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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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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13)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지난 주일 로마서 12장 1, 2절을 본문으로 교회란 무엇이며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함께 예배당 밖을 나서면서 시작하는 또 하나의 예배 즉 나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로마에 있든 고린도에 있든, 2천년 전에 있던 교회이든 지금 옥스포드에 있는 우리 교회이든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나 지금이나 모두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한 주간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도록 힘써 살았습니까?   예배하는 삶 이것이 이땅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전도의 열매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1년6개월을 머물며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며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행18장).   바울이 개척했던 여러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많은 사랑과 관심을 기울인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첫 머리에서 문안인사를 한 후 곧장 근심스런 어투로 교인들을 책망하며 권면합니다.   

고린도는 아테네 서남쪽에 있는 항구도시였고 그리스에서 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국제도시였습니다.  작년 가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난민 사역을 하시는 양용태 선교사님의 목사 안수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고대 고린도의 유적지를 방문하여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반 역사를 통해 잘 아는 것처럼, 고린도는 아폴로 신전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아름답고 웅장한 대리석 석조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항구를 향해 곧게 뻗은 포장도로는 화물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빠르게 질주할 수 있도록 넓고 탄탄하게 건설되었습니다.  번창한 항구도시로 교육과 문화, 경제 등 생활수준이 높았던 지역이지만 빈부차가 심하고 타락한 윤리생활로 악명이 높은 도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런 환경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런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세속도시 고린도의 다양한 사회 문제들 만큼 교회 역시 복잡한 문제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신앙 공동체이긴 하지만 그안에 신앙적, 윤리적 혹은 인간관계 등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문제들을 다 가졌다고 할 정도로 복잡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는 학문의 도시 옥스포드 못지않게 고차원적인 헬라 철학에 심취한 지혜자들이 많이 있어 날마다 학문을 토론하며 지혜를 자랑하였고,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 분위기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도 받았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오락가락하며 확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믿음 좋다는 형제들에게 비난을 받아 마음에 상처를 입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식은 예수께서 살과 피를 나누어주심으로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은혜의 식탁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이 귀한 예식조차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뉘어 끼리끼리 모여 먹고 마시는 기막힌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가 되라 하셨는데 자기들끼리 예수님을 갈라놓은 셈입니다.   교인들이 각각 받은 은사를 따라 봉사를 하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받은 은사가 남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라 자랑하며 서로 자기를 앞세우는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선포되었지만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복음의 중요한 핵심을 흐려 성도들을 혼란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로부터 들려오는 복잡한 문제들은 믿음의 아버지 바울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아직 어린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다 자란 줄 오해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고 자기들끼리 서로 옳다고 우기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제대로 이끌어 줄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분오열로 마음이 갈라진 교회를 보는 바울의 마음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다투기를 일삼는 자녀들을 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괴로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 오늘날의 터어키 지역이고 바울의 시대에는 아시아라고 불렀던 에베소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장이라도 고린도를 방문하여 꾸중할 것은 꾸중하고 시정할 것은 시정하고 싶었지만 아직 에베소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어 떠날 수 없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방문하기로 하고 우선 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정리하여 편지로 가르침을 전달하였습니다.  이 편지가 우리가 지난 주간에 성경일독을 하며 읽은 고린도전서입니다.   

오늘 읽은 13장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지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사랑의 찬가입니다.  우리도 오늘 불러보았지만 결혼식 축가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시편입니다.  어떤 결혼 주례사가 이 말씀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고 부부의 사랑이 이 말씀처럼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사랑이 결혼하는 부부들만을 위한 사랑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를 처음부터 자세하게 읽으신 분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이 사랑은 교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라 부르는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사랑의 덕목들입니다.  이 노래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 교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랑입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비방하며 네편 내편으로 갈리어 다투고 있을 때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을 선포합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교우들에게 안부를 묻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 다음 곧장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10) 당부하였습니다.   바울이 긴 편지를 쓰며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다룰 때 계속 강조했던 한 가지 주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 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가 되라는 부탁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 막힌 담을 헐고 굳게 잠긴 마음의 문을 열어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비방하며 다투고 갈라섰습니까?    갈라진 마음, 피차 과격한 말을 주고받아 피흘리며 흐느끼는 마음의 상처를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이 부족하고 사랑이 없어 다투고 갈라섰으니 사랑 외에는 다른 치료약이 없습니다.   

