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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노니와 베냐민, 그리고 비문 (창 35: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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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노니와 베냐민, 그리고 비문 (창 35:16-29)

1. 베노니와 베냐민(슬픔의 아들과 오른손의 아들)

야곱에게는 아내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레아요 다른 사람은 라헬입니다. 아내가 둘 있다는 것을 다복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둘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비록 레아보다 후손을 못 낳아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라헬이 일찍 죽고 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있어 함께 부부의 정을 나누고 싶었던 라헬을 하나님은 일찍 데려가고 맙니다. 이렇게 되니 라헬의 입장에서는 언니 레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셈이 됩니다. 

평생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마땅히 자신의 권리처럼 여겨왔던 라헬은 자식을 낳으면서 그 자식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잃게 되고 동시에 남편의 뜨거운 사랑과도 이별해야 했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라헬은 죽어가면서 낳게 되는 그 자식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즉 '슬픔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사실 그 베노니가 태어나면 그를 지극 정성 돌봐 줄 친어머니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다른 어머니에게 태어난 숱한 형들의 구박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가야 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어머니와 태어난 형제는 오직 요셉 뿐입니다. 

비록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게 되지만 유별한 사랑은 도리어 다른 형제로부터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입니다. 상상만 해도 끔직한 불행한 일들이 새로 태어난 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 아이는 비극적인 운명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서 오는 특혜나 아버지 야곱의 돌보심도 이 슬픔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걸까요? 그런데 난산의 현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그 자식의 이름을 전혀 딴 이름으로 돌려놓습니다.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이 됩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나온 특별한 능력 발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잃은 이 아이가 어떻게 해서 엄마의 죽음을 보여주는 아기가 아니라 능력의 오른손, 즉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기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점은 이 아이의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와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비록 라헬은 죽었지만 라헬이 남긴 자식, 요셉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이 요셉에 대해서 얼마나 대단히 집착하고 사랑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창세기 37: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은 여전히 라헬편입니다. 그러니까 도리어 이 점이 화근이 되어 나머지 형제들이 이 라헬의 형제들을 무척 미워하게 됩니다. 

급기야 요셉을 애굽나라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즉 아버지 야곱의 눈에서 사라지게 만든 겁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의 대상자가 없어진 것이 되었습니다. 라헬이 지녔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그대로 야곱에게 이전되었습니다. 야곱은 크게 웁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래도 라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베냐민이 아직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나 남은 베냐민마저 야곱의 품에서 앗아가 버립니다. 

그 과정에는 잃어버린 자식 요셉이 관여합니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간 이후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어머니의 혈육인 동생 베냐민이 잘 있는지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사러 요셉 앞에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이 잘 지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를 볼모로 잡고 동생 베냐민을 자기 앞에 나타나도록 조치했습니다. 

일단 베냐민을 보게 된 요셉은 이번에는 동생 베냐민을 볼모로 잡고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베냐민은 고난의 요셉과 고난의 야곱이 함께 만나게 되는 운반체가 됩니다. 

그들은 고난 안에서 함께 만나는 것이 되고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을 조정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베냐민은 마냥 슬픔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매개로 하여 야곱이나 요셉이나 다른 형제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게 하는 역할을 맡은 자가 된 셈입니다. 

로마서 8:26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 즉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 귀에다 쉴새없이 탄식 소리를 퍼붓습니다. 


2. 묘비 

요한복음 8장에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쓰셨다는 기록은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쓰셨을까? 참 궁금합니다.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 두 부인이 있었는데 라헬이 아기를 낳다가 산고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하고 묘비를 세웁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 '묘비'라는 단어가 나오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야곱이 이 묘비에 무엇이라고 썼을까? 참 궁금해집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라헬을 너무 사랑해서 외삼촌에게 "제가 7년을 섬길터이니 라헬을 제게 주십시오"했습니다. 그리고 7년을 일합니다. 성경은 이 때의 일을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29: 2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칠 년이 되니까 외삼촌이 라헬 대신에 못 생긴 언니 레아를 주었습니다. 야곱은 다시 7년을 더 일해서 라헬을 얻습니다. 

