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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부탁함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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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부탁함 (행 13:1-3)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라는 은혜로운 찬양입니다. 이 찬양을 듣노라면 정말 진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저 개인의 이야기이며, 교우님들의 이야기이며, 세상사람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995년에 나온 <파우더. powder>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레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번개에 맞아 죽었고 제레미만 극적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번개의 후유증으로 몸의 색소가 파괴되어 온 몸이 하얗게 되어 보기에 흉했습니다. 몸이 하얗다고 해서 별명을 파우더라고 했습니다. 파우더는 몸에 바르는 하얀 가루입니다. 보기에 흉측한 아들을 처음 본 그의 아버지는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절규하면서 아이를 버렸습니다. 그는 조부모 아래서 자랐는데, 조부모는 그를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 지하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천재였습니다. 지하실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고 이해하고 암기했습니다.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할머니가 죽고 할아버지마저 죽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육원으로 데려갔고, 고등학교에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그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그는 피부만 하얀 것이 아니라, 마음도 순백입니다. 그는 세상에 나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를 괴물 취급을 하고, 놀리고 괴롭힙니다. 결국 그는 사악한 세상에서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영화 내내 그가 겪는 아픔이 흐릅니다. 그의 선생님이 말합니다. <넌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순수한 아이다. 언젠가는 우리도 네 마음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분, 선생님의 말처럼 세월이 많이 지나면 사람들도 순수해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지나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과학문명은 무섭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은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악 가운데서 고통받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서 6장 5절에 나오는 이사야의 탄식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가 살던 세상은 추하고 더러웠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세상 사람들 틈에서 똑같이 부정하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이사야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도 한계를 가진 부정한 존재로서 역시 한계투성이요, 악한 세상에 섞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악함과 연약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고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렇다보니 교우님들에게 해 드릴 게 없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종종 기도 받으러 오시는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기도 해 주세요. 저 암이래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그 딱한 순간에 아무 것도 해 드릴 게 없습니다. 제가 그 암을 고칠 수도 없고, 대신 아파드릴 수도 없습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기도요, 기도가 끝난 후 나가시는 교우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뿐입니다. 때로는 수술 전에 가서 한 번 더 기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뿐입니다. 그 후엔 수술실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볼 뿐입니다.  

종종 임종을 맞이하는 교우님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저는 무능합니다. 다시 소생할 힘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손을 잡고 찬송을 불러 드리고, 귓가에 성경말씀을 읽어드리고, 주님을 마음으로 의지하고 천국에 가시라고 권면하는 것뿐입니다. 대신 죽어드릴 수도 없고, 함께 요단강을 건네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 호흡에 힘들어할 때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관계 때문에 상처를 받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위로하면서 힘을 내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분과 어려운 관계에 있는 분에게 화해와 사랑을 종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저는 그 분들의 마음에 들어가 망가진 사랑의 부품을 신품으로 교체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낙심하여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인생이 흔들리고, 가정이 흔들리다보니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사단이 여리게 자라나던 믿음의 싹을 짓밟았습니다. 이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권면하고, 격려하는 것뿐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 마음을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저를 채찍질하기도 합니다. <김 목사, 힘을 내라. 더 열심히 설교해라. 교우들에게 은혜를 끼쳐라...> 그래서 열심히 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힘이 빠집니다. 왜냐하면 변해야 할 분이 여전히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를 십 년, 이십 년을 들어도 여전히 미지근하고,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남을 무시하고,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인색하고, 여전히 주변인으로만 남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성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무능한 설교를 계속 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그런대로 괜찮은 목사인 것처럼 말씀하지만, 제가 저를 보면 정말 무능합니다. <과연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제 자신이 정말 무능하고 답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목사로서 마음이 아픈 것은 교우님들에게 제대로 해 드릴 수 없었던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의 모습이 저를 절망케 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에 대하여 좌절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정말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이 깊을수록 은혜가 절실합니다.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 느낄수록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밖엔 없습니다. 우리들의 절망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은 안디옥교회가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로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선택한 것은 교인들이 아니라, 성령님이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와 사울이 어떤 분들입니까? 이들은 초대교회에서 가장 탁월한 교회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분입니까? 그의 본 이름은 요셉인데,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바칠 정도로 헌신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6-37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보기를 잘하는 멋진 분이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을 때, 아무도 사울이 주님의 사람이 된 것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핍박자가 하루아침에 복음전도자가 된 것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 때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형제들에게 소개하고, 그를 교회 안에 정착시키고, 복음 사역자가 되게 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사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에서 함께 주심을 섬기도록 배려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더 바랄 게 없이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인물이었고, 최고 스승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학자였습니다. 한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도 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에는 더 망설이지 않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 후 사울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고향 다소를 거쳐 안디옥에 와서 바나바와 사역을 하는데, 그 때 안디옥 시민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사울은 이미 주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주님이 택하신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안디옥 교회는 가장 뛰어난 두 사람을 선교사로 보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디옥 교인들이 <이들은 우리 중에서 가장 신앙이 좋고, 탁월한 인물들이니 잘 할 거다>, 이렇게 말하면서 안심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안디옥교인들은 이 두 분을 염려했습니다. 본문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교인들은 두 사람의 앞길을 염려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기도를 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에 대해 사도행전 14장 26절에서는 <은혜에 부탁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바나바와 사울이 탁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안디옥 교인들이 사람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사람이 학식과 영성이 뛰어나고, 열정이 있어도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은혜가 없어도 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두 사람을 은혜에 부탁한 것입니다. 

