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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가모 교회에게 (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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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에게 (계 2:12-17)

버가모 교회가 세 번째 방문한 교호이지만 성지순례단들에게는 마지막 교회였습니다. 지중해성 기후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4월이지만 꽤 추운 날씨 였습니다. 
도착한 시간은 5시 10분이었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표지판에는 관람시간이 5시 30분이라고 되어 있지만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서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들어가지 못했고 밖에서 성경을 읽고 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문이 닫히면 들어갈 수 없구나!
그리고 우리가 모여서 성경을 읽고 촬영하는 모습을 터키사람들이 바라보고, 때로는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서 이런 일을 당할 수 있구나! 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금을 늦어도 늦는 것이고, 들어가지 못하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ㅣ

12.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우리가 지난 두주 동안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분, 그리고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아니라, 오늘은 좀 비장합니다.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지난 두 교회보다는 훨씬 강도 높은 말씀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버가모 교회에 대한 칭찬으로 시작됩니다. 

칭찬

13.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에베소 교회의 행위를 아셨고, 서머나 교회가 당하고 있는 환난을 아시는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처한 상황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찾아와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어떤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될 수도 있겠지요?

지금 버가모 교회의 상황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입니다
버가모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지 모르지만,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교 신앙의 강력한 중심지'로 나와 있습니다. 버가모는 지역적으로 에베소와 서머나와는 달리 내륙 깊은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서머나에서 대락 100km 북쪽에 있는 도시로, 로마가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는데 매우 중요한 행정 수도 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정치적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게 되었고, 초고의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와 비교될 만한 당시 20만 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학문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주전 29년 전에 이미 그 곳에서 최초로 살아있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신전이 세워지도록 허가가 떨어진 곳, 그리고 3년 후에 신전에 세워진, 황제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제가 버가모 교회에서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산 위에 세워진 하드리안 황제와 트라얀 황제의 신상이 있었고,

버가모 교회가 본래 이집트 이시스 신전으로 쓰여지던 곳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세워지기 몇세기 전에 길이 100m 폭 40m의 신전이 세워졌다는 것 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을 주님이 알고 계셨고,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제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교의 중심지에서 버가모 교회가 칭찬 받을 만한 점이 있는데,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고 하는 말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이 어쩌면 일맥상통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버리겠습니까?
왜 예수님이 이런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고 계실까요?
예수님의 최대 관심이 "진리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세상의 빛"으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요 14;6, 8:12)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고, 진리만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빛으로, 진리로 살지 못한다면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 진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나뉘거나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닌 결단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유일한 행동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안디바'가 진리를 지키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그는 총독 앞에 송환되었습니다. 총독 공관이 버가모에 있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을 이야기 합니다. 당시 총독은 정치적인 지도자일 뿐 아니라, 황제 숭배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황제의 흉상 앞에 향을 피우고 '시저는 주님이시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만 하면 안디바는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은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하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정말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진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타협하는 순간 거룩함을 상실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입술과 행동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면 거짓이기에 그는 거룩함을 지키며 죽었습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에는 그 거룩한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가 우리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에 또한 유혹과 시련 이단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로서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불완전해도 우리가 있어야 할 곳, 불완전한 사람을 품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모습"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는 기관의 모습보다는 가족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기관을 떠받치는 것이 신분과 계급이라면, 기업의 세계에서는 직함과 연봉이라면,
기관에서는 어떤 업무의 성과에 따라서 신분이 보장된다면,
가정은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가족의 신분을 어떻게 얻습니까? 어떤 능력을 가지고 어떤 성과를 냈느냐가 조건이 아니라, 그 가정에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는 한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가족의 권리를 얻는 것입니다.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가족에서 내 쫓기보다는 특별하게 돌봐주어야 하는 대상이 가족입니다. ‘생산성’이 낮은 병약한 자식은 도저히 계산으로는 나올 수 없는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가족, 교회는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어떤 인위적인 구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햇볕에 녹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은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한 지체를 다른 지체보다 더 중히 여기지 말라고 엄히 경고합니다. 어느 집안이나 더 성공한 사람이 있고 실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모든 구성원이 함께 앉고 함께 식사를 합니다. 
어떤 유명인이라 해도, 그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 그리고 모든 식구들에게는 가족의 일원일 뿐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정이란 내가 거기로 가야만 할 때 식구들이 나를 받아 주어야만 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는 “어떤 자식을 제일 사랑하느냐구요? 나는 병든 자식이 나을 때 까지는 병든 자식을 제일 사랑하고, 집 떠난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집 떠난 자식을 제일 사랑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제도 중에 유일하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 가족입니다. 출생 자체로 이미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로 묶이게 되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런데 바로 교회가 그런 가정과 같은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정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나와 다른 정말 별난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입니다. 
“공동체는 가장 함께 살기 싫은 사람이 반드시 살고 있는 곳”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이 정의는 명절 때마다 모이는 가족과, 매 주일 모이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똑 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책망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에는 몇 가지 책망 받을 일이 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그리고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올바른 신앙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이단에 빠진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고,

