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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인 내 이름은 무엇인가?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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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내 이름은 무엇인가? (행 11:19-26)


내 용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마련인데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고 내 의사와 관계없이 거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다른 사람이 지어준 것을 내가 평생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기 이름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만족해하지를 않습니다. 사춘기 때는 이름 때문에 고민하는 시기도 우리들이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의 이름을 짓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호’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거의 호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지은 것이라 아주 만족해합니다. 

늘 푸른 소나무라고 해서 ‘청송’이라고 짓기도 하고, 항상 봄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늘봄’도 있고, 넓은 바다라는 뜻으로 ‘광해’도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호는 ‘우남’이고 김영삼 대통령은 ‘거산’입니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해공’이고 최현배 선생은 ‘외솔’이고 한경직 목사님은 ‘추양’이라고 각자 자신이 자신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이름을 짓지 않지만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섭섭하다고 ‘섭’이라는 이름이 참 많았습니다. 딸 둘을 낳으면 ‘섭섭이’입니다. 셋을 낳으면 ‘삼섭이’이고 넷을 낳으니까 또 낳았다고 ‘또섭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제는 제발 그만 낳아라. 단절이다.” 그래서 ‘단섭이’이가 있고, 여섯째딸을 낳으니까 “흉악한 일이로다.” ‘흉섭이’가 있고 일곱째 딸을 낳으니까 “망했다”해서 ‘망섭이’가 있습니다. 남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작명소’라고 해서 있지 않았습니까? 자기 이름에 만족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저는 이름 때문에 아주 손해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서재필 박사 이름이 아주 유명해서 누구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를 자꾸 이재필 목사라고 불러서 교회 부흥회를 하러 갔었는데 그 교회 주보를 보니까 “이재필 목사님이 오늘 저녁부터 부흥회를 하십니다.” 이렇게 광고에 나온 것입니다. 그럴 때가 아주 많습니다. 부모님께서 지어준 내 이름이나 내가 지은 내 이름, 호 외에 나를 평가하는 이름 하나가 누구든지 또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모도 나도 아닌, 제3자들이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별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별명이 가장 가까운 나의 진실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객관성 있게 나를 평가하는 것이니까 여러분도 별명 들은 적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덕망스러운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공자’같다고 합니다. “저 사람은 별명이 공자야.” 착한 성품을 보고 다른 사람이 지어주는 별명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야.” 그렇게 말을 합니다. 잔꾀를 잘 부리는 사람을 보고 “어휴! 저런 간신 같으니라고!” 이런 별명을 지어줍니다. 사람을 보고 ‘여우’라고 하기도 하고 ‘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을 평가하는 별명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안디옥인데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서 많은 신자들이 남의 나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일시에 남의 나라에서 대거 이민자들이 몰려와서 수리아의 수도인 안디옥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거기서 살았더니 안디옥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보고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야? 어디서 온 거야?”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비로소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별명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 크리스천! 기독교인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4명 중 한 사람인 ‘세리쿠스니가더’라는 사람이 BC 301년에 이 안디옥에 와서 건설한 수리아의 왕국으로 예루살렘에서 175km 떨어진 곳인데 유대나라 역사학자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세계 제1의 도시는 인구 400만으로 로마였고 제2의 도시가 알렉산드리아로 인구 100만, 세 번째가 안디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세계에서 그 당시에 세 번째의 규모의 도시입니다. 남쪽으로는 예루살렘과 애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아시아 대륙이 연결됩니다. 

