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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의 의미 (고전 10:16-17, 1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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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 (고전 10:16-17, 11:23-29)

저희 교회 친교실에는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작년 7월에 홍정화 자매가 그린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이 테이블에 열두 제자와 함께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홍정화 자매는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하여 바닥에 앉아 만찬을 나누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친교실에 가셔서 다시 한 번 그 그림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특별한 행사 때에 성찬을 갖기는 하지만 보통 일 년에 두 차례, 부활절과 감사절 기간에 성찬을 가집니다. 그리고 몇 년마다 한 번씩은 성경에 나오는 성찬의 의미를 설교를 통하여 전합니다. 다음 주에 있을 성찬식을 앞두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행사를 갖고자 합니다.    

성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에서 이 사건을 기술하면서 사용하는 네 가지 용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각의 용어는 각기 다른 통찰을 제시합니다. 

첫째, 사도행전 2장 42절은 초대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가정에 모였을 때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거기서 떡을 떼는 것은 주의 만찬을 가리킵니다. 떡을 떼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 후에 세 차례 나타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그들과 함께 드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가시다가 날이 저무니, 두 제자가 예수님께 함께 머물자고 요청을 합니다.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은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떡을 떼다’라는 용어는 다시 사신 주님께서 신자들과 함께하시는 임재에 초점을 맞춥니다. 

둘째, 고린도전서 11장에서의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26장 17-29절에서도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위해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강조하십니다. ‘떡을 뗀다’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느껴지고 그분의 부활이 확인되기 때문에 기쁨을 주는 반면, 주의 만찬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엄숙해지게 합니다. 

셋째,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서 나타나며 헬라어로는 교제를 뜻하는 koinonia가 사용되며 개역성경에서는 ‘참여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함께 참여하여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영어로는 성찬을 communion이라고 부릅니다. 

넷째, 고린도전서 11장 24절에 나타나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헬라어로 ‘감사’를 뜻합니다. 우리가 식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주의 식탁에 둘러앉을 때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식탁에서 드리는 감사는 창조, 더 나아가 구속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성찬)의 의미를 생각할 때 네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그리스도의 임재, 엄숙함을 낳는 그분의 죽음,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신비에 참여함, 우리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가운데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그것입니다. 


성찬의 유래 

개신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방편을 크게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요 둘째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요 셋째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예식이고 성찬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믿지 않는 자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예식이라면 성찬은 예수를 믿는 성도의 믿음을 북돋아주며 은혜를 더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찬식을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찬은 예수님이 전에 없던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내신 것이라기보다 모세 때부터 지켜오던 유월절 의식에 새롭고도 깊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만찬이 성찬의 시작입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 26:21). 아무도 모르게 제사장들과 거래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그런 말씀하시니 가룟 유다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제자들도 깜짝 놀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번갈아 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아니지요?" 저마다 근심하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같이 태연하게 묻습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자신을 배반하려는 유다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그저 “네가 말하였도다” 한 마디만 하십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물론 한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빵 한 조각을 받고나서 그에게 사단이 들어갔고 곧 만찬자리를 떠났다고 요한복음 13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가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찬식이 시작됩니다. 성찬식은 주님이 선택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함 받은 구원받은 백성만이 참여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참여할 수 없고 참여한다 할지라도 그저 빵이나 잔을 드는 것밖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하시면서 제자들과 이러한 친교 나누기를 간절히 바라셨다고 합니다. 무슨 고난을 받습니까? 심문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Exodus 시킨 것을 기념하는 절기에 주님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쳐 인류 역사상 아무도 하지 못했던 제2의 Exodus를 준비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과 같은 구약의 대부분의 의식들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언약으로 성찬만은 지키게 하셨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하늘나라의 포도주로 주님과 교제할 때까지 계속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바로 알고 바로 참여하여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 구원받은 증거이며, 주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요, 주님께 헌신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의미 

예수님께서 만찬을 나누는 그 저녁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시간이었고 이제 곧 십자가를 져야 할 때인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의미와 뜻을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십 년 전에 이웃 교회 목사님이 신장이 안 좋으셨는데 투석해도 안 되니 사모님이 자기의 신장을 하나 떼어 남편 목사님에게 이식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신장은 두 개나 있기에 하나를 떼어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장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심장이식을 하려면 한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심장을 떼어 몇 시간 안에 다른 사람에게 옮겨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의 심장병을 고치기 위해서 자신의 심장을 이식해 주려고 합니다. 수술을 앞두고 아빠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 아빠는 죽으면서 너를 살리는데 이 아빠를 기억해다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를 살리기 위한 것이니까 너는 이 아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려서 아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빵을 떼어 주면서 내가 너를 살리려고 내 살을 찢는다, 내가 너의 죽을 병을 고치려고 피를 흘린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에게 심장을 주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자란 아이는 그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그 아버지의 몫까지 자신이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는지,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하나님이 자녀가 될 수 있었는지, 죄 많고 부족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살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 삶이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됩니다. 그 목요일 저녁,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지셨던 답답한 심정이 혹시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제발 나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을까요?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는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찬과 관련된 세 동사가 있습니다. 기념하라. 선포하라. 참여하라. 

