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요 3:16)

첨부 1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요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단풍구경 놓치면 가을을 놓치는 거라던 그 친구 보고 싶네.”라는 텔레비전 광고 문구가 있습니다. 저도 어쩌다가 단풍구경 한 번 못하고 가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은 만추입니다. 가을을 가리켜 사색의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왜 가을을 가리켜 사색의 계절이라고 할까요?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구름 한 점 없는 높푸른 창공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세계를 동경하게 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에 부르는 이별의 노래가 있습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그렇습니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아무리 감미로운 사랑도 저물 때가 있고, 아무리 아름다운 젊음도 시들 때가 있으며, 결국은 너도 가고 나도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가리켜 천하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문에 아무도 죽음의 운명에서 제외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는 예외도 없고 특권층도 없습니다. 죽음은 전혀 사람의 낯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달려듭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 라는 신학자는 죽음을 가리켜 “사망은 멈추어!(Stop!)하는 신의 명령이니 우리는 불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죽음은 밤에 도적 같이 찾아올 수 있고, 충분한 경계가 있은 후에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죽음은 생의 초기에 올 수도 있고, 행복의 여러 해를 지나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죽음은 찾아오고야 맙니다. 만사가 불확실한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이 한 가지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행복한 가정이라도 이 죽음이 찾아오면, 그 가정의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MBC 개국 10주년 기념 현상 수기 당선작 ‘불길을 뚫고’의 작가이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수기의 저자인 채규철 씨는, 30대에 처참한 화상을 입고 아내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야만 하게 되었는데, 그 분신 같은 아내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뜻밖에 어처구니없이 잃은 아내를 금촌 공동묘지에 파묻고 텅 빈 집에 돌아온 나의 공허, 울어도 울어도 풀리지 않는 심장을 에이는 듯 한 쓰라림은, 이 세상 아무도 달래줄 수 없었다. 

어누 누구로부터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만약 인생이 죽은 후에 이대로 썩어 없어진다면, 나는 그 차가운 절망의 서글픔을 참고 참다가 끝내 이기지 못하고, 나도 그녀를 따라 그녀의 옆에 한 줌의 흙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녀를 잃고 난 나에게는 부활이란 있다 없다는 문제가 아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정말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안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아픔을 맛보는 날이 누구에게도 올 것이고 또 온다.>

다음은 한국 대학생 선교회 총재였던 고 김준곤 목사님의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 점에서”라는 간증 집에 실린 내용입니다. <신희는 죽었다. 아내가 신희의 눈을 감겨주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이 들어와 산소 호스와 목에다 심장으로 꽂은 주사바늘을 빼냈다. 나는 그 방에서 모두들 나가주기를 청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의 태엽이 한 가닥 축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신부처럼 주님 품에 안겼을까. 어린 딸로 안겼을까. 

나와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을까......꼭 붙잡고 있는 신희의 손목이 서서히 굳어가며 차가와지고 있음을 느낀다. 종잇장 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분명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같이 잔잔하다. 지상의 산 사람 얼굴 중에 이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어떤 제로 점에 선 것이다. 나의 언어, 행동, 생각, 존재조차 정지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뒤에 생각해냈는데 나는 주님이 섭섭했던 것이다. 

그리도 가냘픈 아이에게 그리도 가혹한 고통을.... 주여! 하고 부를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꿈에 자꾸 신희를 본다. 친정에 다니러 왔을 때처럼 “아빠 다 나았어요.”하고 인사하지만, 어딘지 슬픈 표정을 짓는다. “신희는 이제 우리와 함께 살겠구나.” 꿈속에도 이것은 꿈이 아닌 생시겠지! 하다가, 꿈이 깨면 얼마나 슬픈지 저녁 내내 울 때도 있다.> 스물아홉 살 된 사랑하는 딸을 잃고 마음 아파하는 아버지의 애절함이 절절이 배어 있는 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장례식장에서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질병을 두려워합니까? 병든 것을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파서 죽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가난을 두려워합니까? 가난을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혹시나 굶어죽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인간이 전쟁을 두려워하고, 지진을 두려워하고, 사고를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모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철학자 키엘 케에골은 “인생이란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사망의 위협을 받고 있고, 사망의 슬픈 곡성이 들리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진 모든 불안의 근본 뿌리는 죽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 세계에 이토록 비참한 죽음이 찾아온 것일까요?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불신자들은 사망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칠팔십 년 간 살다가 죽는 것을 자연 현상이나 순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십년 구십년 장수하다가 죽으면 호상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슬퍼하지도 않고 웃고 떠들어대기도 합니다. 화투도 치고 놀음도 합니다. 죽음 후의 상태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실로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복스럽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세도 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을 금하셨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하나님의 명백한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즉시 1)그의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단절되는 죽음을 맛보았고, 2)그의 육체도 930년을 향수한 후 죽음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절대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 사고요, 이변이요, 질병이요, 재앙입니다. 롬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망을 자연 현상이 아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망은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정죄, 하나님의 저주 등으로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 타락 후 인간세계에 찾아온 이 죽음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보면, 롬 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고, 시 90:6에는 사망을 가리켜 ‘홍수처럼 쓸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은 모든 사람을 모조리 쓸어 갑니다. 