서쪽으로 해안인데 배로 로마와 연결이 되어서 상업이 발달하고 무역 중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시에 무역상들이 그리로 많이 모여들어서 경기가 활성화 되다 보니까 안디옥이 타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광대, 요술쟁이, 사기꾼, 마법사, 엉터리 약장수, 돌팔이 의사, 오락과 춤과 축제와 유흥가…. 아주 요란한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도시에 지금 별안간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몰려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안디옥으로 몰려간 성도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누가 가서 돌보고 목회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아주 존경받는 훌륭한 성품의 지도자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안디옥에 가서 목회를 잘하라.” 그래서 이 바나바가 와서 보니까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헬라 문화권에 있는 길리기아 다소의 바울을 찾아가서 “우리 안디옥에 같이 가서 나와 동역 목회를 하자.” 그래서 이 두 사람이 목사가 되어서 안디옥 교회를 인도했더니 얼마나 교회가 부흥하고 잘되는지 아주 훌륭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낯선 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안디옥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야? 어디서 왔어? 그런데 뭐하는 거야?” 그 사는 모습을 보니까 자기들과 색깔이 전혀 다릅니다. 이런 도시에 왔으면 이런 문화에 적응해서 같이 살아야 되는데 이 사람들은 재미있는 일에도 관심 없고 나쁜 일에는 가담하지도 않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뭔가 모르게 행복해하고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송 드리고 그리고 자기들이 불쌍한 사람들인데 불쌍한 사람 돌보는 일에 충실하고 돈도 못 버는데 서로 도와주며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참 이상하다.’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보니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명을 지어준 것이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단어를 언어적으로 풀이를 하면 히브리어로 ‘메시야’인데 이 말이 헬라어로 ‘크라이스트’입니다. ‘~천’이라고 하는 발음은 ‘티아노스’라고 하는 라틴어에서 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종교적인 내용과 헬라문화의 어휘와 라틴어의 법률 어휘 어미로 된 3대 세계어의 합성 명사로 ‘Christian’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야.” 그런데 이 별명은 당시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멸시적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니, 저 놈들은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 거야? 세상 살 줄도 모르는 저 시골뜨기들! 어휴! 저런 바보 같은 집단! 이런 세계적 도시에 왔으면 이 도시 문화에 맞게 어울려서 살아야 되는데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날마다 예배는 왜 저렇게 많이 드리고 돈도 쓸 줄 모르고…. 야! 크리스천! 이 바보 집단!” 멸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는 존경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을 보라. 저 사람들 사는 것을 보니까 우리는 괜히 부끄럽다. 숭고하고 거룩하며 정의롭고 경건하다. 아! 당신들은 크리스천이야.” 두 가지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세계선교의 시작을 예루살렘을 안 쓰셨습니다. 안디옥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목회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후원을 얻으면서 세계를 향해서 선교의 문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교사로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12사도를 쓰지 않으시고 바울과 바나바를 쓰셔서 세계 선교를 이루셨습니다. 이 안디옥이 세계 선교지로 택함을 받은 이유는 첫째 로마 제국의 제 3의 도시라는 문명적 이름의 유리함을 가졌고, 그 다음에 사방으로 연결되는 무역 통로였기 때문에 세계로의 확산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있습니다. 국제 도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미 헬라인, 유대인, 로마인 모두다 여기 와서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세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유대교의 핍박을 벗어난 지역으로서 선교활동이 자유로웠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의 12사도들은 유대니즘에 사로잡혔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이것을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생각 자체가 벌써 세계화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쪽을 쓰셔서 세계 선교를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며 예수 믿고 살았습니다. 

이 안디옥에서도 핍박 때문에 거기를 갔지 않습니까? 그러니 핍박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어디든지 따라가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은 안디옥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봤을 때 “당신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야?” 물었을 때 “아니요. 아닙니다.” 자기들의 신분을 감추면 살 수가 있는데 “맞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대답했습니다. “아니? 저런 바보 집단 아니야?” “왜 바보들 같이 신분을 노출하고 위험을 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 사람들 이상하다. 그렇게 말하면 죽을 지도 모르는데 자기의 신분 노출하며 정직하게 말하니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사는 거지?” 이런 이상한 집단으로 보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이 거기서 생겨나게 된 동기입니다. 교회 역사에 ‘폴리갑’이라는 지도자는 교회사에서 아주 큰 인물입니다. 순교 당했습니다. 불태워 죽였습니다. 그를 불태워 죽이던 군인이 그를 향해서 남긴 말이 교회사에 나옵니다. “그는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지어주는 별명, 그것이 크리스천입니다. 

