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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애가(다윗의 생애7) (삼하 1: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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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애가(다윗의 생애7) (삼하 1:23~27)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애통해했습니다

다윗이 지녔던 가장 소중한 성품이 무엇일까요? 다윗은 애통할 줄 아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슬퍼할 줄 아는 성품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도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과 인간의 타락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슬퍼하셨습니다. 애통해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사람을 좋아했을까요? 무엇이 다윗의 좋은 점일까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애통해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다윗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좋아하셨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의 애가가 실려 있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인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사무엘하 1:19)

사울과 요나단이 엎드러졌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영광까지도 죽임을 당했다고 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단순히 대적자였던 사울 왕이 무너져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그를 추격하고 공격했습니다. 다윗은 피할 곳이 없어서 이스라엘 밖으로까지 쫓겨나게 됩니다. 아마 다윗도 인간적으로 사울 왕이 빨리 죽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랐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담겨있는 시편이 곳곳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대적자 대신에 사울 왕을 집어넣으면 이해가 되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 앞에서 다윗은 통곡합니다. 슬퍼합니다. 충격을 받습니다. 

죽음은 모든 관계를 끝냅니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사무엘하 1:11~12)

다윗은 새로운 기회가 왔다고 의기양양해한 것이 아니라 충격을 받고 슬퍼하고 애도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사울 왕과 요나단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인 블레셋 군대에 의해서 조롱받으며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과 요나단의 몰락을 이스라엘 왕국의 파괴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칼을 뽑아 들었다가 멈춰 섰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사울 왕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웠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먼저 폐기처분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부음을 받은 종, 하나님의 약속의 종이 무참하게 쓰러진 것을 보면서 가슴 아프게 통곡했던 것입니다. 왜입니까? 죽음은 다시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새롭게 변화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의 죽음이란 가슴 아픈 것입니다. 동물의 죽음이라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고 폐부를 찌르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 죽음의 깊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치열하게 산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죽음 앞에서 격렬하게 비탄했던 것은 삶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죽음을 아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대적자인 사울 왕의 죽음 앞에서까지 통곡을 합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관계를 끝내기 때문입니다.

애통함의 자리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슬픔을 표현하는 애가는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내 속에 있는 미움을 멈추게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분노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내 속에 있는 공포를 이겨내게 합니다. 슬픔을 표현할 줄 알아야 기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슬픔을 표현할 줄 알아야 살아있다는 것을 감격스럽게 고백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핍박받았을 때에도 고통스러웠지만, 자기를 핍박하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그를 더 아프게 했습니다. 그것은 사울 왕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통곡이었습니다. 

나를 적대하는 사람이 넘어졌을 때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를 모욕하고 비난하던 사람이 잘 안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의 속생각은 어떻습니까? 고소하게 생각하고, 잘됐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통속적인 마음의 태도가 아닐까요? 그러나 잠언 24장 17절은 우리를 향해서 다르게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잠언서 24:17)

같이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같이 안타까워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요나단의 죽음이었습니다. 다윗은 26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사무엘하 1:26)

최고의 사랑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친구의 사랑, 요나단에 대한 사랑이 그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아름답다 요나단이여!” 그를 향하여 멋진 청년, 용감한 청년, 그리고 매력적인 청년이라고 예찬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나를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인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는 겁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왕자로써 마땅히 취해야할 왕위 계승까지도 자신에게 양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한탄합니다. 요나단을 향해서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를 애도합니다. 

애도하는 마음의 뒷면을 열어보면 거기에는 사랑과 긍휼함이 있습니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왜 축복일까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통함이 있는 자리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때 내 몸속에서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애통함이 없기에 내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것에는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만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애가를 지어서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개인적인 애가를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애가로 승화시킵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담겨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은 것에 대하여 모든 백성들이 함께 애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슬픔을 줄어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다윗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함께 애통하고 금식함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떤 슬픈 사건이 있을 때 옆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결과가 나옵니다. 그 슬픔을 귀히 여기면서 함께 나누면 그 슬픔과 애통과 마음속에 있는 분노가 줄어듭니다. 열이 다섯이 되고, 다섯이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그 슬픔에다 미움과 분노의 불을 지르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누구 탓인데! 이게 누구 잘못인데!” 그러면서 미움과 분노를 더하면 미움과 슬픔의 분노가 하나에서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는 폭발적인 분노의 도화구가 되고 맙니다. 이 시대에도 이것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입니다. 슬픔이 치료되지 않습니다. 슬픔의 탄식은 결코 우리의 인생을 빈곤하고 비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성하게 만듭니다. 아름다운 인격을 만들어내는 것이 슬픔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유진 피터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이 최악이 아니다.” 고통이 절망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움 받는 것이 최악이 아니다.” 남에게 비난받고 조롱받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최악은 현실과 대면하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그러므로 비탄하는 법을 배우라.” 통곡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죽게 되어있는 인간이다. 우리와 주변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이를 받아들이라. 당신의 십자가를 지라. 이것이 바로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다.” 아픔과 슬픔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상처들이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하나님은 애통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애통해하는 분이셨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애통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애통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애통 속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크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가를 부르십시오

예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슬픕니다. 내가 아픕니다. 내가 외롭습니다. 내가 비통하여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절망 속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아뢰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가족의 아픔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아픔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내 교회, 이 민족의 아픔을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 중보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들을 때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서 아파하고 슬퍼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도 네 슬픔과 고통에 참여하겠다.” 그러면서 나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것이 예배이고, 그것이 치유이고 회복인 것입니다. 내 속의 상처들을 너무 오랫동안 표현하지 않은 채 감춰두지 마십시오. 그러면 미움이 생기고 분노가 생깁니다. 분노가 오래되면 한 맺힘처럼 내 속에 깊은 쓴 뿌리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내 속에 있던 애가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 내 모습을 받아주세요. 통곡하는 나의 부르짖음을 받아주세요!” 하면서 하나님 앞에 터뜨려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통곡에 부르짖음을 받으시고 내가 너와 함께 아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이 다시 기쁨을 얻고, 우리의 육체가 치유함을 받고, 하늘의 평안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이고, 우리의 찬양이고, 우리 예배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대가 점점 살벌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없고 미움을 부추기고 분노를 부추기는 사람들만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슬픔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나아갈 때 이 시대의 상처들과 분노들이 서서히 해결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올 때마다 나의 애가, 공동체의 애가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와 생명의 치료를 받는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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