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야긴과 보아스 3 : 십자가와 부활 (히 12:1-3)

첨부 1


야긴과 보아스 3 : 십자가와 부활 (히 12:1-3) 
 
  
❚뛰어야 할 이유

권투선수 중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수 하나만 뽑아보라면 ‘핵주먹’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전(前) 세계 헤비급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을 들 수 있습니다. 타이슨은 최초로 WBC, WBA, IBF 3대 세계 챔피언을 동시에 거머쥔 선수이며. 통산 50승 6패, 44KO를 기록한 전설적인 파이터였습니다. 20세로 당시 최연소 WBC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타이슨은 1987년 WBA와 IBF 타이틀을 따내며 강한 펀치력을 무기로 무적의 선수로 군림했습니다. 어린 시절 너무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순전히 배가 고파서, 먹고 살기 위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복싱을 시작했고 어린 나이에 세계 3대 챔피언 자리를 거머쥐면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1990년 제임스 더글러스에게 충격의 KO패를 당하더니 한 흑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3년간 수감되며 전성기를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1996년 출감 후 재기에 나섰지만 과거의 폭발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에반더 홀리필드와의 경기 중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엽기행각을 벌여 ‘핵이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습니다. 결국 2004년 타이슨은 은퇴를 선언했는데 마지막 경기 후 인터뷰에서 “나는 지쳤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 가슴속에서 투지가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선수생활로 벌어들인 돈은 2300억 원인데 낭비벽으로 다 날리고 파산을 선언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철저하게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실력이 모자라서도 아니요 펀치력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바로 “싸워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돈과 명예를 위해 싸웠는데 한 순간 돈과 명예를 다 거머쥐고 나니 더 이상 싸워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방탕과 범죄에 빠져 무너진 것입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이 된 임춘애 선수는 “우유 먹으면서 뛰는 애들이 너무 부러웠다”고 해서 당시 우유회사들이 앞 다투어 우유와 포상금을 전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우유를 먹고 싶어 뛴 사람은 우유를 먹고 나면 더 이상 뛸 이유가 사라집니다. 돈이 필요해 뛴 선수는 돈을 벌고 나면 더 이상 뛸 이유가 없어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기서 ‘경주’란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달리기 선수나 권투 선수가 운동에 전념하려면 모든 방해거리를 이겨내야 합니다. 돈 생각하고 여자 생각하면 그때부터 끝입니다. 경기를 하려면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하고 체중감량을 위해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과 어려움도 다 꾹 참고 이기는 까닭은 오직 경기에 승리했을 때 받을 상급, 면류관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소망, 이 상급과 면류관에 대한 꿈이 사라진다면 그는 더 이상 뛸 이유도, 싸울 이유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끝이지요. 무너지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지난 두 주 동안 우리는 성전을 받치는 두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처럼 오늘날 교회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교회를 받치는 또 다른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여러 중요한 신앙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개를 꼽으라 하면 주저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그만큼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기둥인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개의 기둥이 교회를 받치고 있으면 둘 다 튼튼해야지 둘 중 하나라도 약하면 안 됩니다.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다 튼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야긴이든 보아스든 한쪽이 약하다면 교회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지탱하는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이 둘 다 건강하고 튼튼해야 합니다. 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기 때문이고, 반대로 부활 없는 십자가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신앙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다 지시고 대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는 대속(代贖)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져주셨다는 뜻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인이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죄가 십자가 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사해질 수 없기에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것입니다.

또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물과 피를 남김없이 쏟고 고통스럽게 죽으신 그분이 무덤에 들어가신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 이기고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말입니다.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부활 없는 십자가는 어떻게 될까요? 반대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어떻게 될까요?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무기력한 죽음에 불과합니다. 죽고 끝나면 뭡니까? 우리 인간의 문제가 그거 아닙니까? 죽으면 끝난다는 것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대학생을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류대학 학생에다가 너무도 자신만만한 그 학생은 복음을 받아들일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자네 대학 졸업하면 뭐 할 건가?” “예,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지요.” “그러면 좋은 직장에 취직한 다음에는 뭐 할 건가?” “예, 예쁜 여자 만나서 결혼 해야지요.” “그럼 예쁜 여자와 만나 결혼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뭘 할 건가?” “그야, 아이 낳고 잘 살아야지요. 

진급도 해야 하고 집도 사야 하고요.” “그럼 그 다음엔 뭐 할 건가?” “돈을 많이 모으고 연금도 타서 노후에 편안하게 살아야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뭘 할 건가?” 이렇게 자꾸 질문이 계속되자 학생은 은근히 짜증이 났습니다. “이 양반 뭐야, 이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이요? 그 다음이라... 죽는 거지요, 뭐.” 예, 죽는 겁니다. 그렇게 바라고 꿈꾸던 일을 다 이루고 남들 보란 듯이 버젓하게 출세하고 잘 살고 나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죽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끝이지요. 끝입니다. 죽음 다음에 뭐가 있겠습니까? 죽으면 내가 모은 돈과 집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출세하고 성공한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장례 때 보면 고인이 입는 수의가 있습니다. 보통 수의는 베로 만드는데 그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싼 옷감을 쓰기도 합니다. 헌데 비싼 수의든, 싼 수의든 상관없이 모든 수의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주머니가 없어요. 여러분, 수의에 주머니 달린 것 본 적 있습니까? 없어요. 만약 있다면 그건 잘못 만든 수의입니다. 모든 수의는 주머니가 없다. 왜 없을까요? 우리 조상들이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이렇게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는 사실은 알았던 것이지요. 