신앙의 진리를 따르지 않고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과 미신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실 수 있습니까? 이재철 목사님이 쓴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라는 책에 보면 이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당을 찾아간 사람이 두 손을 비비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경건하다. 굿을 잘하기 위해 용한 무당에게 희사하는 금액을 알아보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보다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이 용한 무당에게 받은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관찰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다룬다. 하지만 그들을 가리켜 어느 누구도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미신을 좇는 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신은 인간이 돈이나 능력 혹은 재주로 신의 마음을 달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즉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재주껏 신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이 바로 미신의 특징이다. 이에 비해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그분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항상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기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이란 미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변화해 가는 참된 신앙의 소유자이기보다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 자신의 목적만 성취하려는 미신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성찰해야 한다.

먼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는 민수기 22-24장에 등장합니다. 모압 왕 발락이 당시 탁월한 선지자였던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바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그런데 발람이 입을 열면 저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이 말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에게 축복을 명하시는데 모압 왕 발락이 내 놓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집니다. 

베드로 후서 2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옳은 진리의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탐심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이스라엘을 몰락시킬 꾀를 생각해 냅니다.
즉, 모암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 우상 숭배의 음란한 연회에 참석하게 하면 된다고 발락에게 귀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의로우신 하나님이 진노를 유발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버가모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탐심 때문에 진리를 가리는 일을 한 것이지요.

본문 15절에 보면 이어서 '니골라 당'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에베소교회에서 잠시 언급된 적이 있는데 조금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니골라 당은 발람의 행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니골라 당은 교회 안에 사악한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죄짓는 자유"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조금 더 설명을 해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은혜를 계속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 가운데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은혜를 누리기 위해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를 정당화 하는 교리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입니까?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아주 신앙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죄에 대하여 우리를 참 평안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사실 그 은혜를 입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픔과 참음, 그리고 용서가 있었는지를 간과한 거짓된 신앙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니골라 당'은 그렇게 교묘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해 크리스천의 삶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버가모 교회에 있었던 현상에 대하여 무섭게 질책하십니다.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다른 성경의 사본에 보면 15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나는 그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우리가 한 가지 교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단은 옛날 그림에서 나오는 것처럼 뿔을 달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많이 그렸던 그림을 보세요. '북한괴뢰'라고 빨갛게 뿔 달린 여우와 늑대의 모습으로 그렸던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지 않습니까?
'간첩'하면 참 무섭게 생각했는데, 우리 옆에 가장 선한 이웃이 간첩이 아니었던가요?
지금 영적인 면에서 여러분들을 무너뜨리는 존재들은 눈에 보이는 무시무시한, 아니 이마에 나는 '사탄이다'라고 써 붙인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선하게, 우리를 가장 편하게 만들며 접근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이단들의 전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단 교회에 들어와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한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도 신천지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을 유혹한답니다. 

요즘은 목회자를 쓰러뜨리는 방법 중에 하나가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열심히 봉사하던 교인이 어느 날 목사님을 좀 만나자고 한답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무서운 것은 거짓과 불의의 모습을 한 자들이 아니라, 선함을 가장한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진리로 가는 길은 좁은 문이라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많지 않다고 말입니다. 진리에 관한 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조선일보 위클리 비즈를 보면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는 한 사례를 보게 되었습니다. 흔히 가구업계의 애플이라 불리는 ‘허먼밀러’사의 워커 회장의 일성입니다. “소비자 말 듣지 말라”
그동안 많은 기업들이 소비자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소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는데 무슨 이유일까요?

로저 마틴(Martin) 토론토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에서 디자인 경영의 성공 사례로 이 회사를 자세히 소개했다. 이 회사의 일하는 방식을 보면 애플이나 다이슨 같은 혁신기업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를테면 이 회사는 소비자조사를 하지 않는다. 워커 회장은 "소비자조사의 문제점은 소비자는 자신들이 이미 아는 것만을 대답합니다. 단순히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다면 실패하지 않고 평범한 수준을 유지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렇게 하면 혁신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은 하지 못한 채 남들이 다 하고 있는 것을 똑같이 답습하게 될 겁니다."

예) 팩시밀리를 처음 개발할 때 개발자들이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문서를 즉시 보낼 수 있고, 편지도 즉시 받을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좋겠습니까?" 
모두 이렇게 답했다. 
"이틀 정도면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돈을 더 들여서 그렇게 해야 하죠? 그리고 그런 기계가 없는 친구와는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으란 말이죠?"

