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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에 합당한 자 (살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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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자 (살후 1:11-12)  

< 사람마다 부르심이 다릅니다 >   

저는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10-15시간 가도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희망 때문에 얼마든지 참습니다. 또한 기도하고 묵상하면 그 시간도 금방 지나갑니다. 특히 이륙하고 착륙할 때가 좋습니다. 이륙하고 착륙하는 모습을 보면 무엇인가 경이로운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직항보다 값도 싼 경유 비행기가 더 좋습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비행기 타는 것이 고역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이렇게 취향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소명도 다릅니다.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소명이 있습니다. 남이 될 필요가 없고, 내 일을 남의 일보다 비천하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일로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입니다. 문제와 갈등을 극복하고 자기를 극복하려면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소명은 자기 장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소명을 받으면 그때부터 자기의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몸과 마음도 자기 것이 아니고 물질과 시간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강한 자기 부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근처의 마을에 매인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인이 왜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 했습니다(눅 19:31). 그래서 한 번도 쓰임 받은 경험이 없던 나귀 새끼도 주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소명은 경험이 많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에 있으면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는 능력이 없어서 어떤 직분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자리로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그 자리를 맡아야 합니다. 사명과 소명은 다릅니다. 사명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깨닫는 것이기에 자기가 느끼고 확신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이지만 소명은 주님의 부르심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없어도 주님의 뜻에 최대한 순종하면 어려운 길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고 그때 진정한 헌신도 가능합니다.   

참된 헌신은 2차 계획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할 때는 ‘비상구’란 표지판을 제거하십시오. 비상구가 있으면 값을 치르기보다는 비상구로 탈출하려는 유혹이 계속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헌신은 생명을 초월한 것이었고 자기 계획이 무산될 경우 기댈 만한 2차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소명의식을 가지고 2차 계획이 없을 정도로 헌신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인생의 높은 고지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 부름 받은 자의 자세 >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기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부르심도 중요하지만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행복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선을 기뻐함과”라고 했습니다. 소명 받은 자는 맡은 일을 하면서 행복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과 행복을 동시에 생각하십시오.

어떤 엄마는 자녀를 좋은 대학 보내려고 매일 인상 쓰고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며 자녀와 씨름합니다. 좋은 대학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강대국 틈에서 우리 민족이 살아남아 1대 2의 비율로 일본인을 상대하고 1대 20 비율로 중국인을 상대하는 길은 실력밖에 없음을 알기에 그렇게 대학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재의 행복이 말살될 정도까지 대학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대학 공부보다 행복 공부가 앞서야 합니다. 대학을 나왔는데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지 못해 가정이 불행하고, 인간관계를 못해서 갈등과 상처와 스트레스로 늘 위장병을 달고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공부의 목적은 결국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왜 말씀을 공부합니까? 역시 말씀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은 부흥회를 갔다 와서 신실함이 깊어지기보다는 자기 담임목사가 시시해 보이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부흥사가 자랑하는 최고의 개그 만담과 수십 년째 써먹는 감동적인 몇 편의 예화만 단편적으로 듣고 감격해서 자기 담임목사를 못난이 취급하는 분별없는 사람은 사실 부흥회에 안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모습은 인생전체와 교회생활 전체로 보면 큰 손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가대 지휘자는 성가대원들이 노래를 못한다고 무섭게 화를 냅니다. 그러자 성가대원들도 다 마음 졸인 채로 우거지상을 하며 노래합니다. 그러면 그 성가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합니다. 불행한 얼굴로 잘하는 것보다 차라리 행복한 얼굴로 못하는 것이 낫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예배당 걸레질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도 기쁘게 노래하며 합니다. 그러면 본인도 행복하지만 보는 사람도 행복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기쁘고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언제나 일보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우리의 손길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진척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일을 돕겠다고 하기 전에 먼저 은혜 많이 받고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교회와 목회자를 최고로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제일 힘이 빠질 때는 성도가 불행하게 살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처럼 소명 받은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2. 십자가를 기쁘게 져야 합니다  

본문 11절 하반부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역사와 능력이 언제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좁은 길을 선택할 줄 알고 과감히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최대의 일은 십자가에서 죽고 사는 일이었습니다. 그처럼 성도의 최대의 일도 전도, 선교, 봉사 이전에 십자가에서 죽는 일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일하는 것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일을 하면 낙심도 잘하게 됩니다. 자기를 나타내려는데 뜻대로 안 되고 게다가 누가 뭐라고 하면 금방 낙심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 말은 그가 사람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사람 때문에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온전히 십자가를 지십시오.  

