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윗과 하나님의 법궤(다윗의 생애8) (삼하 6:6~15)

첨부 1


다윗과 하나님의 법궤(다윗의 생애8) (삼하 6:6~15)
 
하나님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지난 11월 7일자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에 실린 기사입니다. 말레이시아의 거대 기업 중의 하나인 YTL 그룹과 그 CEO인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업가 프랜시스 여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기업은 올해 상반기에만 58억불의 실적을 내면서 말레이시아의 유수한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여는 기독교 신앙을 자기 사업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운영하는 방콕과 싱가폴을 운행하는 고속철도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카지노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차여행을 하면서 카지노에 들어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철도여행이라고 하는 그 자체의 멋과 그 자체의 낭만을 즐겨야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는 신앙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러한 사행사업을 통해 큰 재물을 버는 것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돈과 재물은 가장 우선적인 것인데 그것보다 더 큰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용기요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업의 책임자로서 종업원에게 세 가지의 언어를 배워야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언어를 배워서 도덕성과 성실성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비전과 꿈을 명백히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는 기계의 언어, IT의 언어를 통해서 기술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을 배워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사인 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어, The Language Of God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영어 명사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Morality, 도덕적 윤리성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어를 배우면 도덕적인 윤리성이 확보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업을 하면서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가치관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값진 일인가? 어떤 일이 의미 있는 일인가? 어떤 일을 통해서 더 큰 가치가 창출되는 것인가? Morality는 그것을 묻게 됩니다. 다음 단어는 Integrity입니다. 이것은 성실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온전성, 일관성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바른 성품을 얘기 할 때 Integrity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언어를 배움으로서 자신을 바르게 성찰하고, 투명성과 도덕성과 온전성을 간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가 교회공동체 안에만 가두어져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신앙이 나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으로 확대되고 있습니까? 일관성과 도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때로는 직장인으로써, 때로는 가정주부로써, 때로는 기업가로써, 때로는 과학자로써, 때로는 문화예술인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어를 각 영역 속으로 확대하고 있는지 우리는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열정을 가지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자기의 삶에서 가장 우선권으로 삼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라는 인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과 다윗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시작은 비슷했습니다. 사울 왕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되면서 그의 생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첫 번째 우선권이 희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생각, 자기의 꿈과 야망이 그의 삶을 붙잡았을 때부터 사울 왕은 서서히 무너졌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떠했을까요?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도,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도,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헌신이 지속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시작이 좋았습니다. 멋졌습니다. 칭찬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지막은 파멸이었습니다.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끝까지 지속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다윗 궁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궤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방치되어있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이 법궤를 빨리 예루살렘성에 들이기 원했습니다. 법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자리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는 자리였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였습니다. 그 법궤 속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의 돌판이 있었고,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가 있었고,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가 방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법궤를 시온성에 안치하기 위하여 열심을 품고 일을 추진했습니다. 

법궤를 운송하던 웃사가 죽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열정이 있었던 생애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삼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여러 악기를 사용했습니다. 억지가 아니었습니다. 형식적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다급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망각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빨리 옮기기 위해서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황소가 끌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때 황소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고 법궤가 흔들렸습니다. 법궤가 땅에 떨어지려고 하자 그것을 호송하던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목도하면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축제가 장례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화까지 났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내가 얼마나 수고하고 헌신했는데,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사무엘하 6:8上) 

여러분,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 마음속에 있습니까? 사랑의 열정이 있습니까? 헌신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몰입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전심으로 합니까? 직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일하십니까? 열정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연애를 할 때도 열정을 가지고 해야 결혼에 골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정이 없는 것처럼 답답한 것이 없습니다. 다윗에게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헌신도 있었습니다. 골리앗 앞에 섰을 때는 아주 담대했고, 왕이 되어서는 열정을 가지고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열정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을 하지만 그 속에 나의 욕심과 이기적인 야망이 조금이라도 들어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열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다윗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잘못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화나게 했을까요? 두 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높여드린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으로 하려 했습니다. 마음만 급했습니다. 내가 왕이 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만큼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있으면 나와 보라고 뽐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이기적인 목적은 그리 많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멋진 모습입니다. 목표도 선하고 동기까지 선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삶을 다시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모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철야까지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감사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재물도 드립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다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었습니다. 짐승이 그것을 이끌고 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택받은 사람, 그것도 레위 사람이자 고핫 자손이 그것을 친히 옮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빨리 가기 위해서 수레 위에 법궤를 올리고 황소 한 마리가 끌고 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래 이것을 옮기기 위해서는 법궤에 휘장을 치고, 거기에 해달 가죽을 다시 씌운 후 네 귀퉁이에 고리를 달아 레위사람들이 막대기로 어깨에 메어 한 걸음씩 옮겨야 했습니다. 역대상 14장 14절과 15절 말씀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역대상 15:14~15) 

그러나 다윗은 법궤를 황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옮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빠른 운송방법이었습니다. 손쉬운 것이었습니다. 효과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다윗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좋아하셨을까요? 다윗은 열정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제가 있을 때면 하나님께 나와서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제가 무엇을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토록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했던 다윗이 이때는 전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방식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하였습니다. 재앙이 초래되었습니다. 

사무엘하 5장을 보면 인생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아뢰는 다윗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블레셋과 싸울 때의 다윗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사무엘하 5:19上)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사무엘하 5:19下 )

그리고 23절을 보면 다시 블레셋 군대를 만난 다윗이 또 올라갈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사무엘하 5:24下)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있기에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더욱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이 정도가 제일 마땅해요. 하나님은 더 간섭하지 마세요. 하나님, 나는 여기까지밖에 기도 못해요. 더 이상 기도하라고 얘기하지 마세요. 하나님, 나는 교회에 여기까지 밖에 헌신하지 못해요. 더 이상 나한테 요구하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자유와 생명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서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나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을 축복하셨을까요? 첫 번째로 다윗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품성의 완악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자리에 딱 엎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위의 사건이 있은 후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기를 꺼려했습니다. 나도 죽으면 어떡하나? 나도 하나님께서 치시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법궤를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안치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에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해주신대! 그 집과 그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대!” 그때 다윗은 즉각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내가 실수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그냥 내가 멀리했구나!’ 그러고는 마음을 곧 바꿉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 잘못했지?”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변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찾아 용기 있게 앞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인들을 보내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가지고 나오게 합니다. 나중에 성경을 보면 여섯 발자국을 걸었다고 말합니다. 여섯 발자국을 걷는데 하나님께서 전혀 야단치시지 않습니다. 그때 그는 ‘됐다’ 생각을 합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얼마나 빠릿빠릿한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꾀돌이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노래를 부르고 축제를 벌입니다. 그리그 그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마음 전체를 엽니다. 사람들이 보건 안보건 상관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으신 것을 기뻐하며 그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사무엘하 6:1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를 원합니까?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열정 없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말씀하실 때 “내가 즉각 고치겠습니다. 즉각 실행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마음에 합한 내 아들, 내 딸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