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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제들아 너희 중에 (약 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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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아 너희 중에 (약 5:12-20)


얼마 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 마돈나가 비난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두 살 위의 오빠가 1년 전부터 노숙자가 되어 다리 밑에 기거하면서 빈 깡통이나 페트병을 모아 팔면서 입에 겨우 풀칠을 하고 있는데, 마돈나는 7천억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조금도 도와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오빠는 우연히 만나게 된 어느 기자에게 "억만장자인 여동생을 두고서도 길거리에서 찬이슬을 맞으면서 지내느냐는 비아냥거림을 진절머리 날만큼 듣고 있다."고 하소연을 함으로써 그 사실이 순식간에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미국 사회는 형제자매 사이라 할지라도 경제적으로는 서로 철저하게 독립적이지만, 그런 미국인들조차 자기 오빠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위험에 빠졌는데도 외면하고 있는 마돈나에 대해서는 다들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혈육 사이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적어도 기본만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형제 사이에도 그런 기본적인 인륜이 있다면 영적 형제지간인 성도들은 더욱 그러한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일깨워 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끝맺는 마지막 부분이 좀 특이한 형식으로 종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서신서들은 대체로 '긴 문안의 인사'나 '성도와 교회에 대한 축복기도'로써 결론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끝까지 실제적인 신앙생활의 문제를 다루면서 특히 '신앙의 형제자매 된 성도들 사이에서 지켜져야 할 윤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의 신앙은 이러이러한 구체적인 행실들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데, 특히 한 교회 안의 형제들끼리는 이러이러한 행실로써 서로 사귀는 것이 곧 너희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마지막 인사말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런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 성도들 사이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신행일치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앙의 형제는 '말의 신의'를 지킴으로써 서로 화목하며 교제합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에 "12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자기 편지의 수신자 성도들을 향하여 "내 형제들아"라고 극히 친근하게 부르면서 마지막 결론적인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above all)라고 강조하면서 "맹세하지 말지니"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함부로 맹세함으로 짓는 죄'를 바로 앞에서 언급된 '부의 교만'이나 '인내하지 못하는 죄'에 비해서는 비교적 가벼운 죄라고 결코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은 그저 이제 서신을 종결하려는 마당에 와서 '끝으로'(finally)라는 말 대신에 쓴 표현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한데, 실제로 사도 바울 역시 같은 식으로 편지를 종결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여기서 야고보가 '맹세하지 말라.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는다.'라고 엄명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율법에 의하면 맹세 자체를 금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거짓 맹세"(레 19:12)를 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가 남발되고 그 맹세마저 어기는 사례가 빈번해지자 당시 유대인들은 좀 약해 보이는 대상들 즉 '하늘'이나 '땅' 혹은 '자신의 머리' 등을 두고 맹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그 맹세의 대상이 덜 성스러운 것일수록 그 구속력도 더 약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어겨도 책임이 덜한 것이라는 식으로 둘러대었습니다(마23:16-22).
즉 자신이 맹세를 어기게 될 경우를 미리 대비하면서 적당한 맹세의 대상을 골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아예 맹세 그 자체를 하지 말라고 마태복음 5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주님의 금령은 이 야고보서에 기록된 맹세 금지 명령과 매우 유사한데, 곧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4-37)는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다시 한 번 반복강조해서 경고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은 모든 종류의 맹세와 서약을 다 금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태복음 23장 16절부터 22절까지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내용을 보아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여러 곳에서 일종의 맹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9; 고후 1:23; 11:11; 빌 1:8; 살전 2:5,10).
  
그렇다면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중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과 야고보가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라"는 말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즉 신자는 평소에 자신의 말에 대하여 신용을 쌓아 둠으로써 무언가 어떤 중요한 사실을 두고 남에게 말할 때에도 맹세 따위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신빙성을 가지게 되면 그 신자의 '예'는 아무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예'일 뿐이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아니오' 역시 무슨 공증을 받고 변호사를 세우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아니오'일 뿐임이 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그 상대방이 내게 "그 말이 정말입니까?"라고 되묻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평소에 자신의 말에 대하여 신용을 쌓아 두지 못했다는 증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어떤 사실을 두고 자신의 입장을 긴 말로 설명을 해야 하거나 상대방을 믿게 하기 위해서 '강력한 맹세'까지 동원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평소에 거짓말을 많이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성도에게 항상 진실한 말만 해 온 신자라면 그저 '예'면 "예"라고, '아니오'면 "아니오"라고 딱 한마디만 해도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이상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예'와 '아니오'라는 이 두 단어만 가지고서도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가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 안에서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의 형제들끼리 진정 화목하는 교제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이부터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피차 '말의 신의와 진실'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딴 말을 하는 사람'은 형제는커녕 친구도 될 수 없으며 가까운 이웃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온갖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교회 안이지만 이처럼 평소부터 피차 '말의 신의'를 지킴으로써 서로 '믿을 수 있는 형제'처럼 교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형제는 '합심 기도'를 통하여 피차 약할 때 서로를 도와줍니다.

