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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나라, 영원한 왕 (사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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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나라, 영원한 왕 (사 11:1-16) 


1. 대강절(待降節)

敎會曆에 따라 오늘부터 待降節이 시작됩니다. 대강절이란 ‘도착(arrive)’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 이는 基督敎 固有 用語이며, 그 뜻은 漢字 표현 그대로 예수님의 降臨을 기다리는 節期입니다. 이 대강절은 하루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며, 성탄절 전 4주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올해 대강절은 오늘부터 성탄전야인 24일까지입니다.

2천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대강절은 굉장히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 우선적인 이유는 敎會曆에 따르면 대강절이 한 해의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陰曆이나 陽曆과는 별도로 주님의 교회가 고유하게 가진 敎會曆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교회력에 따르면 대강절 첫째 주일이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대강절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오셔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장차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 성도들의 입장에서 대강절, 물론 구약시대는 대강절이라는 절기가 없었습니다만, 이 땅에 구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절기였다면, 오늘 우리에게 대강절은 이미 오신 주님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대강절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명절이자,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그리고 그 분을 맞을 준비를 살피는 절기라고 할 수 있지요. 

대강절이 이렇게 중요한 절기인데도, 사실 그동안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주보에 表記하는 정도, 아니면 설교 중에 잠시 언급되는 정도에 그쳐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것 또한 얼마나 기대되는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강절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강절 첫 주일을 맞아 이미 오신 주님,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2. 영원한 나라

성경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이 땅이나 우주 어딘가에 영토와 국민을 가진 유형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물론 온 세상,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지배를 받습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나라요 하나님의 통치가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통치한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다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거기에 대해 ‘아멘, 저희는 주의 백성이요 주님의 소유입니다’라고 순응하고 복종하는 자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양측이 주권자와 그 백성으로 언약을 맺음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에는 이스라엘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복 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과 국가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즉 세상 모든 민족과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죠.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스라엘은 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열방을 주께로 이끄는 역할은 고사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실패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사람이 만든 온갖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이방의 온갖 문화와 전통과 생활방식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이라는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시작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한 종교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사1:2~8).” 무슨 말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멀리 하고 그 말씀을 무시한 채 온갖 악행을 일삼던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아있던 유다마저 그보다 더 심각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잘려져 밑동만 남아있는 나무처럼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현재 유다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서 하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6~9).”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0).”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11).”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로 여겨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 말씀과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저버렸지만, 열방을 주님의 나라와 그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았고, 이사야의 입장에서 볼 때 한참 뒤에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일이 계속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이 되었고, 그 이후 언약 백성이라는 혈통으로 이어질 것이라 여겨졌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 創造主시자 온 세계의 支配者이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좁은 의미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시작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➀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3절 하반절서부터 5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統治者라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아무리 善政을 베푸는 지도자라도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동경기 중, 선수들의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뛰는 심판도 誤審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공의로, 정직으로 심판하십니다. 

“공의”란 ‘올바름, 공정’의 의미입니다. “정직”이란 ‘평평, 평탄, 바름’의 의미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말이죠. 어느 누구도 지나치게 받지 않고, 어느 누구도 부당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공정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자,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 안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없는 자, 멸시 받는 자, 고통당하는 자를 찾아가서 도우셨습니다만, 그렇다고 가진 자 높은 자를 멸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도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➁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6절부터 8절을 보십시오. 거기 나오는‘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암소와 곰’, ‘젖 먹는 아이와 독사’는 天敵關係라고 할 수도 있고,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天敵關係가 사라지고, 원수된 것이 무너져 하나 되게 하시고,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어우러져 하나 되게 하시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 7절에는 “함께”라는 말이 다섯 번 반복됩니다. “함께 살며”, “함께 누우며”, “함께 있어”, “함께 먹으며”, “함께 엎드리며” …. 이것은 에덴동산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상실하기 전 에덴동산에는 서로 싸우고 먹고 먹히고 하는 원수관계가 없었습니다. 죄 때문에 시기 질투, 약육강식, 살인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갈등과 대립과 싸움이 사라지고 이처럼 하나 되는 축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➂ 세 번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적인 구분, 즉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되는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여기서 ‘기치’는 기호, 표식을 뜻합니다. 청군, 백군 나눌 때 청군의 기호는 청색이고 백군의 기호는 백색이듯이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열방의 기호로 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萬民과 列邦이 볼 수 있는 깃발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11절에서는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땅 사방에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혈통적인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 사람들을 모으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방인인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대신에 접붙임을 받아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시기케 하여 그들도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기호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만드는 기호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국가 간, 인종 간, 계층 간, 지역 간의 갈등이 심할지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이런 갈등과 다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 되고 화평케 되는 역사는 오직 이새의 뿌리에서 난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죠. 

