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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기도하고 감사하라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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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고 감사하라 (빌 4:6-7)

오늘 본문은 아주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 제일 먼저 암송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읽은 구절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늘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 구절이 의아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리라’ 이렇게 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의문은 그까짓 평강을 얻으려고 기도한다는 것입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뢸 때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지 평강이 없어도 될 때가 있습니다. 평강은 없어도 좋으니까 제발 제가 구하는 것을 들어 달라, 이렇게 생각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의 평강만을 얻는다면 과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평강이 없더라도 소원을 이루는 것이 낫다. 

여러분은 그런 질문을 하신 적이 없습니까. 거기에서 한술 더 떠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결국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것인가? 외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자기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가? 마치 불교와 흡사한 번민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에 불과한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좀 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찾으라 그리하면 찾으리라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보다 더 분명한 말씀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목사님, 저도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해봤는데 안 될 때가 있던데요?’ 이렇게 물어보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저에게 물어보지 마시고 예수님께 물어보세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려해야 될 사항이 있습니다.

보험계약서에도 작은 글씨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도 작은 글씨가 있습니다. 그걸 읽어야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큰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큰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 믿음의 기도는 효험이 많이 있다는 사실,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사도바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되풀이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커버하지 않은 면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염려의 문제입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면 오드리 헵번이 공주로 나오지요.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도망합니다. 그러다가 신문기자인 그레고리 펙을 만나게 되고 로마에서 꿀과 같은 하루를 보내고 결국은 다시 숙소로 돌아갑니다. 그동안에는 왕실에서 야단이 났습니다. 공주가 행방불명이 됐기 때문에. 그런데 하루 만에 공주가 돌아왔을 때 의전담당 비서가 단 한마디 엄한 꾸짖는 말을 합니다. ''You have caused us great anxiety. - 공주님 우리가 얼마나 염려했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요즘 버전에는 편집됐더라구요. 정말 귀족은 다릅니다. 한마디 점잖은 꾸짖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니까. 이 한마디 속에 인간의 상황이 잘 들어있습니다. anxiety-염려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염려하는 존재입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인간의 염려는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객관적인 변화가 인간의 염려를 줄여주지 못합니다. 우산장사하는 아들과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일 년 내내 염려한다고 했습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에는 우산장사가 안될까 봐 염려하고 또 비가 오는 날은 아이스크림 장사가 안 될까 봐 염려한다고 했어요. 한 번도 바꿔서 생각하지 않지요. 

요즘 신문기사를 읽어보면 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오른다고 염려하고 환율이 내려가면 수출이 안 된다고 염려합니다. 한 번도 잘됐다는 기사를 읽어보지를 못합니다. 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야 사람들이 읽을 줄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고3 자녀를 둔 부모는 대학진학을 염려하고,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는 취업을 염려하고, 취업한 자녀를 둔 부모는 결혼을 염려하고,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는 출산을 염려하고, 출산한 자녀를 둔 부모는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염려하고, 그러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남편이 너무 오래 산다고 염려하는 부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애교로 받아줄 수 있어요.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위기도 있습니다.