13절 이하 18절에 "13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18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람은 고난당할 때는 우울하고 절망에 빠지기 쉽지만 신자는 그럴 때일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처럼, 고난 중에는 즉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신자에게는 어떤 조건반사와 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 즉 주변의 교우들 가운데 고난당하는 자가 있을 때에도 철칙으로 적용됩니다.
즉 여기서 야고보는 신자의 기도생활 중에 특히 서로가 서로를 위해 드리는 '대신 기도' 혹은 '합심 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형제 중에 "병든 자"가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장로들이 교회 대표로 찾아가서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실용적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기름은 그 당시 사회에서 대표적인 약품이었으며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4)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즉 병자가 생기면 모든 의학적인 수단을 다 동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그 말 자체는 조금도 틀린 것이 아니지만 이 본문에서의 기름이 꼭 그처럼 '치료의 약재'로 쓰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의학적 지식으로도 그렇지만 그 당신만 해도 기름이 무슨 '만병통치약'으로 쓰인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해석으로는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에 침을 뱉거나 진흙을 바르고 안수하시거나 혹은 귀머거리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그 혀에 손을 대셨던 것처럼 '병 고침을 받는 사람의 신앙을 고무시키기 위한 행위'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혹은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구별되었던 것처럼, 병자에게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을 받게 된 것을 상징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해석들에 대해서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명백하게 중요한 것은 바로 "주의 이름으로" 그 기름을 발랐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 병자를 위해서 합심기도를 드리는 자들의 '믿음 상태'가 더욱 본질적인 요소임을 보여 주는 말씀인데, 이것은 15절 상반절의 "믿음의 기도"라는 언급을 통해서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즉 형제 성도가 병에 걸리는 등의 어떤 연약에 빠지면 그 교회에 속한 모든 다른 성도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해야 함'이 가장 중요한 강조점인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그 기도는 반드시 효험이 있어 그 병든 자를 "구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육신의 병에서 "일으켜" 주시는 신유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모든 병이 다 어떤 죄값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어떤 병이 "혹시" 본인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주어진 것일 경우에도 바로 그런 기도를 통하여 "사하심을 얻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병 고침을 받는 효험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즉 성도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 제목은 가장 기본적으로 '육신의 병'에서부터 '영적인 실족과 죄'에 이르기까지 실로 인생의 전 영역에 걸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 상반절에서도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란 말씀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는 이 전체 문맥에 연결해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즉 이 말씀은 신자들끼리 서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는 따위의 뜻이 결코 아니라, '형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내용'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아프고 괴롭고 골칫거리인 죄에까지 이를 정도로 포괄적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신자들은 비단 육신의 병뿐 아니라 자신의 영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솔직히 터놓으면서 서로에게 기도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고 또한 합심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정도로 '깊고 가깝고 수준 높은' 형제 사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16절 하반절에 "의인의 간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의인'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때로는 형제에게까지 자기 죄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회개할 줄 아는 성도가 될 때 그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 칭함을 받기에 부족함 없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성도들끼리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실로 "역사하는 힘이 많은" 의인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엘리야 역시 동일했다고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가 철인이고 초능력자라서 그런 특별한 기도의 능력을 발휘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엘리야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즉 똑같은 육신의 고통도 느낄 줄 알고 욕정의 충동도 받고 자범죄를 짓기도 하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간절히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가뭄이 오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했던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형제'들은 서로를 위해 간구해 줄 때에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이 놀라운 '기도 응답의 능력'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의인에게 부여된 엄청난 특권이요 형제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형제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직접 병문안을 가거나 꽃다발을 보내거나 조의금을 보내는 것보다는 정성이 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는 말씀을 믿지 않는 엄청난 과소평가인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더욱이 신앙의 형제된 성도끼리는 바로 기도를 통하여 서로의 걱정과 근심과 고통과 괴로움을 '반으로 나눌 줄' 알아야만 합니다.
육신적 문제뿐 아니라 가장 어려운 영적 문제까지 털어 놓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줌으로써 피차 제일 크고도 요긴한 도움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의 형제는 '실족한 교우의 믿음을 회복시킴'으로써 함께 구원의 완성에까지 이릅니다.

