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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감사하십시오 (엡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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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감사하십시오 (엡 5:1-4)

: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옛날에 시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의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렁에 무거운 벼루를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서 자다가 그것이 떨어지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머리를 크게 다쳐서 몸져누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옆집에 사는 사람이 그 집에 문병을 갔습니다. 가서보니 머리를 온통 칭칭 동여매고 누워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그의 아내가 훌찌럭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위로의 말을 하여야 하겠는데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눈은 안 다치셨데유?”

그런데 이 말을 하고나니 스스로 생각을 해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지금 머리를 다쳐서 누워있는 사람에게 눈은 안 다쳤냐고 묻는 것은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당가 감나무 위에서 까마귀가 깍깍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말.

“저 새도 집에서 키우는 거예유?”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잠언 말씀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고 하였습니다. ‘은 쟁반에 금 사과’는 썩 어울리는 것입니다. 또, 잠언 말씀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잠 11:22)는 말씀도 있습니다. ‘돼지 코에 금 고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울리는 말과 행동이 있는가 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동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는 말과 행동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에 원리가 있습니다.
  

I. 원리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은 역시 ‘그러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먼저 그렇게 하셨기에 그 결과로써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원리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러므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원리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먼저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에 ‘그러므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1.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에 ‘그러므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누구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받는 그 순간 보다 흐뭇한 건 없을 걸/ 사랑의 눈길 보다 정다운 건 없을 걸 / 스쳐닿는 그 손끝 보다 짜릿한 건 없을 걸 / 혼자선 알 수 없는 야릇한 기쁨 /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좋은 말 사랑해

송창식 작사 작곡, 김세환 노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누구에게도 어떤 사람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받는 다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 반대는 불행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도,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에게 조차 사랑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윗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에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제물이 되셨습니다.


2. 예수님이 제물이 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소중하고 거룩한 것은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왕국의 임금에게 죽을병에 걸린 딸이 있었습니다. 딸을 살려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고 방을 대궐문에 붙였습니다. 

아주 먼 시골에 사는 삼형제 중 맏형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볼 수 있는 망원경으로 그 방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둘째가 가진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순식간에 대궐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셋째가 가지고 있는 무슨 병이라도 고치는 사과를 공주에게 먹여 공주의 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삼 형제의 망원경과 양탄자, 그리고 사과가 다 제 몫을 하였기에 공주를 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사과를 바친 막내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두 형은 망원경과 양탄자를 이용하였지만 막내는 단 하나뿐인 귀중한 사과를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이용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희생하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희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는 신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모습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II. 부정  

오늘 말씀은 사랑을 받은 자녀답지 않은 어그러진 모습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우리에게는 하지 말아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땅하다[prevpw/프레포(4241)]’는 뚜렷하게 빼어나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삶에 하지 말아야 할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1. 마땅하지 않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입니다. 이것은 입에도 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입에도 담지 말아야 할 것을 예화를 들어가면서 깊게 설명하는 것은 결국 입에 담는 것이니 간단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음행[poeiva/폴네이아]은 현대 사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포르노그라피(poography)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고대에 헬라어에서 부도적한 성행위 특히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것[ajkaqarsiva/아카달시아]은 죽은 사람의 썩은 시체를 비유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여러 종류의 성적인 타락을 가리킵니다. 특히 근친상간이나 수간 혹은 동성애와 같은 것으로 주로 자연스럽지 않은 성적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성욕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과하게 음식을 탐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성을 탐닉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탐욕[pleonexiva/플레오넥시아]은 성적인 분야 이외의 다른 차원의 모든 욕심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지나친 욕심은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고 사회를 혼동으로 몰아넣습니다.

