사람도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도 아닌 착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실력 있는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왜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 교회를 세워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도 입니까?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명령하면 그대로 순종합니까? 
성경에 착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가장 착한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맡기신 십자가 구속사역에 철저하게 순종하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와서 교회에서 일 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뭡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누굽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착한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착한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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