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의 문 (시 118:19-20, 마 7:13-14)

첨부 1


의의 문 (시 118:19-20, 마 7:13-14)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백성들과 만나는 성막을 모세를 통하여 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너희가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중간 역할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막의 문은 동쪽에 있었습니다. 높이가 5규빗이었고, 너비가 20규빗이었습니다. 성막 문은 흰색 세마포로 되어 있었고, 무늬는 청색, 자색, 홍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청색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자색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홍색은 고난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흰색은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막의 문이 동쪽에 있다는 것은 서쪽을 향해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동쪽을 향해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가지고 들어갔다가 죄를 해결 받고 나오는 곳이 성막 문입니다. 성막의 동쪽은 유다지파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유다지파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심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막은 길이가 100규빗이고 너비가 50규빗입니다. 당시로는 제법 넓은 건축물인데 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한 문을 통해서만 성막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막 문의 폭은 약 10미터입니다. 이 정도의 규모의 성막으로서는 상당히 넓은 문이었습니다. 성막 문이 넓다는 것은 누구나 다 성막에 들어올 수 있게 열려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문임을 의미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이지만 그 문은 넓게 열려 있습니다. 구원의 제한성과 무제한성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는 것이 성막 문입니다. 
  
예루살렘에는 8개의 성문이 있습니다. 동쪽에는 ‘미문’이라 불리는 ‘황금문’과 ‘스데반문’이 있습니다. 서쪽에는 ‘욥바문’과 ‘새문’이 있습니다. 남쪽에는 ‘시온문’과 인분 등 오물을 버리는 ‘분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에는 ‘헤롯문’과 ‘다메섹문’이 있습니다. 문이 여덟 개나 있지만 그 문들의 기능이 다 다릅니다. 기능은 다 다르지만 모든 성문은 중요합니다. 성문이 아무에게나 열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문은 성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을 빼앗기면 성 전체가 빼앗깁니다. 옛날에는 성문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성이 있으면 성 주위에 인공 연못인 해자(moat)를 만들어 적들이 넘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문에만 다리가 있어 군사들이나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갈 때는 다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다가 적에 의하여 성문이 점령당하고 성문이 열리면 적들이 성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성문을 빼앗기는 것은 성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성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라 엄청난 군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은 성막 문 앞에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한 다음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그 문에 들어가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물로 씻어 깨끗해야 합니다. 성막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문 앞에서 거룩하게 해야 출입이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0:7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 문에 들어가 구원을 얻으면 꼴을 얻습니다. 그 문 안에서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 문에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라고 합니다. ‘의의 문’은 성전 문을 가리킵니다. 성전 문은 하나님과 백성 상호 교통하는 장소에로 인도하는 입구입니다. 의의 문은 의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의’란 히브리어로 ‘체데크’인데 이 단어는 ‘승리’의 개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의 문을 승리의 문, ‘개선문’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대적들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당해 성소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러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양의 문을 통과하여 성전 문에 들어온 우리들이 여호와의 문, 의의 문의 중요성을 알고 그 문에 다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의의 문은 어떤 문입니까? 

  
첫째, 여호와의 문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고 합니다. 의의 문을 ‘여호와의 문’이라고 하는데 여호와의 문은 성전의 현관 출입구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문은 하나님을 향한 문입니다. 여호와의 문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입니다. 의의 문이 왜 여호와의 문일까요? 여호와는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7:11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7:25에는 예수님도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라고 하십니다. 의의 문은 의로우신 여호와의 문입니다. 의의 문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문입니다. 여호와의 문, 그 문에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여호와의 문에 들어가면 여호와가 문지기입니다. 여호와가 문지기로 지키시기에 절대 안전합니다. 그 문에는 악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 복입니다. 여호와의 문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문입니다. 여호와의 문은 회개치 않은 죄인은 들어오지 못하는 문입니다. 그 문에 들어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여호와의 문에는 들어가기가 가장 쉽고, 동시에 가장 어렵습니다. 누구나 들어가지만 아무나 들어가는 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밤에 벗에게 빵을 빌리러 간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1:8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합니다. 기도에 관한 이 비유의 말씀은 간청함 인하여 주리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간청함으로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간청함으로 여호와의 문이 열립니다. 여호와의 문은 간절함, 간청함으로 두드려야 열립니다. 간절함으로 두드리면 누구에게나 열립니다. 
  
마태복음 7:7에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8절에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합니다. 문을 두드리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의 주인은 반드시 두드리면 열어주십니다. 집 나간 아들,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돌아올까봐 30년, 40년을 문을 열어놓고 잠그지 않는 부모도 있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문은 절대로 잠그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문은 여호와의 집의 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미 열어놓으신 문입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문입니다. 그 문은 하나님 외에 누구도 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아직 모두 다 들어오지 않았는데 일찍 닫아버리지 않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은 하나님이 직접 닫으셨습니다. 방주를 직접 만든 노아도 문을 만들었지만 문을 닫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시다가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문에 들어가려면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열 수 있는 열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하나님의 나라가 열립니다. 믿음만이 열쇠입니다. 
  