어떤 젊은이에게 사단이 찾아왔습니다. 사단은 젊은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금 항아리 일곱 개를 주겠다고 제의하였습니다. 젊은이는 잠시 망설였지만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준다는 것이기에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젊은이는 금으로 가득 찬 일곱 개의 금 항아리가 자랑스러워 매일 매일 그것을 열어보고 혼자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젊은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일곱 번째 항아리 때문이었습니다. 가득 채워진 여섯 개의 항아리보다 절반밖에 없는 일곱 번째 항아리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왠지 부족하고 불완전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일곱 번째 항아리를 그 자신의 노력으로 마저 채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논과 밭을 팔아 금으로 바꾸어 일곱 번째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였습니다. 젊은이는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오로지 일곱 번째 항아리를 금으로 채워보겠다는 일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젊은이의 얼굴은 점점 야위어갔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웃집에 들어가 훔쳐서라도 채우고 싶었습니다. 여섯 항아리하고도 반 항아리나 되는 금을 가지고도 젊은이는 번민과 고통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욕심 부리면서 기쁨을 잃은 채 자기를 파괴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끼니 걱정이나 안하고 살게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던 사람들이 먹고 살만해지면 “이제 두 다리 펴고 누울 수 있는 집 한 칸만 마련하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며 허리띠를 졸라맵니다. 그러나 집을 장만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빈집에 누워 잠이 옵니까!”하면서 이것저것으로 집을 채워야지요. 채우다보면 집이 부족해서 더 큰집으로 바꿔야하고 큰집으로 이사하면 더 많은 것으로 채워야하고 그러다 보면 그 큰집도 부족해서 더 넓은 집을 사야하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헉헉-) 채워지지 않는 일곱 번째 항아리를 채우려고 헉헉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그것에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모습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 역시 스치고 지나가는 유혹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빠져서 헉헉대는 것은 제발 피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혜와 용기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격려해주고 붙들어주는 믿음의 이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이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하지 않은 행동을 피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비록 그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아도 입으로 짖는 잘못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4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4a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여기 ‘마땅치 아니하다’에서 ‘마땅하다[ajnhvkw/아네코]’는 3절에서의 ‘마땅하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다르다’, ‘도착하다’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당연히 나와야 할 말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2. 마땅하지 않는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당연히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은 더러운 말과 어리석은 말과 상스러운 농담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역시 길게 설명하는 것은 이를 즐기는 일일 수 있기에 간단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누추함[aijscrovth"/아이스크로테]은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속되고 더러운 말을 가리킵니다. 사람을 모함하거나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말[mwrologiva/모롤로기아]은 본래 낮은 지능을 가진 사람이 하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천박한 말을 피해야 합니다.

희롱의 말[eujtrapeliva/유트라펠리아]은 상스러운 농담을 가리킵니다. 성적으로 상스러운 농담이나 다른 사람을 흠잡아 흉보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기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농담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모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재치 있는 유머는 얼마든지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서 가려서 할 말이 있습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더욱이 말은 영적인 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러한 말을 늘어놓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말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말은 곧 행동이 되고 우리의 인격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여야 합니다. 마땅하지 않은 행동이 있는 것처럼 마땅하지 않은 언어가 있습니다.

마땅하지 않은 말은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마땅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할 것을 다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힘써야 할 긍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III. 긍정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답게 행동하는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4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4b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여기에서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말은 ‘오히려[ma'llon/말론]’입니다. 이것은 앞의 것보다 ‘더욱 더’ 선호해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 매우라는 뜻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은 마땅치 아니한 말이니 그러니 더욱 더 감사하는 말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마땅히 감사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감사[eujcaristiva/유카리스티아]’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선 회복하여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의 사전적인 의미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입니다. 일의 결과에 대하여 다른 분이 베풀어준 은혜요 도움인 것을 인정하여 그 분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인정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크고 놀랍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한번은 시장에서 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 고기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마침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다가 그 고기를 물고 달아납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개는 사라졌습니다. 이때 할아버지는 역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무엇이 감사하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하는 말입니다.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맛은 그냥 있으니 감사하지!” 

사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입맛을 잃으면 별로 감사한 일이 못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입맛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기 잃은 것은 아까워하면서 입맛을 잃지 않은 것은 감사하지 못하여 입맛이 써집니다.

우리의 삶에서 원망하는 말은 하기가 쉬운데 감사의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감격은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곧 지겨워지고 애굽에서 먹던 고기가 그리웠습니다.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삶의 뿌리처럼 되었습니다.

두 소년이 포도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소년이 “포도 맛이 좋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소년은 “그렇긴 한데 씨가 너무 많잖아!”하며 신통치 않게 대답하였습니다. 

꽃밭을 지나며 첫 번째 소년이 “저 크고 예쁜 빨간 장미 꽃송이 좀 봐!”하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자 같이 가던 다른 소년은 “그렇지만 가시가 너무 커!”하고 불평했습니다. 

두 소년이 음료수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꿀꺽꿀꺽 몇 모금 마신 후 두 번째 소년이 “내 병은 벌써 반이나 비었네!”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소년은 “내 병은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군!”하고 얼른 응수했습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감사의 말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감사의 말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바로 믿음의 태도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이루어진 결과 때문에 드려야 할 것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어주실 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본질적으로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기가 더 쉽습니다. 욕심을 따라서 행동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말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땅하지 않은 행동이 있고 마땅한 행동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마땅하지 않은 말이 있고 마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마땅한 말과 행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입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그 어떤 감사할 것도 없다고 해도 이 한 가지만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끄는 데로 원망과 불평이 우리의 삶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말을 접고 사랑과 감사의 말을 펼쳐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이 감사하도록 허락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의지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가도록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불평이나 원망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역시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역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감사합시다. 감사하며 살기로 마음에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러므로 감사하기로 작정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자 인격입니다.   

감사의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림으로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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