그렇게 극진하게 사랑한 아내인데 아이를 낳다가 산고 끝에 죽었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애통했겠습니까? 야곱은 이 사랑과 이 애통한 마음을 라헬의 묘비에 새겼을 텐데 사랑과 애통하는 마음이 뒤섞인 기가 막힌 서정시였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때 히브리 민족에게는 문자가 없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야곱은 무슨 수로도 자기의 이런 마음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쓰셨으니까 그 글씨가 남아 있을 수 없었지만 라헬의 묘비는 돌이니까 묘비가 남아 있다면 묘비의 내용도 판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라헬의 무덤은 남아 있어서 성지순례의 코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묘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보다 더 궁금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죽어 무덤에 묻히고 그 앞에 묘비가 선다면 거기에 무엇이라고 적힐까 하는 것입니다. 

공원묘지에 가면 묘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묘비에 그냥 아무개의 무덤이라는 것과 생년월일, 자녀들의 이름을 새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의 업적과 생애를 요약해서 간단하게 새겨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국립묘지에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라고 새겨 놓은 묘비가 있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춘가도 옆에 있는 모란공원 묘지에는 입구에서 좀 들어가서 오른쪽에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라는 대중가요를 부른 가수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 대중가요 가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가수는 이 가요를 남겼습니다'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언제인가는 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내 육신은 땅에 묻히고 그 앞에 묘비가 하나 설 것입니다. 그 묘비에는 무엇이라고 새겨질 것 같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 일생은 어떻게 요약될 것 같습니까? 

간혹 묘비에 그 사람의 업적을 장황하게 새겨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무덤의 주인은 일을 참 많이 했구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묘비에까지 저렇게 할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칼빈의 무덤은 작고 묘비도 아주 작습니다. 칼빈이 죽을 때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 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이 낳고 죽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니다. 내 무덤을 크게 만들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아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렵다" 이런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영시 가운데 18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토마스 그레이(Thomas Gray)가 지은 "촌락교회 묘지에서 쓴 만가(Written Elegy in a Country Churchyard)"라는 유명한 시가 있는데 이 시의 시작부분은 이렇습니다. 

가문의 자랑도 권세의 호강도 
미와 부가 가져다 준 모든 것들이 
다 같이 피지 못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길은 무덤으로만 뻗어 있다. 

이 시는 죽음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발달에 기여한 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시를 쓴 그레이는 왕실에서 계관시인의 칭호를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대학교수로서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묘비에 기록될 것은 무엇인가 기준이 달라야하고 함축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감동을 주고 교훈을 줍니다. 

여러분, 혹시 마포에 있는 양화진에 가 보셨습니까? 양화진에는 선교역사 초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수고하다가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의 묘지들이 있는데 그 묘비의 비문들이 참 감동적입니다.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하는 비문도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의 소원은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동방의 은둔국 한국에 묻히기를 더 원한다는 이 비문을 통해서 이 묘지의 주인이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게 됩니다. 

"나는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러 왔노라" 라는 비문도 있습니다.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한국을 위해 바치겠노라"는 비문도 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우리의 묘비에도 이렇게 감동적인 것이 새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다음에 내 묘비에 무엇이라고 새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을 잘 해야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됩니다. 

공원묘지에 갔을 때 큰 묘비에 장황하게 많은 것을 적어놓은 것보다 십자가를 하나 새겨 놓은 것이 더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 사람의 업적을 적어 놓은 것은 과거를 말하고 "이제 이것으로 끝났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과거완료형 비문입니다. 

예수님은 묘비를 세우기도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에는 묘비가 없습니다. 빈 무덤은 기독교의 특징 가운데 대표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지금 천국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며 잘 살고 있습니다.' 현재를 말해 줍니다. 또 "나는 주님 재림할 때 부활할 것입니다." 미래를 말해줍니다. 현재와 미래가 살아 숨쉬고 있는 비문입니다. 

해외에 가야하는데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는 돈을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택시는 "따불" "따따불" 외치면 통하지만 비행기 좌석을 구입하는 데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오래 전에 티켓을 예약해 둔 사람이 제일입니다. 십자가는 영생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의 예약확인증입니다. 

