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만물의 마지막 때를 사는 지혜 (벧전 4:7-16)

첨부 1


만물의 마지막 때를 사는 지혜 (벧전 4:7-16)

조용한 소도시에 뚝을 넘어서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자동차들이 그 쓰나미에 휩쓸려서 둥둥떠서 실려내려가는 집이 허물어지고 사람들이 아비규환하는 그런 장면이 생략됐는데 여러분이 짐작하실수 있을 것입니다. 

올초 3월 11일 오후 2시 45분 일본 동북부지역을 덮친 쓰나미의 위력을 잠시 영상으로 본 것입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해 봤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안전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 안정된 평화로운 소도시에 갑자기 쓰나미가 몰아닥치니까 뚝을 넘어서 집을 허물어뜨려버리고 빌딩을 뛰어넘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쓰나미가 몰려온다면 안전자리는 견고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재해든 지진이든 쓰나미든 내 인생에 어느날 마지막 종말이 임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오늘 성경 7절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은 최후의 시간, 종말의 때, 말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종말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인 종말이고 하나는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우주적인 종말은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재림하심으로써 이땅에 끝이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환난과 함께 예수님은 재림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것이 우주적인 종말, 지구의 종말입니다. 

그런가하면 개인의 종말도 있습니다. 개인개인의 생명의 연환이 다 다를것입니다. 건강에 따라서, 여러 가지 환경에 따라서, 각자의 생명이 끝나는 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이틀 전인가 저희교회 청년이 승용차를 타고 학교에서 오고 있었는데 고속도로를 달리던차가 탈선을 해서 고속도로 밑으로 전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청년 바로 옆에 있던 청년이 한사람, 즉사했습니다. 다행히 우리교회 청년은 상처도 깊지않고 별로 다친곳이 없어서 곧 퇴원하리라 봅니다. 내가 앉아 있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똑같은 죽음의 자리에 있었는데 누군가는 보호를 받고 누군가는 생명의 끝을 마지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중에 누가 내게 내일이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아침 가족끼리 아침식사를 잘하고 인사를 나누고 저녁에 외식까지 하자고 약속했는데 그날 오후에 보면 영안실에 누워있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 절기는 한해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해 대림절은 오늘 11월 27일부터 성탄절 전날인 12월 24일까지를 우린 교회력으로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대강절, 혹은 구주강림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절기고 동시에 다시오실 재림의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계절이 바로 이 대강절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년 대강절을 맞이합니다만 진정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는 이 지구속에 엄청난 변화와 환난이 있을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쓰나미와 같을수도 있고 지진과 같을수도 있고 화산폭발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또다른 어떤 자연계의 변화일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때에 이런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끝에는 무슨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날 환난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날이 언제일까요. 물론 그날과 그시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아버지만 아시고 천사들과 주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날에 너희주가 임할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일본에 쓰나미가 몰려올 때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설마 이 평화로운 바닷가에 쓰나미가 몰려올까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결국 현실로 닥쳐 온 것입니다. 우린 어찌보면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초림의 때로부터 다시 오실 주님의 때까지 우리는 종말의 시대, 말세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오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아침 이런 질문으로 도전하고 싶습니다. 만약 내 인생이 이런저런 일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면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남은 시간이 일주일 밖에 안됩니다. 그럼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여러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한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런질문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무서운 쓰나미가 내가 사는 동네에 몰려 오도록 예고 되어 있다면 뭘 할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우리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쓰나미가 언제올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잠을 자더라도 거의 깨어 있는 상태로 가수면 상태로 잠을 자야 할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때에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군대 갔다 오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군대에 비상이 걸리면 완전무장을 하고 잠시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수면 상태입니다. 언제든 깨어 뛰어나갈 군장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깨어 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 생애에 이런 어려운 위험이 닥치리라고 예고되어 있다면 서로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부부싸움을 10년씩 해오던 사람들도 계속 싸울까요.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아마 싸움을 그칠것입니다. 서로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재산문제 때문에 이런저런 자기의 이권 때문에 눈에 불을키고 싸웠다면 아마 모든 것을 다 포기 할 것입니다. 종말이 눈앞에 있는데 땅은 뭐가 필요하고 집은 뭐 필요하고 차는 뭐 필요 있어.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서로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 허물을 덮어주는 데 우리는 그 짧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이런 종말이 온다면 사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서 그 사실을 알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쓰나미를 조금만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예고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더 많이 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실제 일본에 쓰나미가 몰려온 순간 한 동사무소 직원은 경고방송을 끝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주민 대피를 위해서 방송을 하다가 자신은 정작 피하지 못하고 쓰나미에 휩쓸려서 떠내려가고 말았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그와 같은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징조를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그 징조를 피하라고 준비하라고 경고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이럴때에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많은 분들이 종말론적인 삶이라하면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장도 나가지 않고 가족도 돌보지 않고 다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이곳에서만 먹고사는 이런것이 종말론적인 삶이 아닙니다. 늘 깨어 있으면서도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내 인생의 종말이 언제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내 모든 삶에 견지할 수 있는 삶, 인내하는 삶,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혹시 아라비안 나이트를 아실 것입니다. 아라바안나이트의 유래를 혹시 아십니까. 다른말로 천일야화라고도 부릅니다. 야화하면 야한 이야기가 아니고 밤에 동화를 이야기해서 천일동안 밤에 동화를 이야기해서 천일 야화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 저도 몇일 전까지 잘 몰랐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 보니까 이 이야기가 나와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인도와 중국을 통치하던 샤흐리하르라는 왕의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형이 동생이 보고 싶어서 중국에 있는 동생을 불렀습니다. 동생이 형을 만나러 오다가 잊은게 있어서 다시 왕국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갔더니 자기 왕비가 흑인 노예와 부정한 짓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동생왕은 분노해서 그 둘을 다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형을 만나러 왔더니 형도 자기 부인에게 배신당한 상태입니다. 형도 결국 자기 왕비를 죽이고 이 형제는 마음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가운데 또 많은 여성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또 배신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여성을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이 형인 왕은 왕비를 맞이하지만 하룻밤 자고나면 그 왕비를 여지없이 죽여 버립니다. 수십명의 수백명의 왕비를 다 죽여 버립니다. 왕비로 간택되었다고 좋아할게 아닙니다. 하룻밤 지나면 죽는 날입니다. 도시의 모든 여인들은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재상의 지혜로운 딸이 스스로 자청해서 왕비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결혼식을 치룬 첫날밤에 이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궁금할 때 딱 끝났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내일 저녁에 또 들려드리겠습니다. 