그 다음에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러주었는가? 바로 로마 때부터입니다. 누가 불렀는가? 로마 사람들이 지은 것입니다. 로마가 얼마나 기독교 박해 국가였는가는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역사가 원형 극장입니다. 로마의 관광 명소 1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잡아다가 운동장에다 축구 경기하는 것처럼 사람들 가득 채워놓고 벌거벗겨놓고 사자가 잡아먹는 것을 구경하는 잔인한 일을 하는 장소입니다. 지금도 원형극장은 헐어진 채로 그냥 놔두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도 저런 바보 같은 사람들은 “네가 크리스천이냐?” “아니요. 나 예수 안 믿어요.” 그렇게 대답하면 살 텐데 “맞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너 그 말하면 죽어야 돼.” “OK.” 그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바보들입니까? 로마는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로마가 왜 멸망했는가? 첫째 이유가 타락성 때문에 멸망했다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시에서 기독교인들은 아주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로마 시대에는 자녀가 장애인일 경우는 무조건 갖다 버렸습니다. 그 버려진 아이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갖다 길렀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위해서 색출작업을 할 때 가서 보니까 자기들이 버린 아이들을 그들이 다 키워주고 있는 것을 감동을 받아서 군인들 사회에서 반대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을 왜 우리들이 가서 핍박하라고 하느냐? 우리는 못하겠다.” 군대 사회에서 반항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점점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정부도 나중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성도들을 보고 마음이 변한 거야. 그 사람들은 성도야. 왜 그 사람들을 우리가 핍박해야 돼?” 로마 황제 10대를 내려가면서 계속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했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이것이 확산되고 또 확산되니까 AD 313년에 할 수 없이 콘스탄틴 대제 때 절대 전환이 이루어져서 그때부터 로마의 국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이 지금 로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절대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했는가? “그 사람들은 성도들이야. 거룩한 무리야.” 별명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들을 보고 지어준 별명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검소하고 순결하게 살며 봉사적이고 헌신적으로 살고 진실하며 정의롭게 살고 있다. 정말 이 타락한 로마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 거룩한 무리! 성도들이다.”

저는 한 20년 전부터 부흥회 요청을 받으면 마지막 설교는 똑같이 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교회가 바랄 수 있는 빛이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그것은 지금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을 전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요소를 캐내면 이유가 나옵니다. 제가 온 세상을 다 다니고 온 세상에 한인들 모여 사는데 그렇게 많이 세미나와 집회를 했는데 우리 한국 교회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절대 사회의 빛이 안 됩니다. 그게 뭐냐? 싸우고 분열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한국에 있는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요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회가 교회를 향해서 가장 부정적으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들은 사랑과 거룩을 부르짖으면서 날마다 왜 교회가 싸우느냐?” 지금 우리 한국의 국회는 민주주의를 안 합니다. 싸우고 몸싸움으로 보통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로 가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국회를 비판하고 원망해야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빛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진 교회 모습이 싸움과 분쟁으로 계속 가니까 “너희들은 뭐하는 거야? 너희들이 성도들이야?”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 싸움은 진리와 비진리가 아닙니다. 감정싸움 표현에 자리다툼, 마지막에 교회 건물 싸움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교회가 해결하기 전에는 빛이 안 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마지막 설교는 언제나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당신들 이 문제 어떻게 할 겁니까? 이 문제 해결하기 전에는 우리가 절대 빛이 못된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그렇게 많이 성경공부 했지만 세상이 보는 시각은 너희들 싸움쟁이 아니냐? 이렇게 보인다.” 

88올림픽 때 여기서는 잘 모르셨을 겁니다. 미국 방송에 나왔습니다. 한국에 외국인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사람이 미국인들입니다. 올림픽을 하면 자연히 자국의 승리를 위해서 응원할 거 아닙니까? 여기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삽니까? 그러니까 운동장에 가서 USA를 하도 열심히 외치니까 당연한 것인데도 한국 사람들은 감정이 생겼습니다. “저것들 뭐야?” 그래서 올림픽 기간 중에 일종의 반미 감정이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주한 미 대사가 본국의 명령을 받아서 TV에 나와서 말했습니다. “미국인이 미국인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지금 올림픽을 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의 감정을 상할 만큼 하지 말라.”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 미국인들이 바뀌었습니다. 한손에는 성조기, 한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응원했습니다. 감정 상하지 말라고 그런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대사가 나와서 미국 TV 방송에서 다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한국 남성들을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화를 낸다.” 미국인들은 부인에게 따귀 맞고도 절대 맞때리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남자들은 한번 맞았다 하면 천지개벽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이 자존심이 교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그렇게 많이 설교를 듣고 그렇게 많은 성경공부를 했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수치와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고통 이런 것들은 하나도 반영이 안 되고 자존심 좀 상하면 투쟁적 투사로 변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말입니다. 요즘에 우리 한국의 저축 은행들이 영업 정지 당하는 바람에 피해자가 많이 생기는데 미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행은 육신 생활의 기초이며 교회는 영적 생활의 기초라서 은행과 교회는 이 사회가 바라보는 마지막 등불인데 이것이 무너지면 세상은 대 혼란이다.” 맞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시행착오적 과오를 많이 범한 죄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불러줄 때 “당신들은 성도야.” 별명을 그렇게 불러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이야.” 이렇게 불러주어야 합니다. 