종종 성인들의 무덤에 갑니다. 가서 느끼는 것은 "나, 다른 것보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겠다. 십자가 붙들고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묘비에 무엇이라고 기록할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 삶의 기준이 달라져야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열왕기상하가 있습니다. 열왕기(列王記)는 여러 왕들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킹즈(Kings)」, 왕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왕들에 대해 기록할 때 "이 왕은 이러하였다"라고 평가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가의 기준은 그가 얼마나 영토를 넓혔느냐, 그가 얼마나 많은 건물을 지었느냐, 그가 얼마나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느냐, 그가 백성들을 얼마나 이것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였느냐?' 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세력을 가장 크게 떨치게 한 임금은 여로보암 2세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끊어질 때가 거의 없어서 국토의 넓이가 늘 달랐는데 여로보암 2세 때가 국토가 제일 넓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이 때 제일 흥왕했습니다. 일반적인 평가로는 여로보암 2세는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평가를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서는 여로보암 2세에 대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왕하 14: 24) 간단하게 적고 있습니다. 이 때 종교와 도덕이 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자세한 모습은 아모스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평가는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15: 5) 

유다 왕 아사에 대한 평가는 "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이스라엘 왕 나답에 대해서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을 예언자적인 기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언자적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에 열왕기서는 역사서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예언서 가운데 전기 예언서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예언자적인 기준으로 볼 때 높은 점수를 받는 삶이 차원이 높은 삶이며 향기가 오래 전해지는 삶입니다. 그리고 영생으로 연결되는 삶입니다. 왕들에 대한 열왕기서의 이런 평가는 형태가 다른 또 하나의 묘비의 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적인 기준으로 볼 때 내 묘비에는 무엇이라고 적을 수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볼 때, 다시 말해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이 다음에 내 묘비에는 무엇이라고 새길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앞일을 미리 생각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 다음에 내가 죽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생각하면서 그 때 당황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 당황하지 않도록, 문제가 되는 것들은 지금 고쳐야합니다.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의 작품 가운데「나사로는 웃었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거지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나사로는 웃었다」라는 희곡에는 나사로는 죽어 낙원에 가서 나흘 머물고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돌아 온 나사로는 달라졌습니다. 먼저 돈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자기도 큰 돈을 만져 보기를 원했는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치사한 돈을 보면 경멸하는 웃음을 보냅니다. 그 다음에는 권세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행차하는데 사람들은 미친 듯이 환호했지만 낙원에 다녀 온 나사로는 길목에 서서 오히려 황제를 비웃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신앙 때문에 나사로는 황제 앞에 끌려가서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황제를 향해 여유 있는 미소를 보냅니다. 낙원을 체험했기 때문에 나사로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돈과 권세와 죽음에 대해서 여유 있는 웃음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다음에 죽어 천국에 갈 것입니다. 나사로처럼 미리 다녀온 것으로 생각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하늘나라에서는 나의 행적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묘비의 비문이 새겨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런 소박한 질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세계 인구가 60만인데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걸 어디에 보관한단 말인가? 그거 불가능하지!' 인간의 지혜로도 마이크로 필름이다, 컴퓨터 칩이다 해서 기록과 보존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왜 못 하겠습니까? 

전에는 방송사에서 큰 디스크를 사용했기 때문에 자료실이 아주 넓었습니다. 디스크가 무거웠기 때문에 방송국 건물을 지을 때 자료실에는 철근을 더 많이 넣었습니다. 이제는 CD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나의 일이 기록되고 보관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늘나라에서 나의 일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생활하면 칭찬이 가득 기록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라헬의 묘비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도 궁금하지만 앞으로 내 묘비에 무엇이라고 새겨질 지가 더 궁금합니다. 그 때 좋은 말, 감동적인 말이 새겨질 수 있도록 지금 신앙생활 잘해야겠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기준이 맞게 살아야겠습니다. 죽은 다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아니 지금 하나님의 기록에 좋은 말이 새겨질 수 있도록, 신앙생활 잘 하고 하나님의 평가 기준에 합당하게 살고 영생이라는 사실에 합당하게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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