➃ 그렇다면 이사야 11장에서 이런 말씀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가득 차고 원수가 계속 공격해서 결국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입을 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되냐?’,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없어지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민족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가?’라는 조롱과 비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의 운명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하신 이, 심판하시는 이 … 즉 왕이 오실 것이며, 그 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더욱 강력하고 거대한 주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말씀이지요. 몇 년 전, 강원도 고성에서 산불이 나서 수만 헥타르의 산이 새까맣게 태워져 죽은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땅은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였지요. 그러나 몇 년 후, 그 죽은듯한 땅에 불에 그슬린 채로 죽은 듯이 서 있던 나무 밑동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그 땅에는 다시 식물이 자라나고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떠나갔던 산짐승들도 돌아오고, 각종 약초들과 야생화들도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힘은 그처럼 끈질기고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더 강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지요! 비록 이스라엘이 앗수르나 바벨론에 의해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것 같아도 주님의 나라는 더 크고 강력하게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그 나라는 영원합니다. 이사야는 바로 이 위대한 메시지를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왕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절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유다의 멸망으로 이스라엘과 다윗 집에 속한 거의 모든 것들이 마치 아름드리나무가 잘려진 것처럼 잘려졌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과 성전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백성들을 죽였으며, 귀족층과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그리고 젊은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물론 다윗 왕가의 식속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다시는 소망의 나무가 자라지 못할 것으로 보였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실 때까지, 약 6 세기 동안 그 땅 깊은 곳에 줄기가, 그리고 뿌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줄기에서 나온 싹과 뿌리에서 나온 가지셨습니다. 비록 화려한 王家가 아니라 평범은 고사하고 지지리도 가난한 가정에서 나셨고,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심으로 도저히 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이었지만, 그래서 금방 시들어 없어질 싹과도 같고, 금방 말라버릴 연약한 줄기와도 같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일을 다시 시작하신 예수님께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을 부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시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라는 말입니다. 비록 인간적인 모습은 ‘왕이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인정하셨고, 그에 대한 무수한 증거들이 있으니 그가 왕이심에 틀림없다는 말이죠. 어디 그 뿐입니까? 하나님께서 왕으로 위임하셨기에 왕이요, 자연과 천지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기에 왕이시오, 질병과 귀신과 죽음이 그에게 복종하기에 왕이십니다. 이런 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또한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개인적인 왕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철저히 낮아지셨으며, 여러분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셨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셨으며, 나그네였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셨으며,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셨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시고, 여러분의 모든 사정을 다 들어주시며, 언제나 여러분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한 번도 여러분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신 분, 여러분의 뒤에서 지켜봐주시고 떠받쳐주는 든든한 후원자, 여러분이 넘어질 때 일으켜주시는 보이지 않는 손, 지금도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위대한 중보자, 여러분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느 분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위한 바보십니다. 

당신의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에게 빠져 버린 것 같은 당신! 영광의 자리를 내동댕이치고, 당신의 체면과 당신의 몸을 버려 나를 최고로 만들어주신 분!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당신! 지금도 나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으며, 나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조용히 사랑과 희생을 감추고 계신 당신! ….” 여러분,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왕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의 왕이신 것이죠!

옛날 영국에 왕관을 쓰지 않은 괴짜 임금이 있었습니다. 카뉴트 왕(King Canute, 1016~1035)이 그 사람입니다. 그는 신하들이 지나치게 자기를 찬양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신하들에게 王座를 해변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닷가에 놓인 왕좌에서 수평선을 응시하던 왕은 밀물이 밀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파도여, 멈추어라”고 명령했습니다. 여러 번 명령했지만 물결은 사정없이 밀려들어 왕좌의 절반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파도에 밀려 임금은 왕좌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카뉴트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모두 똑똑히 보았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권력이란 것은 하찮은 것이다. 우주를 다스리는 권능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그리고 그날 이후, 카뉴트 왕은 자신의 왕관을 벗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상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오직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왕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4. 그 나라, 그 왕의 백성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는 대강절의 첫 주일입니다. 

지난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생겼다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에 속하기도 했지만,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이 이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세상 나라에 속했던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각양 은사와 선물을 누리게 하셨으며, 영생과 더불어 장차 영원한 나라를 보장받게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특별한 복을 받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입니다. 즉 세상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의 차이는 ‘세상 것만을 구하며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사느냐’에 있다는 것이죠. 

세상 백성들은 세상 것만 구합니다. 육신의 것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를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구제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고,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없는 세상 욕심에 목숨 걸지 않습니다. 즉 땅의 것, 인간의 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 나라 백성답게,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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