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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자의 일을 하라 (딤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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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일을 하라 (딤후 4:1-5)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옛날 우리나라가 아주 가난했던 시절 사람들은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혹은 “밥 먹었냐?”라는 말이 인사였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일이 하도 많았기 때문에 혹 굶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서 하는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옆 사람에게 “매일 생명의 양식을 취합니까?”라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도들의 영혼의 호흡은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또 옆 사람에게 “매일 생명 숨 쉬며 삽니까?”라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건강을 매우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만나면 “운동합니까?”라는 말이 인사입니다. 성도들의 영혼의 운동은 전도입니다. 

그렇다면 또 옆 사람에게 “전도 운동 합니까?”라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네 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은 영혼이 아주 건강한 성도이고, 대답을 할 수 없는 분은 영혼의 건강지수가 위험한 성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의사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의사의 말을 잘 듣는 정도로, 주님의 말을 잘 듣는다면 얼마나 영혼이 건강하겠습니까? 오는 11월 27일 영혼 추수 주일을 앞두고, 오늘은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할 때에, 다시 한 번 우리 모두의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하여 영혼이 건강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디모데 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로서 목회자요 전도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 서신으로 불리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 사도요,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형제’ ‘동역자’ ‘마음을 같이 한 자’ ‘하나님의 일군’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디모데에게 신학 사상, 성도에 대한 윤리적 교훈, 교회의 행정 등 목회 전반에 걸쳐 애정 어린 지침을 제시한 후, 이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1절에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실로 엄숙하고 장엄한 권면입니다.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이것은 매우 중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디모데의 목회 사역을 보고 계신다는 의미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거듭거듭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시 139:1-4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했고, 시 94:8-9에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했으며,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그의 눈은 빛난 불꽃’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그의 신앙도, 그의 행위도 이처럼 불꽃같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꼬람 데오, 곧 투철한 神前 의식 속에서 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전 의식이 없으면 1)불신자처럼 우준하고 무지몽매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2)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초림하신 주님은 만민의 대속자였으나, 재림하시는 주님은 심판의 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산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 있는 자들을 가리키고, 죽은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죽음으로부터 일어나게 될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구절은 ‘생존자와 죽은 자’ 또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심판에 관한 교훈도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전 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고, 요 5:29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으며, 벧전 1:17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1)사람은 인간의 비판이나 판단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주님 앞에서 옳은 일 선한 일을 하고서도, 사람들의 비판으로 마음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기는데, 그러나 심판하실 분은 주님이시므로 낙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2)최종 심판을 하실 분은 주님이시므로 인간으로부터 감사와 칭찬을 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가장 중요한 것은 심판 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주님의 최종 선언을 듣는 일입니다. 만일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정신으로 섬긴다면 이 땅의 교회들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여기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에피파네이아’라고 하는 말입니다. ‘에피파네이아’라는 말은 두 가지의 특별한 용법이 있는데, 1)신의 나타남 곧 주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주님의 나타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2)황제가 어느 지방이나 마을을 방문할 때 쓰인 말입니다. 황제가 어느 지방을 방문하면 그것은 곧 황제의 에피파네이아였습니다. 황제가 나타나면 모든 거리는 청소되고 장식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어느 마을에서나 황제의 에피파네이아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에피파네이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언제 나타나시더라도 책망 듣지 않도록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느 때에 예수님께서 오시더라도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러한 준비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느 순간에 오시던지,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최고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영광의 나라가 건설되는데, 너는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영예에 합당하도록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한 배경에는 이러한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핵심적인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업은 시기의 호황 또는 불황에 따라서 이해관계가 크게 좌우됩니다. 경기나 주가는 때와 시기에 따라서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하는 일에는 시기의 호황이나 불황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환영되는 때에는 많은 결신자들을 얻게 되는 것이고, 복음이 배척되는 때에는 주님을 위한 수난과 순교의 영광을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명령은 1)때를 얻을 때는 복음 전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전하라는 것이고 2)때를 못 얻을 때도 적절치 못하다는 구실로 핑계하지 말라는 것이며 3)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4)지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가리켜 말하기를, 마치 소경이 절벽 끝에 서서 지팡이를 떨어트리고 그것을 주우려고 앞으로 몸을 굽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인생입니까? 이와 같은 긴박한 위기에 놓인 인생들에게,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겔 2:7에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고 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의무가 있고,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의무를 감당하지 않을 때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와 같은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할 때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이 오래 참음의 덕이 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모세의 이 하소연이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지요. 고속 버스만 타도 히터를 켜라는 사람도 있고 끄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 운전기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기 어려운 일도 많이 있고,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도 많이 대하게 됩니다. 습관적인 불평불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병들게 하고, 교회에 내분을 일으키며 해악을 끼치는 신자들이 교회마다 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중직자들은 그 누구보다 정말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구역장들은 구역원들을 돌아볼 때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3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배척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교회 안의 신자들에게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1)진리의 말씀으로 중생하지 못한 신자들은, 호기심과 허망한 충동으로만 종교적 만족을 채워 보려 하고 2)귀가 가려워서 육체와 귀를 즐겁게 해주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고 3)자기의 사욕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만을 원하고, 그러한 스승을 많이 둡니다. 이러한 신자들은 결국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참된 복음 진리를 배도하고 이단 사술에 걸려들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근신하라” 이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살고 이 세상에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합니까? 불평하지 않습니까?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을 각오로 주님을 따르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라고 울면서 찬송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복음 전도의 직무를 끝까지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에게 주어진 권면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주어진 엄숙한 명령임과 동시에, 이제 순교를 목전에 둔 노 사도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최후 유언으로 당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의 최후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최후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 유언을 준행하며 삽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후 1세기경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라는 그의 제자에게 주어진 권면이로구나! 이렇게만 생각해 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아니 모든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성경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는 말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을 100번 1000번 읽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고, 믿음은 한 치도 자라지 않을 것이며, 인격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명령은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인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무역 센터와 국방부 테러 사건에서 보았듯이, 테러리스트들은 그들의 지도자의 명령 한 마디에 기꺼이 목숨을 버리며 자폭을 합니다. 

