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을 향한 성도의 성숙한 자세 (요 17:14-19)

첨부 1


세상을 향한 성도의 성숙한 자세 (요 17:14-19)


오늘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께서 여유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와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염려와 근심들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에 한 번 안겨보십시오.  우리는 모두가 죄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시간마다 감사와 기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품어 보십시오.  이웃을 품어 보십시오.  가족들을 품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속에 있는 모든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아뢰십시오.  모든 불평과 원망을 사람 앞에 토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다 토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다 맡기십시오.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영혼에 여유를 한 번 가져보십시오.  살아가면서 제가 깨닫게 되는 것은 삶에 대해서 때로는 좀더 태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급박하고 각박하게 살고 나면 짧은 인생을 더 짧게 만들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가 아니라 거기에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에서 후회라는 것도 그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어리석은 반응입니다.  초라해진 현실 앞에서 그 때 그 사람 앞에 그렇게 밖에 반응하지 못했던가?  내가 그 때 그 사람 앞에서 혈기로 반응해야만 했던가?  내가 그렇게 어리석고 옹졸한 사람이었던가?  모든 사람은 그 때 그 일에 있어서 그렇게 반응했던 자기 어리석음에 대해서 후회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든 무거운 발걸음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참된 해방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행위로 만족하지 말고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하나님의 권세에 잡히는 해방감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정복되는 그 영혼의 해방감을 맛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시간마다 때마다 예수를 잘 믿고 인생을 기쁘게 사십시오.  삶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기쁜 세계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기쁘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길을 찾아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을 보시면서 이렇게 인사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쁘게 사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교회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는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교회와 세상, 성도와 세상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 우리들만이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이 땅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이후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던져왔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선교학에서는 그 동안 세상을 품고 세상의 변혁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노력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월드 크리스쳔'(World Christian)이라는 표현을 써왔습니다.  여기에서 world라는 단어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world라는 단어에 'ly'라는 어미를 붙이면 '월들리'(worldly)가 되어 '세속적인', 혹은 '세상적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월드 크리스쳔'은 좋은 뜻입니다.  세상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월들리 크리스쳔'이라고 하면 정반대의 뜻이 됩니다.  아주 세속적인,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을 뜻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을 대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를 사랑하는 나머지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바로 '월들리 크리스쳔', 세속적인 크리스쳔들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우리가 결코 추구하지 말아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품고 보다 밝은 세상, 보다 정직한 세상, 보다 의로운 세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월드 크리스쳔이라고 합니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직전에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전도를 받아서 앞으로 계속해서 예수를 믿게 될 수많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가장 긴 기도문이 기록되고 있는 곳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7장입니다.  요한복음 17장 전체를 가리켜서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그들이 세상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기대가 나타나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두 가지 상반된 제자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세상을 향한 성도의 성숙한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첫 번째, 세상에 빠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일종의 월들리 크리스쳔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시작이 됩니다.  "그들을(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면 세상에서 떠나야지라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대는 우리가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악에 빠지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기도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아니 앞으로 예수님을 믿게 될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소위 제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전혀 제자답지 않은 악에 빠져 살아갈 제자들이 있을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제자를 염두에 두시고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본문에서도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17장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키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었던 제자가 있었고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멸망의 자식이 있었고 하십니다.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 그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은 30냥이라는 돈의 유혹에 빠져 스승을 팔아버리는 악에 빠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는 돈의 유혹에 빠진 나머지 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우리들에게 이런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기억하십시오.  여기에서 돈이 죄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따르다가 자신을 배신한 한 제자의 일을 떠올리면서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라는 제자가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다.  그런데 그가 왜 그랬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그는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계할 때의 이 세상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요한일서 2장 15-16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빠지게 하는 악의 근원이 되는 사탄이 사용하는 세 가지의 무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탄은 인류 최초의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에게 찾아와 벌써 이 세 가지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 사람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본 순간 세 가지를 느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느꼈습니까?  먹음직하고, 이것은 바로 먹는 것을 통해서 찾아오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 다음에는 보암직하고, 이것은 본 것을 통해서 유혹이 들어오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리고 지혜스럽게 할만큼 탐스럽고, 하나님만큼 지혜로워집니다.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싶은 욕망, 이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자신을 높여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싶은 교만, 이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탄은 예수님 조차도 이 세 가지의 무기를 가지고 시험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 나가 금식기도를 하셨을 때 사탄은 찾아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돌들을 명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사탄은 먹는 육신의 정욕으로 시험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절만 하면 다 주겠다고 합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성전 높은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네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천사가 와서 네 발을 살짝 들어올리면, 그래서 기적적으로 살면 너는 내일 아침 모든 신문과 메스컴에 나올 것이다.  너는 슈퍼스타가 돼.  이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이 세 가지의 시험 앞에 직면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소유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결코 소유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의식주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버지는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소유의 필요를 부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유욕이 과장되어서 우리가 탐욕 속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정당한 쾌락, 정당한 즐거움은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우리에게 누리도록 주신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쾌락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쾌락이 우상이 됩니다.  우리는 삶의 여유를 위해서 오락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오락이 지나쳐서 오락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악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정당한 명예, 자기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이름의 가치는 재산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혈안이 된 사람은 이미 자신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세상의 그릇된 가치와 욕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세상의 그릇된 가치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길은 말씀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기억해 내셨습니다.  말씀을 묵상했고, 말씀을 암송했고, 말씀을 붙들고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세상을 극복하고, 이 세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허락하신 최후의 선물은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서, 세속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말씀은 없어서는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말씀이 없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왕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수많은 타락의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나를 지키고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 보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종말의 환란 속에서도 우리가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복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말씀을 붙드십시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없이는 결코 복된 인생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끝없이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우리를 압도합니다.  어떻게 세상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말씀을 붙들 때에만 가능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다.  "제발 세상에 빠지지 마세요."  세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에 빠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을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세상을 거부하고 떠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과거 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사막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짓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수도원이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다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기 위한 수도원이라면 그 운동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도피하기 위해서 단순히 수도원으로 갔다면 그 수도원은 성경적인 수도원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의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주의 뜻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가면 어디에서 빛이 되고, 어디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세상은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세상이 부패했기 때문에 그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서울에 가면 주한 미 대사관이 있습니다.  주한 미 대사관에서 일하는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 속해 있습니까, 미국에 속해 있습니까?  그분들은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습니까, 미국 정부의 지시를 받습니까?  당연히 미국 정부의 지시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한국에 있어야 합니까, 미국에 있어야 합니까?  한국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에 있어야 그들은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 땅을 떠나려고 하면 그들은 그 순간 사명을 잃은 자가 됩니다.  그들은 한국으로 보냄을 받은 미국 사람들입니다.  한국에서 미국을 대표하고, 미국의 가치를 보여주고, 미국을 대변하고, 미국을 드러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만 지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평화를 드러내야 합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 속에서 참된 기쁨을 드러내는 인생을 사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의가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평화가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갖지 못한 참된 기쁨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꼭 같아서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제 세상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올 것을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오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한 복판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합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우리가 거룩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들보다 더 정직해야 합니다.  그들보다 더 친절해야 합니다.  그들보다 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보다 훨씬 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갖지 못한 삶의 거룩함이 우리들에게는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세상보다 훨씬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 못합니다.  더 진실하지 못합니다.  더 관용스럽지 못합니다.  더 사랑하지 못합니다.  더 법을 지키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옹졸하고 편협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다른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다르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국의 초대교회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거룩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한국 초대교회와 성도가 세상에서 거룩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결코 교인들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교회와 성도들의 숫자는 극히 미미할 정도로 적었습니다.