19절과 20절에 기록하기를 "19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또다시 "내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너희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일반적인 축복 대신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스스로 심호흡을 하면서 '너희들은 미혹당한 형제를 돌아서게 하라'고 간곡히 권면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미혹을 당한 자'란 불신자가 아니라 "진리를 떠난 자" 곧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한 교우를 가리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자기 형제 된 교우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요 또한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야고보는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형제 앞에서 서로를 낮추는 것, 구제해 주는 것, 말조심하는 것,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들 역시 다 아름다운 선행들입니다.
하지만 형제를 통해 제일 덕 볼 수 있는 일, 형제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은 바로 한 형제가 실족한 다른 한 형제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 형제의 목숨을 건져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해 내는 일이란 한 교회 안에서 형제 된 교우들 사이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기적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허다한 죄를 덮는 일"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죄를 덮다'라고 하는 표현은 '있는 죄를 숨겨 주다'는 뜻이 아니라 '지은 죄를 용서받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누가 다른 한 형제의 신앙을 회복시키면 그 상으로 본인도 지난날에 지었던 죄를 다 용서받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허다한 죄가 덮임'을 받게 되는 자는 "사망에서 구원받게" 된 자 바로 그 '미혹당했던 형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곧 그 구원받는 사람의 '죄 사함' 받음과 그대로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형제를 그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여 구원받게 만들면 그것은 곧 그 형제가 지은 수천수만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엄청난 일을, 그 형제를 회개시키고 회복시킨 그 단 한 번의 도움만 가지고도 몽땅 해결하게 해 주는 최고의 선행이 되는 셈입니다.

야고보가 바로 그런 '형제지간의 선행'을 그의 서신 제일 끝에 기록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파선 일보 직전에 있는 형제를 굳게 붙잡아 주고 이미 파선 상태에 빠진 형제에게도 끝까지 손을 내밀어서 결국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회 안의 형제 사이에서 나누어질 수 있으며 또한 나누어져야만 할 '최고의 형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환난이나 이단의 유혹을 받아서 '진리를 떠나 버린 형제'를 볼 때마다 그 교우를 다시 '돌아서게' 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아예 내 몸을 내던지는 자세로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형제다운 형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자기 형제자매가 중병에 걸려 죽어 가는데도 '나 몰라라.'하고 팔짱만 끼고 앉아 있다면 그게 어떻게 '같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혈육'일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형, 누나, 오빠, 언니, 남동생, 여동생이 사고를 당해서 피를 쏟으며 땅에 쓰러져 있는데도 구급차도 부르지 않고 그냥 다른 구경꾼들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진짜 자기의 형제자매라면 비록 의사는 가망 없다고 사망선고를 내린다 해도 다른 병원으로 데려갈 것이고, 남들이 이미 죽었다고 해도 믿지 않고 그 입에 대고 인공호흡을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누고 형제가 된 교우에 대하여 너무나도 일찍 포기하는 악습에 젖어 있습니다.
'시험에 빠진 형제', '사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형제'를 바로 곁에서 보면서도 실로 어처구니없게도 그냥 수수방관만 하는 것입니다. 
  
매주일 수십 명의 새교우들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고 있지만 '새신자 교육'에 참석해 보기도 전에 '돌아서는' 교우들이 바로 여러분이 속한 교구 안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생활을 몇 년 이상 한 후에 무슨 시험에 들어서 낙심을 하고 오랫동안 '장결자'로 남아 있는 교우들이 바로 여러분과 같은 구역 안에, 같은 전도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알고나 계십니까?
그런데도 그처럼 '진리를 떠난' 안타까운 형제자매들을 심방하고 권면하기는커녕 전화 한 통 걸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교역자'들이나 해야 할 일이라고 온통 떠넘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진짜 형제지간이라면 절대로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우리가 아주 태연하게, 범상하게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 형제 사이에는 서로를 사망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힘, 허다한 죄를 덮어 줄 수 있는 힘, 정말이지 엄청난 능력이 주어져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혹된 형제를 다시 생명의 길로 돌아서도록 이끄는 이 가장 강하고도 따뜻한 형제의 손길을 통하여 진정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가장 큰 사랑을 꼭 체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이런 수준에 이르기까지 형제와 깊이 그리고 뜨겁게 사귀어야 합니까?
그것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는 말씀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앙의 형제 사이에서도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려움을 당한 형제의 고난을 위해서 합심으로 기도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영혼을 두고 '기도의 골방'에서 간구를 하겠습니까?
같은 교회의 교인이었다가 이제는 죽어가고 있는 형제의 영혼을 안타깝게 여길 줄 모르는 자라면 보이지 아니하는바 하나님의 내세를 믿는 자일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앙의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라야만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 역시 확실히 믿고 있는 신자임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형제자매'는 주님께서 우리의 금세에 허락하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형제끼리는 말 한 마디에도 서로 한 점 의심할 것이 없는 신의의 교제, 가장 어렵고 개인적인 문제까지 서로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면서 함께 기도해 줄줄 아는 사이, 아니 상대 형제의 목숨을 내 목숨처럼 귀히 여기며 그 영혼을 끝까지 살려 내기 위하여서라면 무엇이라도 다 바칠 정도로 뜨거운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 진실히 사귀고 기도로 힘껏 도우고 서로의 영혼까지 보살피는 이 진실한 '예수 형제자매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는 경향교회를 통하여, 그리고 저 세상에서는 천상교회를 통하여 영원히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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