이를테면 가장 철저한 싹쓸이인 것입니다. 왕상 2:1에는 사망을 가리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는 英雄, 豪傑, 佳人, 제사 모두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잠 30:16에는 사망을 가리켜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온 인류를 삼키고서도 전혀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죽음의 세력 앞에 인간은 공포와 전율로 떨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2:16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은 결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죄란 무엇일까요? 죄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을 죽였다든지, 강도짓을 했다든지, 간통을 했다든지 하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우겨대기도 하고, 아직 한 번도 남을 해롭게 해 본적이 없다고 하면서, 꼭 예수 믿어야만 되느냐? 꼭 교회에 나가야만 되느냐? 라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결코 살인, 간음, 강도 같은 행위만을 의미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과 빗나간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만이 아니라, 악한 마음과 생각, 악한 성품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과연 어느 누가 나는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여러분, 50보 100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전쟁터에서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백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때 기겁을 한 병사 하나가 정신없이 도망을 하여 100보쯤 가서 섰습니다. 또 한 병사는 50보쯤 도망친 후, 백보를 도망친 병사에게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50보나 100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습니다. 죄 속에 50보 들어간 것이나 100보 들어간 것이나, 죄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남과 비교하여 나는 죄 없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50보 100보 차이의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모독하는 죄를 하나 더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몇 가지나 될까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죄는 그 보다 덜합니까?

그러면 죄의 대가, 죄의 형벌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한번 죽으면 그만이다’ ‘죽으면 다 끝이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리들은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하는 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히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했으며, 전 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했고, 계 21:8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후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영원한 지옥 형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1)지옥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곳입니다. 다시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을 기회가 전혀 없고,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곳입니다. 2)마귀와 귀신들과 각종 악한 무리들과 함께 지내는 곳입니다. 가장 악하고, 가장 추하고 더러운, 가장 잔인한 살인마들과 함께 지내는 곳입니다. 땅에서는 제아무리 예의 바르고, 고상하고 친절한 사람,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악한 무리들과 영원히 함께 지내야만 하는 곳입니다. 

3)지옥은 소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본적인 원동력입니다. 병이 들어도 낫게 될 소망을 갖고, 지금은 가난하더라도 언젠가는 잘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털끝만한 소망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서는 심지어 자살할 가능성마저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 죽고 싶어도 죽음이 피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물마시듯이 짓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고 말 인생들을 차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으셔서,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받아서 하십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저 무서운 지옥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벌 받을만한 아무런 잘못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지은 더럽고 추한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셔야 했습니다. 그 분은 저와 여러분이 지은 모든 부끄러운 죄를 가리어 주시기 위해서, 대신 벌거벗기시고 수치를 당하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비누나 잿물로 씻을 수 없고, 하이타이나 샴푸로도 절대로 씻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특사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설사 사형을 당한다 해도,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씻을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오직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깨끗하게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미국의 모든 국민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한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 소년의 이름은 라이언 화이트였습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해서 그만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이제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너무나 밝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는 매일 신문에 게재되었고, 텔레비전에도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레이건 대통령,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인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선물도 주고 위로하며 관심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라이언은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살에 죽었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크리스천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저는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어요. 아빠는 저에게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시시각각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인생들에게 영생의 선물보다 귀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다 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영생보다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사랑하던 사람의 관 앞에서 하룻밤을 울며 새워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죽음이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죽음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을 해본 사람일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절망의 최악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죽음일 것입니다. 인간 최대의 절망, 인간 최대의 원수, 인간 최대의 슬픔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를, 사랑하는 연인을, 친구를, 모든 인간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죽음은, 분명히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 최고의 소망은 불로장생하는 것이고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보험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보험 이름은 영생보험입니다. 이 보험은 한 번 가입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죽음 후에 들어갈 세상에서 효력이 발생됩니다. 이 보험은 돈이 필요 없습니다. 보험금을 매달 불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이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즉시 여러분은 이 보험의 보장을 받게 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삽니다. 죽음 이 후에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립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보험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처음 나오신 분은 꼭 영생 보험에 드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를 물마시듯 짓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과 가족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다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