로마를 보십시오.  로마의 교회가 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에 기독교인들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기독교인은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거룩함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거룩한 삶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감동과 여운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제자는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인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아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한 조각의 영토를 빼앗아 점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역시 세상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은 세상이요 하나님께 화해된 세상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다른 사람과 그리스도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해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른 교회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입니다.  작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야말로 세상 한 복판에서 살면서도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맑게 더 맑게, 샘물처럼
웃음을 밝게 더 밝게, 햇님처럼
눈길을 순하게 더 순하게, 호수처럼
사랑을 넓게 더 넓게, 바다처럼
기도를 깊게 더 깊게, 산처럼
말씨를 곱게 더 곱게, 꽃처럼"

여기에서 몇 가지만 더 첨부한다면,
삶의 걸음을 바르게, 더 바르게, 대로처럼
관계를 평화롭게 더 평화롭게, 숲속 가든처럼
생각을 상쾌하게 더 상쾌하게, 계곡처럼
태도를 따뜻하게 더 따뜻하게, 강물처럼
맡은 책임을 깨끗하게 더 깨끗하게, 유리알처럼
날마다의 삶을 기쁘게 더 기쁘게, 잔치 집처럼”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세상이 우리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세상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빠져 사시겠습니까, 세상을 품고 변화시키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