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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자가 온 것은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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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온 것은 (막 10:35-4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림절기(待臨節期)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들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행사 준비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도 개개인이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위대한 사건을 보다 깊이 생각하고, 그 의미를 자신의 신앙 생활에 적용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림절기는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자신의 독생자를 성육신(成肉身)시키셔서 이 땅에 보내신 엄청난 사건을 뒤돌아보며,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의 날’ 에 대한 소망을 다짐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동행하던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의 높은 자리를 달라고 야심찬 청탁을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분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남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도리어 남을 섬기라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오신 목적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경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만민의 죄를 대속한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유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주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며, 주님이 주시는 겸손과 섬김에 대한 교훈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섬기는 자로 오심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남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남보다 낮아져서 남에게 봉사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성자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를 비워두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를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비하(卑下)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분의 온 삶을 통하여 철저히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섬기는 자의 화신입니다. 

주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것은 당시 로마 시대의 참혹한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노예는 오직 상전만을 섬기는 자이고, 모든 일에 상전을 섬기는 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 오신 것은 주님의 일생을 통하여 하신 모든 사역에서도 나타납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찾아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바로 병든 자를 섬기는 자세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광야에서 5천명, 4천명을 보리떡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먹이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시는 자세가 바로 섬기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고 하신 것 역시 섬기는 자의 자세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소금은 음식을 맛있게 하고 부패를 방지합니다. 빛은 남을 밝게 하고 열을 주어서 성장케 합니다. 소금이나 빛은 모두 남을 위한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사마리안인의 비유’ 또한 섬기는 자의 자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나그네를 도와 약을 발라주고 여관에 데려가 치료해 주고 아침에 돌아갈 때 여관 주인에게 돈까지 주면서 그를 부탁하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강도 만난 자의 참 이웃이 누구인가를 실감나게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의도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명예에 눈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受難)을 예고하셨건만, 제자들은 전혀 다른 소원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야고보와 요한이 세속적인 속내를 드러냅니다. 

37절=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섬기는 자의 길을 교훈하시고 모범을 보이셨건만 제자들은 세속적 영광에만 집착했습니다.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어찌 그들 뿐이겠습니까?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43-44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 는 것은 절대적으로 낮아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권력지향적인 부패한 심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높아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에 결코 능동적으로 자신을 낮출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가장 낮은 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을 본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침상에 함께 누웠어도 생각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자기 목숨을 온 인류에게 대속물로 주시고자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큰 자리’ 생각에만 골몰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겠노라고 서원하고도 주님과 다른 생각을 지니고 주님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인류를 섬기기 위해 2000년 전 베들레헴 마굿간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향하여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대림절은 우리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2. 대속의 봉사자로 오심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본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단순히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섬기는 자의 마지막 극치는 남의 대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만민의 대속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대속물(代贖物, 뤼트론)’ 은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 을 가리킵니다. 즉 타인의 속박 하에 있는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이러한 죄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필연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풀어주십니다. 죄악의 결과인 사망에서 풀어주십니다. 죄악의 결과인 인간의 모든 고민에서 풀어주십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서 풀어주십니다. 주님은 대속의 봉사자로 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대속의 봉사자로 오신 것은 철없는 제자들의 간청에 대답하신 말씀 중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탐하는 제자들에게 잔과 세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38장= “···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 ‘잔’ 은 일차적 의미로는 마시는 그릇을 가리키며 구약 성경에서 주로 괴로움과 수난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시 75:8, 사 51:17 등). 본문에서도 ‘잔’ 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눅 22:42, 요 18:11).  

그리고 ‘세례’ 에 해당하는 ‘밥티조마’ 역시 구약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는 어떤 사람이 극심하게 당하는 재난이나 고난을 의미합니다(시 69:1,2). 그런 의미에서 ‘잔’ 과 ‘세례’ 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주 분명히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으로서 사 53:5의 예언과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이 땅에 와서 섬기신 봉사는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속죄의 봉사였습니다.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으로 봉사하신 것이고, 마지막에 자기 생명을 많은 목숨의 대속물로 바쳐주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신 것은 ‘많은 사람’ 을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폴론)’ 이라 한 것은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과 더불어 정도에 있어서 광범위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이란 의미가 있는 ‘파스’ 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택하셔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신 영혼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에 세 천사를 불러 의논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맨 처음 부름 받은 ‘거룩’ 이라는 천사에게 하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내가 사람을 지을까 말까?” 

‘거룩’ 천사가 대답하기를, “짓지 마십시오. 사람을 지으면 반드시 그들이 하나님의 신성성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짓지 마십시오.” 

그 다음에 ‘정의’ 라는 천사를 불러왔습니다. “내가 사람을 지을까 말까?” 라고 물으니 ‘정의’ 천사 역시 “사람을 짓지 마십시오. 그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꺾을 것입니다. 짓지 마십시오.”

세 번째 불려온 천사는 ‘자비’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사람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을 짓밟고 정의를 꺾을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때 제가 그 사람을 꼭 따라다니겠습니다. 그때그때 그를 가르치고 보호하고 지킬테니 하나님이여, 사람을 만드십시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비’ 천사의 의견대로 사람을 지으신 후에, 처음으로 지음 받은 아담에게 “너는 자비의 아들이다. 그러니 너도 가서 자비를 행해야 한다” 라고 했다 합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세상에는 거룩도 있어야 하고 정의도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자비요 사랑이요 봉사입니다. 마지막 환난의 시대에 고통받는 모든 자들에게 대속의 봉사자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3. 섬기는 자를 하나님이 높이심

하나님은 섬기는 자로 오신 예수님을 크게 높이셨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한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대속의 봉사자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높이셨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는데,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존재 위에 뛰어나게 높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온 인류 가운데 수억의 사람들이 입을 열어 예수님의 이름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온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 5:27). 

기독교의 기본 정신은 이처럼 역설적(逆說的)입니다. 섬기는 자를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면 오히려 섬김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섬겨주면 결국 섬김을 받습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를 보십시오. 가난한 도시, 범죄의 소굴과 같은 흑암의 도시 캘커타의 거리에 다니면서 걸인들, 나환자들, 병든 자들을 찾아 돌보며 그들을 위해 온 삶을 투신했던 가냘픈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매우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이었지만, 후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그녀는 온 세계 사람들에 의해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를 가까이 하는 사람마다 그녀의 인격에 순결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녀가 질투 없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테레사가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이웃집 사람이 그녀 곁에 다가서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 수녀는 이런 유명한 답을 남겼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누가복음 19장에는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삭개오는 자신이 일생을 통해 너무 많은 부정과 약탈로 늘 마음에 가책을 받아 우울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친구가 와서 “자네 왜 이렇게 우울해 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한번 생각해보게. 내가 우울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자 친구가 권면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 자네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그 말에 눈이 번쩍 떠진 삭개오는 새롭게 다짐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지난 날에는 많이 부족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겠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생각하니까 그의 마음이 밝아 왔습니다. 우울한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후 빛나는 얼굴로 남은 생을 복음 사역자로 살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로 오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방법으로 섬기는 삶을 사는 성도들을 높여주십니다. 마음에 안정과 평안을 주시고, 빛나는 얼굴로 주위의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강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곧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각종 장식들과 네온사인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성탄의 노래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끝없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이 절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2,000년 전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로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섬김을 받으려하는 마음을 버리고 섬기는 삶을 향해 달려갑시다. 대속의 봉사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읍시다. 

그리고 주님의 희생의 사랑을 주위의 오이코스들에게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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