여러분, 안디옥 교회 교우들이 두 사람을 은혜에 부탁한 것은 정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단의 궤계는 정말 지독했습니다. <살라미>섬에 갔을 때는 박수 엘루마가 두 사람을 방해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그 도시의 유대인들이 백성을 선동하여 두 사람을 박해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고, <루스드라와 더베>에서는 급기야 바울을 돌로 쳐서 성 밖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핍박과 환란이었습니다. 이 모든 역경을 이기고 이들이 성공적으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붙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안디옥 교회 교우들이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무력함을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를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저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자 합니다. 저는 땅끝교회의 미래를 은혜에 맡기겠습니다. 교우님들의 인생과 가정과 일터와 여러분의 비전과 기도제목 전체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겠습니다. 병든 교우님들, 가정적으로 힘든 이들, 저와 함께 기도하고 눈물 흘리며 돌아가는 이들을 은혜에 부탁하고자 합니다. <주님, 저 분들에게 은혜를 주세요. 굳은 마음에도, 슬픈 마음에도, 여린 마음에도, 힘든 인생들 위에, 우리 교회 위에, 제발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하려고 합니다. 저는 제가 무능하기 때문에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에 여러분을 맡기고자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제 인생도, 제 아내도, 제 부모님도, 제 자녀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자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자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 은혜입니다. 홀리조이센터를 건축하고 예배당 리모델링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은혜로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먹고 입고 살아온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비전을 품을 수 있는 것도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은혜 때문입니다. 

교우님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번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보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시겠습니까?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예수님은 탄생 전부터 그 어머니가 될 마리아에게 은혜로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은혜로 오신 것에 대해 요한복음 1장 14-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할렐루야!  

바울 사도는 평생을 은혜에 맡기면서 살았습니다.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5장 40절을 보면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은혜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께, 그 은혜에 우리를 맡기십시오. 무능할수록, 어려울수록, 답답할수록, 해 줄 게 없을수록 은혜에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평생을 은혜에 맡기면 살아온 바울이기에 후에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자신의 삶과 사역의 열매가 오직 은혜로 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도 후에 바울처럼 <나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고 인도받은 삶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길 원합니다. 대강절 첫 주일을 맞아 설교 앞부분에서 들은 찬양 가사처럼 한량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길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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