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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의 사귐과 나눔과 기쁨 (롬 15: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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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의 사귐과 나눔과 기쁨 (롬 15:22-33)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널리 알려지자(롬1:8) 그들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롬1:11) 피차에 안위함을 얻으며(롬1:12) 다른 이방인 교회에서 거둔 것과 같은 열매를 로마 교회에서도 맺기 위해 여러 번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롬1:13).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로마서를 쓰며 그 머리 부분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롬1:10-13로 돌아가 읽어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가 언급하고자 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교리에 대한 설명을 사실상 다 마치자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희망과 계획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합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한 것은 거기에 오래 머물기 위해서나 거기를 궁극목적지로 삼아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궁극적으로 가기를 원하는 곳은 서바나 곧 스페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에 가서 눌러앉아 전도를 하거나 목회를 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바로 앞서서 쓰기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 한 것과 일치하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오늘 본문 23절에서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고 썼습니다. “이 지방”이란 롬15:19에서 읽듯이 그가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의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선교의 지경을 넓혀 일루리곤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한 바울에게 있어서 이제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로마인데 로마에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들이 생겨났으므로 그가 일할 곳으로 남은 지역은 로마를 넘어 서쪽 끝에 있는 스페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로마 제국 내에서 비교적 새로 개발된 지역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이미 저명한 시인, 극작가, 저술가 들을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페인이 새로운 세계이기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뜻을 품었을 것이고, 또 높은 지적, 정신적, 문화적 토양의 땅이기에 거기서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리라 생각하여 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25-28절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은 가난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에서 거둔 연보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는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같은 도시들이 있는 그리스 북쪽의 지역이었고, 아가야는 아덴이나 고린도 같은 도시들이 있는 그리스 남쪽의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일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거둔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은 사도 바울에게는 스페인으로 가는 일을 잠시 연기할 가치가 있을 만큼 중요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둔 연보이니만큼 지체하지 않고 빨리 전달해야 했을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유대와 일치감을 공고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방인 교회에 대하여 의구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예루살렘의 교회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마음을 보다 활짝 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향해 품은 사랑의 열매를 확실하게 전달한 다음에 로마에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먼저 들렸다가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려한 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계획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글 속에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귀중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지역과 족속의 벽을 넘어서서 주 안에서 갖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2-24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그토록 만나고 싶어 몇 번이고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들과 사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과 만나 사귀면 기쁨을 가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자기를 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그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한 주님 예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나눔의 정신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로마의 성도들과 만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을 충만히 그들과 나누게 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 충만한 복을 그들과 너무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본문 32절에서는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러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그들에게 기쁨으로 갈 것이라 하고, 자기로 하여금 그들과 편히 쉬게 하라는 부탁까지 합니다. 참으로 편안하게 도움도 청하며 서로 나눌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며 그들이 기도로 자기의 사역에 동참해줄 것을 구하기도 합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예루살렘 행이 위험한 길임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행20:22-23에 보면 그 자신이 말하기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신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인 로마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이라고 얕보지 않았습니다. 동등하게 사귀고 모든 것을 꼭 같이 나누는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은 또 어떻습니까? 본문 26-27절을 다시 봅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과 족속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기쁨으로 연보를 한 것입니다. 나누기를 기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먼저 예루살렘의 성도들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빚을 졌고 그들에게서 영적인 것을 나누어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았으니 주기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으로든 물질적인 것으로든 서로 나누며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귐과 나눔과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글을 본문 3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는 기원으로 끝냅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평강을 주실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누리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을 말한 후에 기원하는 평강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첫 번째 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형이 아우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쳐 죽인 일 아닙니까? 형제 사이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사귐과 나눔과 기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목과 원수짐과 싸움과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습니까? 서로 사이에 이기주의의 높은 담을 쌓고 상호의 무관심과 의심과 불안과 경계 속에 살아온 것 아닙니까? 한 마디로 평강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이 역사 속에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벽을 치우시고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사이의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평강의 관계를 다시 세우시려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우리에게 사귐과 나눔과 기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를 고대하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깊이 묵상하는 이번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교우들 사이에, 교회와 우리 사회 사이에 평강이 회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이념적으로, 계층 간에, 한미자유무역 협정 때문에 갈리고 대립하는 정치세력들이나 국민들 사이에서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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