여호와의 문인 하늘 문은 성경에 여러 번 열린다고 합니다. 하늘 문은 이런 때에 열립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제자 나다나엘을 만나셨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첫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넷째는 베드로가 욥바에 있을 때에 환상 중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먹지 못하는 더러운 짐승이 싸인 보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말라기 3:10에 보시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왜 당신은 문 앞에 서서 나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문지기는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돕기 위하여 문 앞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문을 닫아 놓고 열어주지 않습니까?” 다시 물었습니다. 그 때 문지기는 “당신은 한 번도 내게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은 열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열어달라는 열망이 있어야 열립니다. 
  
의의 문은 여호와의 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문을 열어달라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열망을 가지고 여호와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문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의인이 들어가는 문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고 하십니다. 의의 문은 의인만 출입할 수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통행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의의 문은 의인만이 들어갑니다. 의의 문에 불의한 자는 못 들어갑니다. 의의 문은 불의의 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의 문에 의인이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잠언 14:19에는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합니다. 불의한 자는 선인 앞에 엎드릴 뿐만 아니라 의인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엎드러지고 맙니다. 시편 1편에 말씀한 대로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병원 응급실에 면회를 가려면 면회시간을 잘 지켜야 하고, 들어가기 전에 면회복으로 반드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 것이 없이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하고, 면회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도 들어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준비할 예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예복이 ‘의’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세요. 양의 문이란 원문의 뜻으로 보면 양들을 위한 문입니다. 양의 문은 양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양의 문은 양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문입니다. 양이 아니면 환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이 아니면 아예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양의 문에 염소나 이리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양은 양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리는 아무대로나 들어갑니다. 양은 의로운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성경의 양은 선한 동물입니다. 거룩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이리는 악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양과 이리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자에서 ‘의’(義)자를 보면 참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我) 양(羊)을 어깨에 매고 있는 형상이 의입니다. 의로운 일은 양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매고 가는 모습이 ‘의’자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의 문은 양의 문입니다. 
  
의의 문인 양의 문은 양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이리에게는 닫혀있고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의의 문은 의인들에게 들어오게 하고 보호하고 풍요하게 합니다. 양의 문은 양들이 들어가서 보호받고 풍성한 꼴을 얻게 하는 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양이 되세요. 양에게는 양의 문이 열립니다. 이리가 되지 마세요. 의의 문을 두드리세요. 기쁘게 열어주시고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으므로 의의 문을 두드리면 열리고, 의의 문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합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합니다. 좁은 문은 의인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넓은 문은 불의한 자가 들어가는 문입니다. 불의한 자는 좁은 문을 찾지 않습니다. 
  
의의 문은 들어가기 좁은 문입니다. 이 문은 좁으나 들어가면 엄청나게 넓은 목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쉼이 있고, 꼴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의의 문에 들어가서 얻는 복은 의인이 누리는 복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의 ‘스칼라 산타’ 성당을 찾아 계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계단은 무릎을 꿇고 올라가면서 고행을 하는 계단입니다. 수도사들이 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무릎을 꿇은 채 계단을 오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서 옷을 털고 걸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 계단은 루터가 발견한 의의 계단입니다. 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의의 문입니다. 루터는 로마에서 비로소 의의 문을 발견한 것입니다. 
  
매년 3월 17일은 ‘성 패트릭의 날’입니다. 성 패트릭의 사망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이 되면 초록색 옷을 입고 축제를 엽니다.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 사람도 가톨릭교도도 아닙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향 브리타니아에서 꿈을 꾸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꿈에 아일랜드 사람이 나타나 그가 전에 노예로 잡혀 있던 땅에 복음을 들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는 이 말에 순종하기로 하여 먼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하여 갈리아의 수도원에 들어가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때가 되자 그는 아일랜드로 돌아가 태양을 숭배하던 고대 켈트족의 신앙인 드루이드 사제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켈트족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패트릭 이후 기독교는 아일랜드에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역사가들은 성자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교회 2천 개를 개척하고, 10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성 패트릭에게 아일랜드로 들어가는 그 문은 의로 인도하는 문이었습니다. 아일랜드를 바꾼 문이었습니다. 그가 성자로 불리는 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 “예수 사랑하심을”의 2절에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하늘 문은 죄를 씻고서야 들어가는 문입니다. 
  
한때 교회를 천당 문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입니다. 그래서 로마교회에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도 좋지만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권위를 약화시킨 잘못이 있습니다. 가시관이나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머리 되시고, 주인이 되심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이 의인의 문입니다. 의인이 들어가는 의의 문입니다. 양인 우리는 이 문에 들어가면 구원을 맛보며, 매일 부족이 없는 풍성한 꼴을 얻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의의 문에 들어가는 의인이 되어 이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마태복음 25장의 10처녀 비유는 종말에 관한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5:10에는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고 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늦게 온 미려한 처녀들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하였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것입니다. 문이 한 번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의의 문은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한번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문입니다. 

찬송가 257장 2절에는 “오는 사람들은 지체 말고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생명 길은 오직 구주 예수니 어느 누구나 오라”고 합니다. 문이 열렸을 때에 여호와 문, 의인의 문에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의 풍족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리고 일생 동안 의인으로 살며 의의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불의의 문은 근처에도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들어가는 문마다 의의 문이 되고 그 문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안과 꼴의 풍족을 느끼며 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