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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뒤를 돌아보지 말라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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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지 말라 (눅 9:57-62)

저는 어릴 때 부친께서 농사를 지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제 주변에 목사님들 중에도 그렇고 여러 사람들이 은퇴하면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짓겠다 합니다. 그러면 제가 웃습니다. 농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릅니다. 

지금은 다 기계로 하지만 옛날에는 밭을 갈거나 논을 갈 때 소가 큰 일군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에게는 사람 대접을 하고 가족처럼 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죽을 끓인다는 말이 뭔 말인 줄 아시나요? 

옛날에는 소들에게 죽을 끓여 주었습니다. 여물을 큰 솥에다 넣고 물을 부어 끓이는데 소가 먹기 좋도록 삶아서 주었습니다. 

특별히 암소 중에 구별해서 쟁기를 메는 소로 훈련시켜 길렀는데 이 일소는 봄이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봄 내내 논과 밭을 갈아엎고 종자를 뿌릴 때 큰 일꾼 노릇을 했습니다. 그때는 소 외양간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합니다. 소도 힘이 들면 여물을 먹지 못합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께서 소에게 막걸리를 한통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소도 사람을 알아봅니다. 특히 주인 가족을 잘 알아봅니다. 

주인 아들이 때리면 덤벼들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집에서 맡은 일이 소에게 풀을 떼기는 것입니다. 떼낀다는 말이 뭐냐면 소를 끌고 들에 나가서 풀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가 말을 안 들면 채찍으로 때립니다. 그래도 소는 어린 저를 해치지 않습니다. 한 방이면 날아갈 텐데 아무리 때리고 코에 매여 있는 끈을 잡아채도 덤벼들지 않습니다. 왜냐? 제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참 재미있던 것은 소가 쟁기를 메고 밭을 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소에 쟁기를 메고 “이랴” 하면 갑니다. “워”하면 섭니다. “무러무러” 하면 후진합니다. 그 큰 소가 쟁기를 잡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지금 우리를 들어 쓰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맡겨 주셔서 쟁기를 잡은 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일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백성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주관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나온 과거 때문에 힘들어 하실 필요도 없고 다가올 미래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보세요.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얼마후에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나서 6일후에 변화산에서 홀연히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그리고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우도 굴이있고 공중에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에게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부모를 핑계 삼아 거절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가족을 작별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쟁기를 잡은 농부’라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은 자는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 말씀에 어떤 진리가 숨어 있는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꾼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주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라 하십니다. 

눅9:57∼58절을 보세요.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이렇게 질문한 사람은 ‘서기관’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서기관은 율법 학자입니다. 그들은 대게 높은 학식과 부유한 재산과 권력을 모두 가진 최고 상류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족할 것이 없는 서기관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만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광을 누리고 싶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는 요청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그때 주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길에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수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으면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도 당합니다. 때로는 편히 쉴 곳도 없게 됩니다. 때로는 핍박을 받아 감옥에도 갑니다. 주님도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일이 없으나 이웃 나라 중국은 예수믿는 사람은 공식적으로 공무원이 될 수 없습니다. 저 북한은 성경책을 갖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 갑니다. 그래도 주님을 따를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과 헌신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예수 믿으면 부귀도 찾아오고 예수 믿으면 명예도 주어지고 예수 믿으면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사명자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30살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40년간 광야서 연단 받습니다. 요셉도 13년간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이들 모두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대로 다 응답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절망에 처하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 혼자 고난을 당한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제자가 되겠다고 온 사람이라면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기꺼이 자신을 따를 것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하셨습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그래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려면 여러분이 정말 주님의 일꾼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욕심도 버리고 재물도 버려야 합니다. 부귀영화 명예권세 다 포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주 냉정하게 말씀 하십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을 보세요.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위해 버릴 수 있냐고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버릴 수 있어야 하나요? 집, 부모, 형제, 재산....

이 말씀은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에 미련 갖지 말고 주를 위해서라면 과감히 포기하고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국의 신앙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하늘에서 /면류관을 쓴 자 중에 /이 땅에서 /가시관을 쓰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다/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주를 위해 가시관을 쓴 사람은 하늘에서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죽을 고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생과 고난이 끝나고 나면 영광과 승리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사람들은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 생각합니다. 그러면 얼마를 갖고 있어야 할까요? 영국의 어느 대학에서 10년 동안 조사 연구해서 발표했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돈으로 약 18억 정도는 가져야 행복을 느낀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는 서울 어느 동네는 아파트 한 채가 60억이 된다하는데 18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살까요? 아닙니다. 수백억을 가지고 산다 해도 행복치 못한 사람 많고 단1000만원만 갖고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참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주는 행복에 속지 마셔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본 간증입니다. 청주에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건축자재 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자꾸 어려워졌습니다. 공장 마당이 500평이 넘는데 마당에 재고가 잔뜩 쌓이도록 물건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빚이 점점 늘어나자 회사뿐만 아니라, 집안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교회도 못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 집사가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돕기로 하고 작정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40일을 작정하고 아침을 금식하며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면 교회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노라 서원기도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구역예배 등 모든 예배에 다 참석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에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도만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회사를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미 재고가 많이 있는데도 남편에게 걱정 말고 계속해서 물건을 만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40일 작정 기도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팔리지 않던 건축자재가 어느 날 갑자기 여기저기서 주문 전화가 빗발치듯 쏟아졌습니다. 정부가 건축경기 부양책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결국 만들어 놓은 것 다 팔리고 물건을 밤샘 작업을 해도 주문을 댈 수 없을 만큼 회사가 돌아가게 되었답니다. 기적 같은 축복을 받고, 집사님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교회에서 간증을 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걱정만 하고 계시겠습니까?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에 떨기만 하시겠습니까? 인생을 포기하고 낙심하겠습니까? 