죽으면 돈 한 푼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수의에 무슨 주머니가 필요합니까? 지금 서울에서 이집트 투탄카멘 왕의 유물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투탄카멘은 왕위에 올랐지만 10대에 요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에 그 유명한 황금 마스크를 비롯해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함께 묻혔다가 발굴된 것입니다. 왜 그 수많은 황금과 부장품을 무덤에 함께 넣었을까요? 저승 갈 때 가져가라고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가져가긴 어딜 가져갑니까? 죽은 사람은 한 푼도 못 가져갑니다. 다 도굴꾼들이 파서 훔쳐가거나 요행히 도굴을 면하면 저렇게 박물관에 전시되어 구경거리가 됩니다. 그래도 이집트 사람들보다는 우리 조상들이 더 똑똑했던 모양입니다. 죽은 사람은 한 푼도 못 가져감을 알고 수의에 주머니를 안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도 그 이상은 몰랐습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죽음을 이길 방법이 있다는 것은 몰랐던 것이지요.

그 방법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시지요? 예수 믿어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 다시 사신 주님을 믿으면 우리도 다시 살고 영원한 생명,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1:25~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래서 십자가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이 있었기에 그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고 십자가만 있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과 똑같은 그냥 죽음일 뿐입니다. 그냥 죽고 끝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죽음 후 부활이 있었기에 죽음 권세 이기고 승리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이번에는 거꾸로 십자가 없는 부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는 고난의 신앙입니다. 부활은 영광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부활이란 고난 없는 영광만 바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싫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지는 것은 싫고 그냥 부활의 영광만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이런 신앙을 가진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만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기복(祈福), 즉 복만 빈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면 복 받는다.” 여러분,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맞는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복만 바라다보니 어떤 일이 생깁니까?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면 복만 받아야 하는데, 돈도 잘 벌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자녀도 잘 되어야 하는데 왜 교회 다녀도 돈 잘 못 버냐?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냐? 그러니 난 예수 안 믿는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이런 기복신앙은 큰 바위 앞에서 정한수(=정화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조상님께 비나이다.”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큰 돌부처 앞에서 복을 비는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복신앙에는 십자가 따위는 없습니다. 고난? 없습니다. 오직 복뿐입니다. 신령님이 내게 복을 주어야 하고, 부처님이 복만 줘야 합니다. 안 주면 다른 데 가서 빕니다. 너도 십자가를 지라는 둥,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둥 말하면 교회 떠나고 예수님 떠납니다. 똑같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꺼이 십자가 지고 고난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고, 그래야 자녀로서의 복과 특권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이런 신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값싼 은혜.’ 은혜 좋지요. 신앙생활 하며 은혜 받아야지요. 그런데 십자가 없이 부활만 바라고, 고난 없이 영광만 바라고, 아무 대가 없이 은혜만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싸구려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후 비로소 부활의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그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릴 수 있지, “난 고난은 싫어, 예수 믿어서 조금도 손해 보기 싫어, 난 이익과 복만 받을 거야.” 한다면 그건 값싼 은혜에 불과하다는 의미 있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기독교에 이 ‘값싼 은혜’가 남발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을 받는답니다. 교회 다니면 무조건 잘 된답니다. 이런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목회자와 교회가 있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망하고 실패하는 일은 왜 생깁니까? 예수 잘 믿는 성도도 때로는 아프고 고난당하는데, 때론 자녀가 대학입시에 실패하는데, 그러면 그런 복도 못 주는 교회는 떠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때로는 고난도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들어 줍니다.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의 율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뼈저리게 배우게 되고 겸손히 그 앞에 엎드려 순종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부러 고난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뒤 히브리서 12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잘못을 해도 징계가 없다면 친부모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징계나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도 은혜지요. 그런데 그런 고난을 기꺼이 견뎌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견뎌내면 부활이 기다리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십자가 없는 부활, 잘못된 기복신앙, ‘값싼 은혜’를 바라지 마시고 기꺼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십시오. 고난도 기꺼이 이겨내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찬란한 영광,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광이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예수를 바라보자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1-3)

히브리서는 11장, ‘믿음장’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절)라고 말씀하신 후 아담의 아들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으로 모든 고난과 핍박과 실패를 이겨낸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과 우리의 선배들을 소개합니다. 그러고 나서 12장에 들어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1절) 우리에게 이렇게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이 있어 믿음이 왜 중요한지, 고난과 실패를 이길 힘은 오직 믿음에 있음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달리기 선수가 달리기를 할 때 모든 힘든 일을 참아내고 오직 앞만 바라보며 인내로 달려가는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이기고 잘 참아내서 모든 고난과 실패를 이겨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대표적인 모범이 누구인지 소개합니다. 누구입니까?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왜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인가?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온갖 고난과 수치와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이겨내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 바로 부활의 영광입니다. 고난과 죽음 저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3절)고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신 것입니다. 또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기에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다 이겨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의 관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이 다 튼튼하게 떠받쳐야 하듯이, 어느 한쪽도 기울면 안 되는 것처럼 이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은 언제나 함께 어우러져 우리의 신앙을 튼튼히 받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도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 이 귀한 두 신앙으로 튼튼히 무장하기 바랍니다. “주님 위해 고난도 기꺼이 당하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꺼이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 오르겠습니다. 내 인생에 닥쳐온 고난과 실패도 넉넉히 이겨내겠습니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저 고난 너머로 하나님 주시는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고난의 때를 겪는 분이 있습니까? 시련이 닥쳐왔습니까?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우리 예수만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실패가 끝이 아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내가 십자가 지고 난 후 부활의 영광을 받은 것처럼 너희에게도 부활과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