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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 (시 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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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감사 (시 50:23)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개콘’ 즉 ‘개그 콘서트’라는 TV 프로가 있습니다. 그 개그 콘서트에 ‘감사합니다.’라는 노래가 유행이라고 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가사가 대충 이러한 내용입니다. <세상에는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거기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지루한데 비가 와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야한 동영상 몰래보려고, 우리 아빠 주민번호 입력했는데, 우리 아빠 우수회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엄마한테 말하지 마! (5만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말 할거야!(10만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참 고약한 내용이지요. 이것이 불신자들의 감사인데, 누구한테 감사하는지 그 감사하는 대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감사하라”(think and thank)는 말이 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소설이 있는데, 주인공이 항해 도중 그만 배가 파선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자기만 혼자 살아서 어느 섬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섬에서 외롭게 보내다가,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가서 혹시 지나가는 배가 없을까 하여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지나가는 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 그만 의기소침해졌습니다. 

할일 없이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다가, 왜 하필이면 배가 파선하게 되었을까 불평스런 생각이 나면 왼편에 돌을 던지고, 그래도 나는 살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감사한 생각이 들면, 오른편에 돌을 던졌습니다. “왜 하필이면 무인도일까?” “아니야 그래도 무인도일망정 과일도 있고 물도 있어서 사람이 살만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렇게 하루 종일 불평스런 생각이 들면 왼편에 돌을 던지고, 감사한 생각이 들면 오른편에 돌을 던졌는데, 나중에 양쪽의 돌무더기를 보니까 감사한 쪽에 훨씬 더 많은 돌멩이가 쌓였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은 전국 교회가 추수 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들이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닌데 무슨 추수 감사절이냐고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추수 감사절은 단순히 추수에 대한 감사뿐만이 아니라, 병마질고 많고 재난 많은 세상에서 한 해 동안 무사히 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생각하고 감사하라!” 우리 역시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먼저 국가적으로 감사할 일들이 있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장마 후에도 오랫동안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서, 그만 농사를 아주 망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과는 달리, 금년의 쌀 수확량은 422만 4천 톤으로 평년작을 웃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강원도 평창이 확정된 것도 국가적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도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두 날개 양육 시스템의 일환으로 약 150여 명의 성도들이 양육반과 제자대학에서 십자군의 정병으로 훈련을 받아 건강한 교회로서의 기초를 닦게 된 일이며, 또한 두 차례의 전인 치유 수양회를 통해서 많은 성도들이 치유와 성령 체험을 하게 된 일, 그리고 8년 만에 전 교인 체육대회를 성대하게 치른 일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감사한 일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병원마다 환자들로 가득한데, 지금 이 시간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가정이 있고, 사랑스런 자녀가 있고, 지금처럼 취업의 관문이 좁은 때에 직장이 있다는 것이 또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살률 1위라고 하며, 2010년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103위라는 소식은 퍽이나 충격적인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AIDS 즉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는 병이 신의 저주에 의한 20세기 흑사병이라 불리면서,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세계 각국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는 병명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결핍증이 있는데, 그것은 곧 감사 결핍증이라는 것입니다. 버스나 전철을 탔을 때, 자리를 양보해 주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주인은 의례히 장삿속으로 ‘‘또 오십시오.” 라는 말은 할지언정, “감사합니다.” 라는 말은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감사 결핍증이 만연하게 된 원인으로, 어떤 이는 우리의 자연 조건을 들기도 합니다. 즉 우리나라는 산수가 아름답고 토질이 비옥하기 때문에, 씨만 뿌리면 곡식이 잘되는 혜택을 너무 많이 받은 것이, 오히려 감사 결핍증이라는 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추 한 포기에 5백 원 할 때나 5천 원 할 때나 값이 ‘싸다’ ‘비싸다’ 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지, 한 포기의 배추, 한 톨의 쌀이 우리들 식탁에 오르기까지 흘린 농부들의 땀이나,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자연의 혜택에 대해서는, 전혀 고마움을 느낄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가뭄이 심하면 하늘을 향하여 ‘기우제’ 라는 것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렸던 단비가 내렸을 때,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이처럼 감사 결핍증에 걸린 우리들에게, 추수 감사절을 맞이한 오늘, 시 50:22절에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언제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까?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당부하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약속을 철저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하였습니까? 렘 2:32에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족속들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시 50:22절에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으리라.”고 했고, 공동 번역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모른 체 하는 자들아, 알아두어라. 내가 너희를 찢겠으나 구해 줄 자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제사의 가장 근본정신, 예배드리는 자의 가장 귀한 태도는,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갖고 있는 큰 병폐중 하나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은혜만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올바른 예배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혜 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부모 된 사람들은 자기의 자녀들에 대해서 어떻게 되어 주기를 바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바라거나,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하신 뜻을 갖고 계시는데, 곧 우리에게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아들을 위해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집이 없음에도, 아들 내외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집을 마련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 결정을 하고 아들 내외가 몹시 기뻐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연탄가스를 맡으며 고생하던 아들 내외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얼마나 기뻐할까 생각만 해도 살맛이 났습니다. 중도금을 치르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계약할 때 빠졌던 며느리도 함께 갔습니다. 어머니는 신이 났습니다. 아들 내외가 아파트를 보며 얼마나 기뻐할까? 집으로 들어서며 어머니는 아들 내외 얼굴만 바라봅니다. 