어디서 그 사랑의 약을 구할까요?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사랑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요?    남여간의 사랑이 불타는 듯 강렬하지만 그 사랑이 어디 영원하고 완전하던가요?   친구의 우정도 형제간의 우애도 조그만 이해관계 때문에 깨어지고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도 때로는 자식에 대한 집착과 편견과 이기적인 욕심으로 망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3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여 그 시신을 방에 방치하고 8개월 간 아무 일이 없다는 듯 지냈다는 끔찍한 소식입니다.   왜 그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답니까?    1등만 강요하는 어머니의 도에 지나친 집착과 끝없는 잔소리와 잠을 재우지 않고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때리는 어머니의 매질을 견디다 못한 아들이 잠자던 어머니의 얼굴과 목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답니다.    아들이 1등을 하고 서울대학에 가야 인생을 성공한다고 부르짖던 그 엄마도 아들을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그렇게 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에는 이처럼 잘못된 사랑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랑과 집착, 사랑과 내 욕심을 분간하지 못하고 자식을 위해 내 인생을 다 걸고 내 삶을 희생한다는 말로 자식들을 끔찍한 지옥에 가두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이라며 아이들을 부모의 욕심대로 몰아갑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식들을 짐승처럼 사육하여 내 자존심을 내세우고 내 명예를 드러내며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부모의 병적인 욕심일 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그것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숭고한 사랑의 모델을 그런 어머니의 사랑, 정신병적인 집착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랑의 찬가는 사람의 사랑이 모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많은 교회라 해서 모든 것을 다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하였으며 그 신앙고백으로 세례도 받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점차 늘어갔습니다.   받은 은사들도 다양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며 천사처럼 듣기 좋은 말도 하고 구제도 하며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거기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재림신앙도 있었으니 내일과 영원에 대한 소망도 분명하였습니다.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소중한 것이 부족하였습니다.   사랑입니다.  예수께 대한 믿음 고백과 재림의 소망은 성도 각자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개인의 신앙에 훌륭한 덕목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믿음과 소망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 하는데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이 각자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어 자랑하며 말하다 보니 서로 의견이 달라 상처를 주고 받으며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학자들이 많이 공부하지 못한 지체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이 없이 자기 지식만 자랑하고 말이 안 통한다며 형제를 무시하고 판단하였습니다.   믿음이 연악한 형제자매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비방하여 연약한 지체들을 시험에 들게 하였습니다.  사랑 없는 눈으로 가난한 형제를 바라보다가 그들의 구차한 생활과 형편을 멸시하고 함께 성찬식 자리에 앉기를 싫어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리스도의 한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교회에서 일어날 일입니까?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이런 일을 하고도 서로 옳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들만 그렇습니까?    오늘날 교회들도 이런 일을 따라 하면서도 전혀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서로 옳다 자기 주장을 고집하며 교회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끝내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 이판사판 끝장을 봅니다.   상대방이 피흘리며 목숨줄이 끊어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짓밟아놓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믿음도 있고 소망도 있어보이지만 그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할 때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처럼 나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내가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하여 산다.   너희도 나와 함께 그렇게 살자’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가 따라야 할 목표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라 하였습니다.   금년만 아니라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따르고 지켜야 할 말씀입니다.   옥스포드 한인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편지 요한일서4장7절, 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란 무엇이냐구요?   하나님이 곧 사랑이십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 그가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로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셨습니다(요일4:11).  

바울은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16:14)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그것이 말씀 전하는 일이든 기도하는 일이든 물질로 봉사하며 남을 위해 시간과 몸으로 섬기는 일이든 그 모든 것을  주께서 본을 보이신 그 사랑으로 합시다.    좋은 믿음은 주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옵니다.  영의 양식을 규칙적으로 그리고 골고루 먹어야 믿음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 중에 기다리며 오늘 만나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누며 섬기고 봉사하는 실제적인 활동이 나 개인과 우리 전체의 믿음을 건강하게 해줍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주님 오실 그날까지 항상 있어야 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문제를 많이 가진 것처럼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그리고 흠이 없이 완벽한 성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을 닮아가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사랑을 훈련하십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먹고, 그 사랑을 힘입어 살며, 그 사랑을 연습하며 서로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교회가 이 사랑을 풍성히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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