왕은 왕비를 죽이려하다가 그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서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내일 죽이지 다 듣고나서. 그 다음날 되어서 새벽이 되니까 또 이야기를 중단시켰습니다. 가장 클라이막스가 되면 이야기가 딱 중단되는 것입니다. 다음편은 내일저녁에 또 하겠습니다. 이렇게 흘러흘러 천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왕은 왕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아라비안 나이트 혹은 천일야화라고 이야기 합니다.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종말의 시대에 이 임박한 징조의 시대에 어떤 지혜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몇가지 지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첫째, 깨어 있는 삶입니다. 

7절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는 삶, 베드로는 그것을 첫 번째 지혜로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 힘이되어드리지 못했습니다. 너희가 나와함께 기도하자 그랬는데 육신의 잠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로마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로 왔을 때 그는 칼을 뽑아서 말고의 귀를 떨어뜨리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심문을 받을 때 그는 두려워서 한 계집종의 질문에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종말의 시대에 핍박가운데에 흩어져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말은 올바른 마음을 갖는다 침착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신이라는 것은 조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정신을 차려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흔들리지 말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삶을 정리하고 깨어 있어야 됨을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깨어 있어야 할 시대입니다. 특별히 대강절은 그리스도인들이 한해의 마지막을 맞이하면서 깨어 있는 절기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다고 해서 잠도 안자고 기도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잠을 자더라도 늘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잠을 자더라도 깨어있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버릴 때 거기에 유혹에 넘어지게 되고 결국 인생의 쓰나미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정신을 올바로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만물의 마지막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지혜입니다. 

두 번째 만물의 마지막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두번째 지혜는 뭘까요?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무엇보다도란 어떤일보다 사랑이 우선됨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랑보다 우선이 어디있겠습니까. 사랑이 제일 우선되고 첫째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 보면 여러분 모든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십니까. 가족간에, 성도간에, 이웃간에,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사랑할 때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죄, 사랑받는 사람의 죄가 덮어질 수 있기 때문에 너희는 서로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말씀만해놓고 속으로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우리가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쓴 시대에는 핍박이 있는 시대였습니다. 로마에 성지순례를 가면 로마근교에 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은 지하땅굴입니다. 지하땅굴이 실핏줄처럼 로마시내 지하에 다 파져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굴길이가 얼마나 긴지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거리입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말입니다. 핍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땅굴을 파는데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 450킬로에 이르는 땅굴을 파들어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며 주님의 재림을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터키에 성지순례가는 분들은 저는 가보지 못했지만 갑바도기아라는 곳에 가면 지하 120미터까지 땅굴이 파져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밥을 해 먹고 생활을 하고 아이를 낳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 생활, 지하 땅굴 속에서도 갈등은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지속하다 보니 감정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물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다툴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잘못한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고 벌받는 장소도 유적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여러분 무엇보다 열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뜨겁게 사랑하셔야 합니다. 이 땅에서 정말 많은 이단들의 공격이 있습니다. 아까도 어떤분이 전화했습니다. 예배드리고 나가는데 신천지들이 사러가 사거리에서 진을 치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엄청난 이단의 유혹들이 많은, 또 세속의 위험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어려운 세대를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부부가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어려운 세태를 해쳐나갈 수 있을까요. 가족이 서로 사랑으로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어려운 유혹속에서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 

