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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골방과 세상에서 모두 유효한 믿음 (히 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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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과 세상에서 모두 유효한 믿음 (히 11:6-12)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비싸기 때문에 집의 구조가 단층이고 또 침실 중심으로 돼 있지만 미국은 땅이 넓고 또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에 집의 구조가 1층은 거실과 부엌, 주방 위주로 돼 있고 2층에 침실이 있는 구조로 돼 있습니다. 위층과 아래층. 기독교 철학자 프랜시스 셰이퍼는 서구사상이 기독교의 진리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사물을 위층과 아래층으로 나누어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지적합니다. 

위층과 아래층.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인데 이층은 신앙과 영성의 세계를 말하고 아래층은 사람이 실존하는 이 세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위층과 아래층에 구별을 두었다는 말은 신앙의 세계와 실존의 세계를 엄격하게 구별했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신앙의 원칙이 통하지만 실제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세상의 법칙이 통하는 이런 식으로 나누어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셰이퍼는 지적하기를 원래 이러한 위층 아래층의 구별은 철학자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서구의 철학자들이 애초부터 신앙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신앙을 인정은 하되 신앙은 신앙의 영역에 국한시키고 과학이라든가 철학이라든가 학술은 별도의 영역이 있다고 분리시켰습니다. 그래서 따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종종 하는 말 그대로입니다. 

신앙은 신앙으로써 봐야 되고 과학은 과학으로써 봐야 된다, 과학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안 되고 또 신앙을 과학의 눈으로 보면 안 된다, 그럴듯하게 들리지요. 신앙은 신앙의 영역이 있고 과학은 과학의 영역이 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이렇게 구별을 하게 된 다음에는 이 두 가지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나누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신학자들마저도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신학이고 신앙은 신앙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까 신학자들이 학문을 논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다가도 교회에서 설교할 때는 아주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학문과 신앙의 영역을 서로 따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위층과 아래층의 구별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살 때는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교회에 오면 교회의 법칙을 따르지만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직장에서는 직장의 룰을 따르고 학교에서는 학교의 룰을 따르고 교회에서는 교회의 룰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이와 같은 구별을 했기 때문입니다. 위층과 아래층, 영적인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구별을 했습니다. 

프란시스 셰이퍼가 왜 이러한 위층 아래층의 구별이 기독교 신앙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보느냐면 결국은 신앙은 검증할 수 없는,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진리를 증명할 수 없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오직 개인의 주관적인 영역이라는 그런 것을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셰이퍼는 이것을 비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 어떤 이론적인 비약을 하는데 어차피 신앙의 세계와 과학, 학술, 세상의 세계를 나누어서 보기 때문에 신앙은 신앙대로 유지하고 그리고 자기의 과학이든 세상적인 신념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런 식의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연세 드신 어른을 별도의 방, 별도의 시설에 모셔놓고 가끔은 찾아뵙지만 평소에는 방치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별로 상관이 없는 분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신앙도 이처럼 인간의 이성, 합리성, 현실과는 격리시켜서 별도의 방에 방치하는 것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에서 신앙은 관계가 없는 것이 돼버리고 맙니다. 우리 현실과 상관없는 것이 돼버리고 가끔 마음의 평강을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 돼 버리고 맙니다. 

제가 왜 오늘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제가 지난주에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영적인 방법으로 골방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위층과 아래층에 구별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골방용이 돼버린다는 것입니다. 골방 안에서만 유효한, 골방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지만 골방에서 나오면 별도의 세상의 법칙이 다스리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골방 안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골방 밖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식의 신앙이 돼버리고 만다면 그게 바로 신비주의이고 그게 바로 도피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건 문제가 큰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 관념 속에나 존재하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는 그런 식의 생각이 돼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구분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층과 아래층의 구분이 없습니다. 성경은 한 층입니다. 하나의 세상이지 두 개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골방안과 밖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세 가지 믿음의 사례를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것은 아브라함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념, 그의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개인의 확신입니다.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이고 개인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검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이 생각이 옳은지, 이 생각이, 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또 개인적으로 내면적인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것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이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검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아기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사라가 이 믿음을 가짐으로 이 믿음이 사라의 골방, 사라의 영혼, 내면, 그의 영적인 체험, 영적인 확신 이 차원에서만 끝난 게 아니고 사라가 이러한 믿음을 가진 결과로써 모든 사람이 보고 만지고 알 수 있는 생명을 잉태해서 이삭을 낳았어요. 