어떻게 기쁘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그 마음을 주장해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나중에는 도마도 봤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소명을 버리고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지상 최대의 기적을 체험해도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자신을 드리는 성령 체험을 하면서 그들은 위대한 전도자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하자 베드로는 “남이 다 배반해도 저는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처럼 십자가는 자신의 힘과 장담으로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힘을 주셔야 합니다. 그처럼 성령님이 임하면 그때는 부인하려고 해도 할 수 없고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를 고백하며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그처럼 성령 안에서 죽음을 고백하는 십자가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강단은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특히 부흥회라는 이름을 빌어 애굽을 바라보게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내용에는 예수님의 정신이 없이 거의 개그 수준의 얘기로 가나안 땅이 아닌 애굽을 바라보게 만드니까 많은 한국 교인들이 여전히 사막 가운데 헤매는 것입니다.   

물론 광야에서 헤매다 죽어도 천국은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이제 예수님을 믿을 때 자존심과 세상 욕심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심령이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로 채워지게 하십시오. 물질도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추구하되 욕심을 채우려고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예수님의 정신도 없이 많이 가지면 오히려 불행의 가능성이 커지고 나중에 하나님한테 종아리 맞을 가능성도 커집니다.   

성도가 가진 물질은 누구 것입니까? 자기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것입니까? 그러면 많은 교인들은 자동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나 차라리 “제 것입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낫습니다. 말로는 “하나님 것입니다.”라고 해놓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조금 쓰고 자기만 위해서는 펑펑 쓴다면 그 위선 때문에 더 종아리를 맞으니까 차라리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합니다. 물론 진짜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라 욕심을 덜어내는 문제와 하나님의 주권 문제에 진지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 체험의 가장 뚜렷한 증거인 십자가 신앙도 없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면 차라리 축복을 많이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많이 축복 받아서 종아리 맞을 일만 많이 하면 그게 무슨 축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이웃과 나눌 각오가 없다면 차라리 조금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런 소극적인 삶보다는 십자가 신앙으로 철저히 무장한 후에 많이 축복 받고 많이 나누십시오. 

어느 날,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는데 한 걸인이 옷을 구걸했습니다. 그때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제자들아! 오늘 우리들의 옷 임자를 만났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가 우리들의 옷 임자입니까?” 프랜시스가 걸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분이 우리의 옷 주인이니 빨리 옷을 벗어드리자.”  

그때 제자들이 다시 말했습니다. “선생님! 왜 저가 우리 옷의 주인입니까?”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너희 옷은 누가 주었는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분에게 주기를 원하시니까 그분이 우리 옷의 임자다. 이제 우리 모두 옷을 벗어드리자!” 그러자 제자들이 옷을 벗어주면서 프랜시스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언제쯤이나 선생님이 가진 십자가의 영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성령 충만은 십자가를 지고 나누는 삶으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필요한 자에게 자기 것을 힘껏 나눠주었습니다. 부자라고 물질을 자랑하고 고가 사치품을 걸치고 으스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종아리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자가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이 물질이 그에게 필요한데 내가 가지고 있구나! 빨리 건네주자!”라고 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축복과 행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 이단들이 많습니다. 종말론으로 두려움을 심어서 영혼을 약탈하거나 각종 무속신앙과 예언을 빙자한 점으로 영혼을 약탈하는 사람도 이단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애굽만 바라보게 하고 영혼을 광야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이단만큼 나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힘써 나누는 삶을 실천하십시오. 그처럼 십자가의 영성을 가지고 좁은 길을 가기를 기뻐할 때 조만간 그의 앞에는 시온의 대로가 펼쳐질 것입니다.
  