몇일전 신문에 보니까 엄마가 이혼하고 나서 아들한테 너는 일등해야 한다. 서울대 법대를 가야한다. 얼마나 애를 괴롭히고 골프채로 때렸는지 애가 결국 엄마를 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50여일인가 집에 방치해 뒀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가족이 사랑하지 않으면 이 어려운 세대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세상사람들은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예배는 근사하게 드리지만 그들은 곧 돌아서면 미워하고 증오하고 서로 헐뜯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 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진정한 섬김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서로를 선한 청지기 같은 서로 봉사하라. 사랑이 없다면 그 봉사는 다 엉터리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탄도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사탄도 능력을 행합니다. 병자도 고칩니다. 그런데 사탄이 할 수 없는게 딱 한가지 있습니다. 영혼구원도 못하지만, 죽이는 일을 하지만 사탄은 사랑을 못합니다. 사탄은 미워하고 죽이는 것, 그게 사탄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특권을 가진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좋은 사랑을 왜 안하고 사탄을 따라가려 합니까. 사탄은 미워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사탄의 흉내를 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덮어주고 싸매주고 껴 안아주고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미워하고 증오하고 살인하고 헐뜯고 넘어뜨리는 것이 사탄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사탄을 추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장7절에 보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그랬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성도간에 가족간에 이웃간에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을 향해서 그 사랑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전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세 번째 지혜는 뭘까요? 고난중에서도 즐거워 하는 삶입니다. 13절 14절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오늘 베드로는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받으면 기쁘게 여기고 즐거워 하십시오. 물론 그 당시는 많은 핍박이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가운데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감사하고 찬양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무엇이겠습니까. 직장에 나가서 사업을 할 때도 양심대로 행하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 거짓말 하지 않는 것,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것, 때론 내가 손해 볼 지라도 그리스도 때문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받을 고난이 아닐까요. 

좀 더 나아가서 복음전함으로 받는 부끄러움, 핍박,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당할 고난입니다. 우리가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다면 오히려 여러분 즐거워하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 때문에 우리가 고난받아 봤습니까. 핍박받아 봤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영광의 영이 임할 것이다. 거룩한 영 하나님의 영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우리가 전도자의 삶을 살 때 전도하다가 핍박도 받고 부끄러움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날 내 인생에 종말이 찾아올 때 아니 예수그리스도의 임박한 심판앞에 서게될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제일 중요하고 무엇이 제일 우선일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천년전부터 종말 종말 그러니까 종말이 어디있느냐 2천년이 지나도 예수가 오지 않았는데 그거 우스개소리 아니냐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 지구에 종말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초림의 주로 오신것처럼 반드시 재림의 주로 오실것을 우리에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징조들이 이곳저곳에서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종말에 대해 이렇게 재미있는 비유를 했습니다. 어느극장에 코미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관람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극장안에 불이 났습니다. 극장주인은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잘못알렸다가는 혼란스러워져서 서로 나가려고 하면 아비규환이 되어서 밟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극장에서 제일 연기를 잘하는 제일 잘생긴 코미디언을 불러서 당신이 이것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라고 그래서 이 코미디언이 여러분 이것은 연극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이 극장에 사실 불이 났는데 당황하지 마시고 한줄씩 뒤로 퇴장하시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코미디인줄 알고 진짜 연기 잘한다고 박수를 치면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결국 불이 번졌을 때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수많은 사람이 밟혀서 죽었습니다. 어찌보면 이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지 않습니다. 종말이 어디 있느냐? 예수의 재림이 어디있느냐? 우스개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수천가지, 수만가지 예언이 다 응답되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 딱 한가지 있습니다. 뭐냐? 인류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이제 그것만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예수는 믿는데 정말 지옥이 있을까. 정말 천국이 있을까.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 여러번 반복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45절에 보면 만일 너의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 보다 나으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눈을 뽑아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느니 한 눈을 잃어 버리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가 예수믿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된 사실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지막 시대에 깨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 여러분이 대강절을 맞는 성도의 자세로 새벽을 깨우고 주님앞에 나와서 VIP들을 부둥켜 안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향해서 나아가 사랑을 베풀고 그들에게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분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주님의 희생, 그 복음을 증거함으로 저들을 예수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