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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눅 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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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눅 17:11-17)


오늘 우리가 추수 감사 주일을 맞았습니다. 무엇보다 추수감사절은 신앙인들이 한 해를 지내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감사를 기억하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감사해야 할 자리에서 우리를 무겁게 만드는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요즈음 온통 여기 저기 신음소리입니다.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떤 특정의 사람들이라 말할 것도 없이 사회 전체가 겨우겨우 하루를 버티는 고통의 시간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올해도 그 어느 해 못잖게 일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해외에는 터키의 지진과 일본 후쿠시마의 쓰나미, 태국의 수도 방콕의 침수 등 굵직한 대재앙만 꼽아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국내도 서울 우면산 산사태 등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고통만 바라보면 희망의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감았다가 뜨면 감사할 일이 수두룩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난 10개월 동안의 삶을 되돌아볼 때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지난 2011년 10개월 동안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때라고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지난날을 살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에 대해서 너무 무감각하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10명의 문둥병자(한센 병)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 문둥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병에 걸려도 나을 수 있는 병이라면 그렇게 크게 어려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료해도 나을 가망성이 없다면 하고 상상해 보십시오. 죽음을 위한 삶이지 삶을 위한 삶이 아닐 것입니다. 암이 무서운 이유는 회복될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은 보기에도 흉합니다. 코나 입술이 썩어 들어가면서 떨어져 나갑니다. 손가락도 떨어져 나갑니다. 

사람들 보기에 몹시 흉해서 편견과 격리 속에 고통과 아픔을 당하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성경은 문둥병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당시 무엇인가 부정한 사람, 죄를 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고 그 결과로 몹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동정 받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동정은커녕 오히려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어야 합니다. 마을 어귀에 쫓겨 나가서 동굴에 살며, 가족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쓸쓸하고 외롭게 죽어가는 병이 바로 문둥병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어느 한 구석진 마을에 나환자 열 명이 함께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12절에 “멀리 서서” 그래서 목소리 높여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이 외마디 외침 속에는 이들의 한 많은 지난 세월, 아픔이 담겨있었고 살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과 기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에게 가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가는 도중에 자신들의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평생을 고통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그들에게 자신들을 불행의 터널로 집어넣었던 이 문둥병이 사라지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감격과 눈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땅히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지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여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신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십니까? 

R. A. Toray 라고 하는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이 되었어요.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어요. 그것이 신문에 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아주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미시간호에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그런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끝났을 때쯤 해서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바로 그 청년입니다" 그랬어요. 예배 후에 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와서 차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이 하는 말이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는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삶이 성숙하지 못하고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은혜를 감사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미숙한 사람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작은 은혜도 큰 것으로 감사할 줄 알지만 미숙한 사람은 큰 은혜도 놓치고 작은 불행을 큰 것으로 여겨 늘 큰 불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불평불만과 원망만하고 추호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어머니 기도회에 오셔서 큰 은혜를 끼친 위기상담 전문가이신 정태기 교수님께서 쓰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에 보면, 정 교수님께서 한 때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당할 때에 소록도에 갔던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정 목사님은 기도가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않고,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소록도에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그가 소록도에 도착하던 날은 마침 수요일이었고, 예배당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는데, 목사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도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도가 목사님의 귀를 파고 들었습니다. 그 기도소리는 머리를 치고 가슴속을 후벼 파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기도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이 큰 은혜에 제가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 목사님은 그 기도소리를 듣다가 도대체 무슨 은혜를 그렇게도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싶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60이 넘은 듯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센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머리, 떨어져 나가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버린 눈... 눈으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목뿐인 손바닥으로 박수를 쳐가면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정목사님은 자신의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두 시간이나 정목사님은 그렇게 통곡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뒤에 그 노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은 그 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신 것입니까?” 그 때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들도 다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다 떠나버렸지.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아, 할머니가 따라 오셨군요?” “아니야, 할머니는....예수님이 따라 오신거야!” 
  
이 은혜 앞에 우리도 살아갑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힘듬이 있고, 주저 앉고 싶은 어려운 삶의 현장에 있을찌라도 우리가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여러분 삶을 아름답게 이끌어 가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감사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감사는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됩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는 자에게는 불평으로 갚아주시고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로 갚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 여기 치유 받고 돌아와 주 앞에 엎디어 사례하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가 육체의 치유를 인하여 감사했더니 그의 영혼의 구원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말씀이 단순히 그가 믿음으로 육체의 치유를 받은 것을 확인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9명은 믿음으로 제사장에게로 가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단 말입니까? 여기서의 주께 나아와 엎드림은 명백하게 이제 그가 남은 인생길을 그가 예수를 의지하고 갈 준비가 되어있음을 고백한 것이고 그가 이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입고 예수의 참 제자가 된 것을 뜻하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축복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 미래를 열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멋진 감사의 제단을 쌓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오늘 투표를 합니다. 후보로 나오신 분들, 한분, 한분이 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는 분들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뽑아야 할지 아직도 표심이 결정되지 않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민도 여간 크지 않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의 한 표의 중요성은 어마 어마함을 알아야합니다. 작은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지면 바위를 뚫습니다. 큰 바다도 작은 물방울이 모여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충성을 생명처럼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작은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일꾼은 세상의 일군과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공천 후보 중 이 시기에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쓰시는 자리에 여러분이 서 계십니다. 세상 관점에서 붙는다, 떨어진다는 개념을 쓰시만, 우리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전북 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된 ‘ㄱ자 구조’의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1905년에 시작된 이 교회는 대지주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반의 구별이 아직 남아있던 시절이었지만 조덕삼은 마부인 이자익이 천자문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천민이라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1907년 금산교회 장로 장립 투표가 있었는데, 묘하게도 마부 이자익이 선출되고 지주 조덕삼은 탈락하였습니다. 

교회가 술렁거리자 조덕삼은 겸손하게 나서 교회와 장로를 섬길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조덕삼은 자기 집 마부인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그가 신학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이자익이 신학을 마치자 담임 목회자로 청빙하여 지극 정성으로 섬겨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조덕삼의 손자가 바로 4선의 국회의원과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 장로입니다. 정말 멋진 광경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 당시 얼마나 힘듬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주의 섭리 앞에 겸손하게 맡기고 자신의 삶을 더욱 더 주 앞에 섬겨 나갈 때 그 한사람 때문에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감사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는 은혜를 깊이 알아 갈수록 넘치게 됩니다. 저는 지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은혜를 저버린 당시의 아홉 문둥병 환자에게 하시는 책망으로 이해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실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이 말씀은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환자들의 코 묻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예수님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 명마저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그들이 깨닫지도 듣지도 보지도 누리지도 못했던 더 큰 신령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지나간 삶을 회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은혜를 깨닫고 열매를 드림으로, 물질과 시간을 드림으로, 그리고 온 몸 전체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산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오늘 우리 모두가 사람들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은혜를 주고 나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들, 그들의 소중한 모습들을 우리가 잊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를 그렇게도 사랑해주신 하나님,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날 때에라도 내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은혜에 배은망덕하지 맙시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합시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에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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