3. 높은 고지를 점령해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이름이 너희 중에 영광을 받고 너희도 주님 안에서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영광스런 자리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동기로 그 영광스런 자리를 추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부와 권세를 구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많은 이웃을 도우려고 부와 권세를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축복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축복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축복을 선용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인간사회도 건강해집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물에 섞인 0.4퍼센트의 소금 때문입니다. 그처럼 0.4%의 의인만 있어도 그 사회는 썩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성도가 전 인구의 25%나 되는데 왜 사회는 아직도 어둡습니까? 그 이유는 축복을 원하는 성도는 많지만 축복을 선용하는 성도가 적기 때문이고, 또한 높은 고지를 점령한 의로운 성도가 적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평지보다 고지를 점령해야 합니다. 군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고지는 평지보다 3배의 전력증강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지를 빼앗기고 영성으로나 지성으로나 인격으로나 위치로나 평지에만 깔린 성도만 많으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 말은 남을 학대하라는 말이 아니라 고지를 차지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라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낮아지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낮아지라는 말씀에는 깊은 숨은 전제가 있습니다. 누가 낮아질 수 있고 낮아져야 합니까? 높은 사람입니까? 낮은 사람입니까? 물론 둘 다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 낮아질 수도 있고 낮아져야 할 당위성이 큽니다. 낮은 사람은 이미 낮은 존재이기에 사실상 더 이상 낮아질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공부 못하는 학생이 “저 공부 잘 못해요.”라고 하면 겸손한 태도를 가졌다고 해서 칭찬해줄까요? 아닙니다. 사실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 “저 공부 잘 못해요.”라고 하면 겸손한 태도를 가졌다고 해서 칭찬해줍니다. 하나님은 후자 학생의 모습을 가진 칭찬 받는 심령을 원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낮아지라는 명령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고단자가 되고 겸손한 음지의 고수가 되고 음지에서 겸손하게 활동하는 부자 및 권력자가 되라는 전제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라고 한 것은 ‘실력을 낮추라는 것’이 아니라 ‘자세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력도 갖추고 내공도 갖추고 최선을 다해 부와 권세도 갖출 수 있기를 힘쓰십시오. 그 후에 가식이 없는 겸손한 자세로 자기 것을 선하게 나누십시오. 바로 거기에서 선한 영향력이 나오게 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누가 높으냐?”는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합니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것은 세상 욕심이니까 버리라고 하시는 구나?” 그러나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탓한 것은 ‘높아지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높아지려는 잘못된 동기’입니다. 즉 그들이 섬기려는 목적이 아닌 섬김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높아지려고 한 것을 탓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후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 그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은 발을 씻겨주라는 명령에만 관심을 기울이지만 사실 그 말씀에서 더욱 중요한 초점은 예수님이 “노예상태에서 발을 씻겨주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주와 선생이 되어 발을 씻겨주라!”고 명령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존재가 낮아져서 섬기는 것보다 높은 존재가 낮아져서 섬기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노예가 된 비참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여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선생과 주인이 된 상태에서 허리를 숙여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처럼 높은 존재가 되어 섬기는 꿈을 가지고 각계의 높은 고지를 점령하려고 하십시오. 성령을 체험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높은 고지를 차지하면 얼마나 세상이 밝아지겠습니까? 만약 스데반 같은 사람이 이건희 회장 자리에 있고 바울 같은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있다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복된 나라가 되겠습니까?  

목회자만 성직자가 아니라 모든 성도는 다 성직자입니다. 사업가는 사업이 성직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하고, 학생은 공부가 성직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하고, 연로하신 분은 기도가 성직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하고, 그처럼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고지를 점령하십시오. 또한 선한 동기를 가지고 권력과 인맥과 물질도 추구하십시오. 그것들을 세속적인 것들이라고 외면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차지합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밑바닥을 한참 기고 있고 불의한 사람들이 윗자리를 다 차지하면 그 사회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제 거룩한 꿈을 위한 고지 점령을 자기 소명으로 여기십시오. 예를 들어, 학생에게 공부는 단순히 공부가 아니라 소명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학생은 반항적으로 질문합니다. “목사님! 공부가 인생의 전부입니까?” 어떻게 보면 진리를 추구하는 질문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런 질문은 대개 게으른 자의 자기변호를 위한 질문입니다. 물론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학생은 공부가 마치 인생의 전부인 양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쓸모 있는 나무로 준비될 수 있습니다.  

가끔 학생들 중에 가정 형편으로 대학 대신 바로 사회로 진출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장인의 길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이 몸담은 분야와 계통에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땅을 정복하고 고지를 정복하십시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어려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십시오. 
  

< 인물이 되거나 인물을 만드십시오 >   

마지막으로 고지 점령의 사명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고지 점령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힘써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즉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해주어야 합니다. 거룩한 꿈과 비전을 향해 달리는 사람에게 자신의 여력이 닿는 대로 힘껏 돕는 것도 소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성도는 인물이 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인물을 만드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미국에 세계적인 복음전도자가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입니다.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 대체로 내용이 평범합니다. 그래도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남을 인정해주는 주변문화의 덕을 본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활동했다면 아마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렇게 큰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 문화는 인물을 키우는데 아주 인색합니다. 자신이 너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높은 나무로 올라가면 밑에서 자꾸만 나무를 흔들어댑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서 떨어지면 그 다음에는 떨어진 사람을 짓밟습니다. 그러면서 아픈 배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고 10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처럼 정상에 올라가면 너무 비바람이 세서 한국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크게 되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순신도 모함을 받았으니 이런 인간성이 어디서 온 인간성입니까? 

시대가 어렵다면 인물을 키우는데 혈안이 되어야지 인물을 쓰러뜨리는데 혈안이 되면 안 됩니다. 이제 앞서가는 사람이 전반적으로 바른 길을 지향하면 약간의 부족함이 보여도 기쁘게 박수를 쳐줄 줄 아는 성도가 되십시오. 자신에게 앞선 사람들의 장점보다 단점을 부각시켜 보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면 힘써 고치십시오. 그리고 앞선 사람을 보면서 그를 통해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는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더 나아가 누군가 거룩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희망의 길을 열심히 개척하고 나가면 소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꿈과 비전을 그에게 투사해서 그를 은밀하게 힘껏 도우십시오. 그처럼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로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고,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선한 동기를 가지고 고지 점령을 위해 애쓰며, 더 나아가 고지 점령을 위해 애쓰는 분들을 힘써 격려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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