주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일이 뭔가를 생각하세요.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예상치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문제는 결단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흔들리지 말고 주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선한 목자이시기에 응답하시고 해결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꾼이라면 


2. 우선순위를 바로 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9:59∼60절을 보세요.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합니다. 

이 사람의 부친은 현재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면 이 사람이 여기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것은 아니라 오늘 낼 죽음을 앞둔 나이드신 부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을 따르면 부모 장례를 누가 치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죽은자는 누굽니까? 앞에 죽은 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뒤에 죽은 자는 시신입니다. 그들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나라에서도 부모의 장례식에 참여를 못하면 엄청난 불효로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결론은 뭡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장례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그래서 초상이 나면 가야합니다. 아무리 회사가 중요해도 부모가 돌아가셨다 하면 다 휴가를 줍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십니다.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성도 여러분!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이 우선순위 문제가 바로 세워지지 않아서입니다. 

이것만 세워지면 신앙생활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머리로 아는 우선순위가 실생활의 우선순위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갈등하고 고민하고 번민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해야 하느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여기에서 우리의 가치관을 보게 됩니다. 세상일이냐? 하나님의 일이냐? 가정이 먼저냐? 교회가 먼저냐?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단칼에 결론을 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선택하는 자는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러기 전에 베드로는 엄청난 칭찬을 받았습니다.그가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그러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며 주님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칭찬하던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왜죠? 말 한마디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리하지 마옵소서’하고 막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우선순위는 어떻습니까? 먼저 해야 할 것은 먼저 하고 나중에 해야 할 것은 나중에 해야 하는데, 순서를 바꿔서 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먼저 드려야 합니다. 먼저 일주일에 하루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의 사람은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부친의 장례를 치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거리입니다. 주님은 먼저 하나님의 일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형편과 처지는 나보다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따르라 하시면 따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내 형편, 내 능력, 더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직분을 맡기시고 일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맡기시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꾼이라면 


3. 오로지 주님 나라만 바라보라 하십니다.

누가복음9:61∼62절을 보세요.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고 쟁기를 잡았으면 이 생각 저 생각 딴 생각하다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과거에 미련을 둔다는 것이고 세상에 미련을 둔다는 것입니다. 가족 작별, 중요합니다. 가족을 책임지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것 저런 것 다 걱정하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달아보는 꼴이란 말입니다.   

창세기 19장에 소금 기둥이 된 여인이 있습니다. 롯의 아내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사자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돔 성을 빠져 나오면서 그 땅에 쌓아놓은 재물과 재산이 날아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뒤돌아봅니다. 그 순간 소금 기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혹시 말은 예수님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뒤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천의 어느 교회에 석 권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교회를 나와도 설교도 잘 안 듣고 오래 교회를 다녀서 권사라는 직분은 어떻게 받았는데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식욕도 없어지고 뭘 먹으면 소화도 안됐습니다. 온몸도 아프고 몸은 점점 말라 뼈만 앙상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도 병명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신경성 같은데 병명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권사님은 겁이 나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제발 좀 도와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그러자 목사님이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답니다. “하나님 우리 권사님이 사명이 있는데 이 사명을 소중히 여기고 직분을 감당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 주셨답니다. 

결국 그 권사님은 목사님께 기도 받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교회에 나와 전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6개월 만에 20명을 전도했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일을 하자 식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살이 붙었습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사명을 앞에서 일하니 주님이 치료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양식이 사명입니다. 사명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사명이 양식입니다. 그 사명이 보약입니다. 사명을 잃어버리면 양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명을 잃으면 이 땅에서 살아야 할 능력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붙잡으면 살게 됩니다. 사명을 생명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뭡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교회에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집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 부름 받았습니까? 더욱 더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쟁기를 잡은 일꾼입니다. 일단 쟁기를 잡았으면 끝장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핑계 대고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합당치 않다는 것은 하나님이 쓰시지도 않고 축복하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쟁기를 잡은 자입니까? 그렇다면 뒤돌아보지 마시고 오직 우리를 부르신 주님만 바라보시고 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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