허먼밀러는 디자인을 경영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도 애플이나 다이슨과 비슷하다. 에어론 의자를 처음 출시할 때 마케팅 부서의 반발이 심했다. "디자인을 고치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고(故)D.J. 디프리(De Pree)는 디자인 담당 수석부사장에게 "마케팅팀의 반응이 어떠냐"고 물었다. 부사장은 태연히 "그건 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디프리는 "맞아요. 마케팅 담당자에게 디자인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죠"라고 맞장구쳤다. 허먼밀러는 이 디자인을 고수했을 뿐 아니라 전략 상품으로 밀고 나갔다.
이 회사는 새 프로젝트를 할 때 외부 디자이너에게 맡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에어론 의자도 그랬다. 요즘 경영계의 화두인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일찌감치 실천해온 셈이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힘을 잃는 이유,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타락하는 이유가 있다면 “진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세상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이 땅위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제가 요즘 가장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모든 교회가 이렇게 가고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길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도 하나님의 생각과 맞는 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권면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러면 승리의 길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오늘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떤 구절이 생각나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심령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어. . ." (히브리서 4:12)

초대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검의 두 날이 신약과 구약의 말씀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것은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위에 서야 잘못된 이단들, 우리를 교묘하게 유혹하는 교리들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신다고요? "내가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런데 어느 날 그 검의 기능이 무섭게 바뀝니다. 진리를 드러내고 심판하는 것이지요.
순종하는 자를 구원하는 복음이 이번에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멸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늘 검의 양날과 같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심판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거짓된 가르침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 합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순례의 길을 걸어온 한 젊은이가 수도자를 만났습니다. 젊은이는 수도자에게 어떻게 하면 인생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수도자는 젊은이를 연못으로 데리고 가더니 갑자기 물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물에서 올라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수도자는 계속 이 젊은이를 물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젊은이가 허우적거리다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수도자는 그를 끌어 내놓고 물었습니다. 
"물속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 
"숨 쉬는 것이었습니다." 
"자네는 진리를 찾기 위해 그렇게 갈급하게 노력해 보았는가? 진리는 그렇게 간절하게 찾는 자만이 얻게 되는 것이라네."

축복의 말씀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결국 하나님의 때가 이르게 될 터인데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이름을 새길 흰 돌"입니다.
만나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굶주린 자를 채우시는 생명의 만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것 같으나 생명의 만나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참 떡"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

그렇습니다. 우리가 맛보는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생명의 만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때에 돌 위에 새겨진 우리의 이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 비밀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흰돌에 새겨진 우리의 이름이 무슨 의미 입니까? 이름이 새겨진 자들은 잔치에 초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쾌락을 이겨낸 사람들은 결국 생명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쓴 큐티 365에 나오는 간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영국의 한 기자가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노력은 사실상 성공할 가능성이 1%도 없는데, 어째서 이런 고생을 계속 하십니까?”
그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반드시 성공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진리가 졌다는 기록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진리 편에 있는 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간디는 자신을 진리 편에 세우는 것이 바로 승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세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가 정말 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가 간직한 진리의 말씀에 따라 전진하십시오.

우리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잘 아는 말이 있습니다. 
“이겨 놓고 싸운다!”

버가모 교회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교회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고난 가운데 포기 했지만 이들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더 무서운 유혹에도 쉬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 믿은은 “그래서” 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풀무불 앞에서 믿음을 지켰던 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믿음을 지키는 일이 믿음입니다.

얼마 전 Christian MBA과정에서 설교를 하고 이경숙 전 숙대 총장의 특강을 듣게 되었습니다. 빛에 시달리던 대학 총장이 되어 2번이나 응급실에 실려가야 할 만큼 어려움이 시달렸답니다. 
세금 고지서는 계속 날라오고, 학생들은 등록금 동결 투쟁을 하고, 노조는 임금을 올려달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깨닫게 하신 것이 있었답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 .
“천부여 의지 옵소서 손들고 갑니다. . .”

새벽예배 시간에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끊임없이 무거운 짐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자신은 질 수 있는 것 다지고 나머지 것만 맡기는 모습,
빨리 기도하고 자신의 할 일을 위해 바삐 뛰어다니는 모습.
그래서 자신이 모든 일을 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음성을 듣고 움직이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답니다. 
원우 중에 하나가 물었습니다. 총장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예, 저는 제가 만난 좋으신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난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가장 좋은 학교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짐을 주님은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 ."
버가모 교회가 반으로 갈라진 모습을 봅니다. 
마치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쪼갠 것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의 몸이 거룩한 교회일진 데, 주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몸이 쪼개지는 아픔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끝까지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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