사라의 믿음은 다른 사람이 검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믿음에 의하여 이삭을 낳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확증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신앙이 위층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래층에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신앙이 더 이상 어떤 영성, 생각, 관념, 소신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고 물질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한 믿음을 말하면서 이 한 믿음이 이런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사례를 예로 들고 있는데 세 번째로 7절 말씀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이것은 어떤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까. 노아의 홍수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히브리서 저자가 한 가지 믿음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장차 기업을 받을 땅을 향하여 나갈 때 개인의 믿음을 좇아서 나아간 그 믿음도 믿음이고, 사라가 나이 많아 단산하였으나 믿음으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그것도 믿음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 하실 때 노아가 믿음으로 경고를 받아서 방주를 예비하여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한 것, 그것도 똑같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지극히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렀지만 사라의 경우에는 그것이 물리적인 검증이 가능한 결과를 낳은 것이고 노아의 경우에는 인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사건에서, 심판하시는 사건에서 노아가 믿음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그냥 설화가 아니고 세계 모든 문명의 신화 속에 홍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또 지질학적인 증거를 보면 과거 한때 온 세상을 덮었던 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 일이요, 인류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인데 이 사건 속에서도 믿음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하는 노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믿음이에요. 똑같은 믿음인데 어떤 믿음은 남이 검증하기 어려운 지극히 주관적인 차원에 머물지만 어떤 믿음은 물리적인 결과를 낳아요. 그래서 단산한 여자가 아기를 낳아서, 쉬운 말로 하면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더 큰 차원으로 하나님이 세계역사에 개입하실 때 믿음으로 환란으로부터, 심판으로부터 자기를 건지는 것, 그것도 똑같은 믿음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세 가지 사례 이외에도 히브리서 11장에는 여러 믿음의 사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다 똑같은 믿음으로 아울렀다는 사실입니다. 위층과 아래층, 개인적인 경험과 역사적인 사건, 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과 물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 이 모든 것을 한 믿음의 결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믿으면 골방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있고 골방 밖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영이시지만 우리가 영성으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다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니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고 영적인 지각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올바른 지혜를 가지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미국의 펫 로벗슨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이러한 사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이, 삼십년 전에 큰 허리케인이 미국 동부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기도했더니 허리케인이 방향을 바꾸어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why not? 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 말씀에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리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허리케인이라고…. 믿음의 사람이 허리케인의 방향을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일제 통치 36년에 신음하다가 1945년에 원자폭탄 두 발이 일본에 떨어짐으로써 해방하게 된 것, 이것이 우연한 일입니까. 이것이 사람에 의한 것입니까. 의지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될 때 불신자의 관념에서는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겠지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어요. 모세가 말하고자 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종 되었던 애굽에서 너희를 건지셨느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에요. 이건 정치 ․ 경제, 여러 가지 표면적인 이유는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1950년 대한민국이 북한의 침략을 받아서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했을 때 UN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에 UN군을 파견할 것이냐를 토의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소련 대표가 UN회의장에 오려다가 자동차가 고장 나서 시간에 맞춰서 오지 못했어요. 만약 제시간에 왔더라면 거부권을 행사해서 UN군을 파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소련 대표가 참석 못하는 바람에 UN군 파병을 결의했어요. 그래서 UN군이 한국에 와서 도와주었어요. 이게 우연한 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도와주신 것입니까. 

625전쟁 후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빈민국이 돼서 남의 나라의 구호물자나 얻어먹는 신세가 됐지만 오십년 만에 세계 경제 10위권 안에 들어가고 이제는 남의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게 우연한 일입니까. 우리 민족이 우수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 것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이냐 불신이냐의 문제인 것이지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방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고 기도원에만 올라가야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직장에서 또 나라의 운명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한 가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여러 종류가 있는 게 아니에요. 다 똑같은 믿음인데 그 믿음이 개인의 인생의 목적을 주장할 수도 있고,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정의 아픔과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그리고 나라와 백성의 운명,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온 세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믿음이에요. 

6절 말씀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상을 먼저 받으면 믿겠다고 말하면 안돼요. 믿으면 믿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기적을 보면 믿겠다고 말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믿으면 기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내가 이해함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었더니 이해가 되더라고 했습니다. 믿었더니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봐서 믿는 게 아니고 믿으면 기적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을 받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허비되지 않습니다. 공연히 믿었다, 괜히 믿었다, 얻은 것 없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당장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눈에 안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결국은 그 상을 보게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제일 빨리 발전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 ․ 브라질 이런 국가이지요. 그런데 우연하게도 기독교 신앙이 제일 활발하게 전파되는 나라도 중국과 브라질이에요. 그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복음이 빠르게 증거되는 것과 그 나라에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이 상주시는 것과 결코 그것이 비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공연히 믿었다, 공연히 봉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여러분이 꼭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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