아들 내외의 행복해 하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들 얼굴이 그냥 그 얼굴입니다. “어유, 나는 이렇게 작은지 몰랐네. 계약할 때는 꽤 커 보이더니 이거 장롱도 제대로 못 놓겠는데... 우리 짐을 어디다 갔다가 놓지. 화장실도 이렇게 작아 가지고서야.....” 곁에 있던 며느리가 거듭니다. “이 아파트 지은 지 꽤 오래 되었나 봐요? 스물 몇 평이라면서 이렇게 작을 수가 있어요. 

뭐 잘못된 거 아녜요. 아저씨.....” 부동산 중개소 아저씨가 뭐라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힘이 빠져 내립니다. 어머니는 주름진 얼굴로 표정 관리를 하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어둠에 덮인 아파트를 나서며 그 어머니는 허공에다 말했습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아들 내외가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들은 짐 걱정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니까요. 이 이야기를 통해 그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시는 분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 내외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나일 수도 있고, ‘여러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하늘, 땅, 바다, 공기, 양식, 물, 사계절, 가정, 가족, 생명, 다 그 분이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옥에 빠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대신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시기 위함이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랑하기에 값없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큰 구원의 선물을 준비하신 후, 우리가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할까를 생각하십니다. 뜨거운 불이 영원토록 타오르는 지옥에서 건져 천국으로 보내 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막상 그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무덤덤해 합니다. 감격도 안합니다. 감사도 안합니다. 그리고는 아들 내외와 같이 ‘이게 적다’ ‘이게 없다.’ 라고 불평을 해댑니다. 하나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떠합니까? 잠언을 읽다 보면 거머리를 만납니다. 이 거머리에겐 두 딸이 있습니다. 두 딸이 하는 말은 다오 다오 뿐입니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않습니다. 계속 다오 다오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거머리의 딸은 결코 아닙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처럼, 남에게 받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고, 남이 나에게 원수진 일은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 열 명의 나병환자가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주님께 나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제사장에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한 병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나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다 어디 가고 한 사람만 돌아왔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례하는 사마리아인 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은 질병만 고침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그 병자는 영육이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크신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준비해 놓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많은 것, 나은 것, 좋은 것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아래를 보고 비교하기보다는 높은 것을 보고 비교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자신보다 조금만 낮은 것을 보아도 쉽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욕심만 조금 내려놓아도 감사할 수 있고, 조금만 낮은 곳을 보아도 입술에 감사의 열매가 맺힐 수 있습니다. 집에 전기만 들어와도 전기 혜택 없이 사는 20억의 사람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수돗물만 먹을 수 있어도 아무 물이나 마시는 10억의 사람보다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루 천 원 이상으로만 생활해도, 천원미만으로 살고 있는 12억 명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8억 명의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고, 몸이 건강하다면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할 백만 명의 환자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몸에 옷이 걸쳐져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그렇지 못한 75%의 사람들보다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는 은혜에 익숙한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며 자신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인도해주세요.” 그녀는 중병에 걸렸을 때 한 청년을 만나 전도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 청년과 결혼을 했습니다. 병든 자신과 결혼을 해 준 그가 너무도 감사하여,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같이 살다보니 별로 고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그랬습니다. 당연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신경질도 내고, 화를 내고, 미워하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죄 가운데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너무나 익숙하여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신앙이 아닙니까? 찬송을 불러도 기쁨이 없으며, 기도를 해도 감격이 없는 신앙은 아닙니까? 보다 많은 것을 바라지만 얻지 못하여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의 타성에 젖어 감격을 상실한 채 시큰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은혜에 익숙한 나머지 감사를 놓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인 것입니다. 

한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큰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물로 너도 예외가 아니야. 싸움은 너처럼 어린 아이의 마음속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거란다.” 손자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도대체 무슨 싸움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추장이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은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그 중의 한 마리는 사악한 늑대로서 그놈은 질투와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연민, 죄의식, 회한, 열등감, 화,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을 가지고 산단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선량한 늑대로서 오직 기쁨과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단다. 이 두 마리의 늑대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지.”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그 싸움에서는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무슨 말입니까?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사랑의 열매를 거두고, 내가 미움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미움의 열매를 거두며, 내가 감사의 사람이 되면 감사의 열매를 거두고, 내가 원망불평의 사람이 되면, 원망불평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비례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에 비례합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것이 성도들의 최고로 옳은 행위임을 기억하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는데, 오늘 여러분의 감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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