마지막 이름이 또 하나 주어집니다. 바로 ‘제자’라는 이름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라고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제자는 참 어렵습니다. 제자는 스승된 자의 그림자 역할입니다. 망나니가 있을 때 선생님이 거론되지 않습니까? “너 누구 제자야? 네 아버지 누구야?” 윗사람까지 욕을 먹게 되는 겁니다. 지금의 학교 문화는 스승과 제자 문화는 없어졌습니다. 지식 전달만 하면 그만입니다. 미술 선생은 미술 잘 그리게 하면 그만이고 음악 선생은 음악 이론만 잘 가르치면 그 이상 아무 책임 없습니다. 옛날의 스승과 제자는 인격, 성품, 철학 다 따라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말이 뭐냐? 예수를 닮아가자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과 똑같을 수는 없어도 그림자는 되어야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개념의 신앙 교육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있습니다.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런데 2절로 가면 더 깊어집니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3절로 가면 더 깊은 차원으로 갑니다.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4절은 뭐라고 합니까?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반주도 없이 내가 이렇게 잘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제자는 스승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처음에는 예수님께 실망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예수님의 평소 교육대로 그들이 다 거룩해져서 “땅 끝까지 가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전해라.” 왜 베드로 성당이 이스라엘에 있어야지 로마에 있습니까? 베드로가 땅 끝까지 가느라고 로마까지 걸어갔습니다. 왜 도마 기념 교회가 베데스다에 있어야지 인도에 있습니까? 인도까지 배 타고 갔습니다. 밧모 섬은 그리스 땅인데 왜 요한의 기념관이 거기에 있습니까? 요한이 거기에 귀향 갔잖아요? 모두 땅 끝까지 당대에 주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희들도 나같이 죽을 것이야.” “좋습니다.”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저는 사이판에 여러 번 갔습니다. 파송 선교사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갔었습니다. 거기 가서 엄청난 사건에 놀랐습니다. 사이판은 2차 대전의 마지막 격전지였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 일본의 항복이 생겨지게 됩니다. 그때 미군들에게 쫓겨 가는 일본 군인들이 마지막 지점에 갔을 때 뒤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수백 길 낭떠러지 바다입니다. 그 지점에서 일본군들은 두가지중 하나를 결정해야 했답니다. 

미군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히든가 떨어져서 자살하든가 이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요꼬이 대장의 연설로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겠느냐?” “자살할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미국에게 항복하는 것은 일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욕되게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이 다 같이 자살했습니다. 그 설명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6개월 동안 상어들이 그 주변으로 다 몰려와서 먹고 살았답니다. 지금 일본인들은 1년에 50만 명 정도가 그곳을 찾아갑니다. “님들은 우리는 살았노라. 떨어진 청춘의 꽃이여! 조국에 바쳐진 재물이여! 당신들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나한테 어떤 불이익한 상황이 닥쳐도 “네가 크리스천이냐?” “그렇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말할 수 있든가 “아니요. 나는 예수 안 믿어요.” 비겁하게 살아남든가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당신은 세상을 사는 가치관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고 어떤 것과도 돌이킬 수 없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진리대로 사는 이것이 나의 삶의 가치관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은 크리스천입니다. 당신들은 성도입니다. 내가 보니까 당신들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별명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이 세상에 비치는 빛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할렐루야! 
  
「 하나님 아버지! 안디옥에서 그 박해 중에서 안디옥 사람들로부터 크리스천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로마 시대 그 박해 중에서 성도라는 이름을 얻었고 주님을 위해서 나선 사람들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지은 이름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불러주는 별명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그 이름의 거룩성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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