1. 주님이 행하신 것을 기념합니다(11:24,25) 

예수께서 떡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무슨 감사를 드렸을까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됨을 인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한 뜻이 무엇일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들어 감사하고 있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의 생애의 마지막 밤입니다. 잠시 후면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하속들에게 체포가 되어 심문을 당하시고 그 다음날 아침이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삼 년이나 함께 먹고 마시고 지냈던 제자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태연하고 담대하셨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26절에 보면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이라 되어 있는데 그 짧은 구절에 복음의 요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1) 죽으심: 유월절 만찬은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Matzoh)과 쓴 나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양은 애굽을 나오기 전 문설주에 발랐던 양의 피를 생각나게 합니다. 무교병은 미처 반죽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애굽에서 급히 나오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쓴 나물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며 고생하던 때를 생각나게 합니다. 거기에다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마시는 전통을 추가했습니다.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는 모습은 앞으로 교회가 성찬식을 통하여 주님과 어떻게 교제할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받으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니 그들이 다 마시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을 맺을 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언약서를 낭독하니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짐승의 피의 절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리며 "이것은 주께서 이 모든 말씀을 따라 너희에게 세우신 언약의 피다"(출 24:8). 

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 내가 이스라엘 집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1, 33). 

새 언약은 예수님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전제로 하며 예수님의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시내 산의 언약은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맺었으나 예수님을 통한 새 언약은 영적인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과 맺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한 지 600년 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 하시면서 새 언약을 선포합니다. 


2) 부활: 죽으신 분이 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합니까? 다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 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고, 속죄의 근거가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는 근거가 됩니다. 첫째 아담은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아담의 후손들에게 죄용서와 구원과 부활의 근거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도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활이요 우리의 능력입니다.  


3) 재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믿는 자에게는 승리의 날, 영광의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의 종말에는 우주적인 대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의 박해와 더불어 천체의 질서가 깨어집니다. 그 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린다고 합니다. 하늘과 바다에 있을 심판의 징조로 인하여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사단의 세력은 무너지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을 알려고 애를 씁니다. 

아무리 시대의 징조를 관찰하고, 열심히 종말론 세미나를 참석하여 종말에 관한 지식이 많다할지라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준비합니까? 각자가 맺은 열매를 주님께 보여드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언제’ 재림이 있을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재림을 준비하느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 반복하여 경고하셨습니다(막 13: 33,34,37). 이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깨어 있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십자가와 부활, 재림의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주님을 선포합니다(11:26)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출애굽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후대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인 출애굽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출애굽사건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사단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되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한 떡과 한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까지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3. 함께 참여합니다(10:16-17)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성찬의 유래가 된 유월절 식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교제의 자리였습니다.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 안에 들어가며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맺은 백성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연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자들을 찾아 서로 위로하고 용납하며 사랑을 베풀 때 거기에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고 치유가 있고 진정한 코이노니아, 그리스도 안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엡 4:3). 반목과 질시와 오해를 떨쳐버리고 이해와 관용으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가져야할 바른 자세입니다. 따라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구원받은 공동체가 된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세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찬을 통해서 주님과 내가 하나 됨을 확인합니다. 따라서 성찬이 의례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없이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떡을 먹는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주가 죽으신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그의 죽으심을 전하기를 다짐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며 우리의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28절에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살피라'는 말은 자기의 죄와 허물을 살피고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자기를 살피라'는 말은 남의 허물보다 자기의 허물을 크게 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남이 잘못하는 것은 잘 알지만 자기의 잘못은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들이 성찬 시에 세례 받은 사람이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아예 받지도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회개하고 다 내려놓고 성찬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했을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죄를 범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진정한 회개 없이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면 자기가 받을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약한 자, 병든 자, 심지어 죽은 자까지 있다고 말하면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마음가짐을 일깨워 줍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찬에 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몸과 마음을 새로이 해야 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고 모든 죄를 자복한 후 회복된 심령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절실히 체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고 피를 흘리셨는데 나는 그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신앙이 그분이 하신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은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찬을 받은 후에는 감사하는 마음과 아울러 영생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결단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성찬이라는 의식을 통하여 과거를 돌아보며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현재에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살펴보고, 미래에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전은 눈에 보이는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은혜를 받지만 예전을 통하여 눈으로 보게 함으로 은혜를 끼칩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물려준 예전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은 주의 몸 된 교회의 각 성도들이 함께 떡을 먹고 잔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하였다는 것을 기념합니다.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피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가리킵니다. 

요 6:53, “누구든지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므리바 물가에서 물을 먹으며 출애굽의 구원을 체험하였으나 그들은 광야에서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영생을 가져다주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그 떡이라. 예수님의 살과 피가 바로 영생을 주는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는 의미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떡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부어주는 행동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대속의 제사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웠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즉 새 언약의 제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되게 합니다.  

다음 주에 성찬식을 가집니다. 한 주일 동안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기 위해 왔다"(마 20:28)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우리는 무엇을 해드렸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신 것을 보면 그저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동편의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온갖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향한 믿음을 지키며 한 해 동안 거둔 열매를 인하여 눈물의 감사를 드렸습니다. 

조국을 떠나 낯선 미국 땅에 이민 와서 비록 언어의 장벽이 있고 문화적 이질감이 있는 곳에 살지만 인도하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풍성한 감사의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을 들면서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새롭게 느끼고,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깊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빵과 잔을 함께 나눔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며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섬기는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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