IMF위기를 당했을 때는 그건 해가 떴느냐, 비가 오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녀가 만일 건강이 나빠서 매일 병원 신세만 져야 된다면 그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느냐 취업하느냐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질문이 될 것입니다. 지금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나 이탈리아는 환율이 오르느냐 내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앞이 안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위기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죽느냐 사느냐를 말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염려에 대한 해답은 더 환경을 변화시키고 더 좋은 경제나 대통령이나 이런 데에서 인간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은 기도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네가 살지 못하고 죽으리니 네 집을 처치하라’라는 말을 듣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보지 않고 돌아누워 벽을 바라보았다는 말은 사람들은 이제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벽을 향해 돌아누워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 히스기야 왕이 이렇게 기도했는데 들어주실 분이 없다면 히스기야는 벽에 대고 기도한 것입니다. 돌멩이에 대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한 뜻은 우리가 이와 같이 기도할 때 들으시는 분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막연하지만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말은 애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느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는 말은 너희가 기도할 때 벽에 대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벽돌에 대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권고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이미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느낄 때 그분의 평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의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이 세상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위로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만일 이것이 실감나지 않으신다면 직접 경험하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런 간증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목사님, 더 이상 염려가 안 됩니다. 더 이상 미운 마음이 안 생깁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이렇게 간증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더 이상 걱정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하기 전에는 염려가 그의 마음을 지배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새로운 존재 양식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백만장자 중에 이러한 마음의 평강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돈을 지불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추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감사라는 것입니다. 먼저 추수는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인이라고 해서 더 이상 추수가 상관없는 것이 아니고 심고 거두는 원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든 자식농사를 하는 사람이든 목회를 하는 사람이든 하나님은 우리가 심고 거두는 원리를 통해서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셨지요. 우리는 무엇인가를 심고 그것이 자라서 열매 맺기를 기다리면서 삽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거두는 것이 없다면 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심었다면 때가 되면 그것이 열매 맺을 줄을 믿어야 됩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추수감사절의 두 번째 요소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뛰어난 신앙인의 덕목이 아닌 상식적인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상식이 없는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 종업원이 물 한 컵을 가져다 줄 때 사실 감사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돈 내고 서비스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군데 처음 보는 사람이 나에게 물 한 컵을 가져다줍니까. 생각을 해보면 고마운 일입니다.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한 번도 ‘감사합니다. 고맙소.’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아내를 가정부 취급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직원이 시킨 일을 해 주었을 때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직원을 종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기에 사람이 나에게 물을 떠다주고 나에게 밥을 해주고 내가 부탁하는 것을 해줍니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VIP가 아니고 설사 태어나면서부터 VIP인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죽합니까.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섬김만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위가 올라갈수록 섬기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이 세상에 이런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통령도 누군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창하게 하나님에게 감사를 말하기 이전에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법부터 배워야 됩니다. 작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이 주님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누구냐. 첫째는 매사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매사를 자신의 권리 ․ 권한 ․ 자기의 주장하는 권리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수고해서 돈 받는 건데 뭐가 감사하냐. 내가 내 돈 내고 서비스를 받는 건데 뭐가 감사하냐. 이런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늘 다툽니다. 왜 더 안주느냐. 왜 더 친절하게 해주지 않느냐. 왜 요것밖에 주지 않느냐. 감사하지 못하는 것 뿐만이 아니고 늘 다툽니다. 늘 싸웁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전에는 감사라는 게 없어요. 권리와 권한과 자격만을 생각하는데 무슨 감사할 것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는 이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보다 나은 부류다. 나는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이것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사람이다. 나는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어디에 적을 두지 못합니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람들과 적응하려고 하지 않고 화합하려고 하지 않고 늘 불만과 불평이 많습니다. 나는 여기에 머물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과 격이 다르다. 나는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본인 스스로가 불행하고 고독합니다. 

반대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권리가 아닌 은혜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가 수고도 하고 돈도 내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 일이 없는데 이렇게 받아도 됩니까. 그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늘 공부만 열심히 하는 우등생보다는 공부를 덜 하는데 운이 좋아서 시험을 잘 보는 아이들은 감사할 줄 알아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내가 수고해서 100점 맞았는데 누가 감사해? 내가 감사하지.’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또 누가 감사할 줄 아느냐.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눈높이를 낮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신문기사를 보니까 한국의 낮은 출산율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낮은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결혼률이 낮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지요.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결혼을 안 하느냐? 활동하는 여자들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인데 활동하는 여자들이 많아지면서 격에 맞는 남자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사가 권고한 것은 활동하는 미혼여성들이 결혼하려면 눈을 낮춰야 된다. 남자를 보는 눈을 낮추면 결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 뿐입니까. 취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취업도 눈을 좀 낮추면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취업난이 직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자기 눈에 맞는 직장을 찾기가 어려워서 그런 경우가 많아요. 신학생이 신대원을 졸업한 후에 임지를 구하지 못해서 야단인데 교회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다 서울에 남으려고 하고 서울의 대형교회를 가려고 하다보니까 임지가 없는 것입니다. 눈을 열어서 눈을 낮추면 자기를 필요로 하는 교회는 많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감사는 그저 신앙의 덕목이 아닌 인생의 지혜 또 겸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은 응답을 받은 다음에 감사하라고 말하지 않고 응답이 아직 오기 전에 우리의 구할 것을 아뢸 때부터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왜 감사합니까?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감사하는 이유는 들어주실 분이 계시고 그분이 들어주시고 또 그분이 응답해주실 것을 미리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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