모슬렘 교도들은 자기 나라 국민들은 굶주리고 병원 시설이 형편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영국에다 포교를 위하여 모슬렘 사원을 건축하는데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현재 미국에만도 1,500여개나 되는 모슬렘 사원이 있다고 하며, 신도 수도 4-5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슬렘 교도들 또는 테러리스트들이 그들의 지도자 명령에 목숨을 기꺼이 바쳐 가며 순종하듯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세상은 벌써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라고 목표를 정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생각입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정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T. V에 나오는 동물 세계를 보면, 사자나 호랑이가 사슴이나 얼룩말을 잡아먹을 때, 모든 짐승들을 다 쫓아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잡아먹으려는 어떤 표적을 정하고 그 목표물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막연히 아무에게나 전도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에게 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대상을 정하고, 그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그와 다리를 놓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식사도 대접하고, 기쁠 때는 축하해 주고, 슬플 때는 위로해 주며, 사귀고 교제하며 관계를 맺고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기회를 포착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당신은 혼자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인데,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면, 두 번째 질문은 더욱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혼자 올 수 있었단 말입니까?” 우리가 죽어서 천국 문에 들어가려 할 때, 이런 추궁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 땅에 있을 때 반드시 전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당신은 천국에 혼자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감옥에서 제비가 하루 몇 번 새끼에게 먹이를 날라다 주는가 세어보았더니 하루 250번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를 몇 번이나 찾아다닙니까?

송정역에 기차가 잠시 머무르다 떠나듯, 언젠가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인생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인생을 어떻게 살다 왔노라고 주님께 보고하시겠습니까? 목사로써 이 시간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전 성도들이 모두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인의 일을 하다가, 주께서 부르시는 날 사도 바울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는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고 주님 품에 안기는 우리 모두의 생애 최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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