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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어두움에 빛으로 오신 예수 (마 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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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에 빛으로 오신 예수 (마 4:12-17)
   
세계사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먼저 강자로 등장한 나라는 애굽이라는 나라입니다. 그 뒤를 이어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오스만터키, 대영제국, 미국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제 중국이 세계의 최강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중심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했어도 더 큰 힘이 등장하면 그 힘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입니다. 힘이 강한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세상입니다. 힘과 소유를 중심으로 세워지는 역사입니다. 

이런 강한 힘의 논리를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들과는 다른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세우신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실 때 막강한 군대도 없었습니다. 재력을 모을 수 있는 국세청도 없었습니다. 질서를 유지할 군대와 검찰, 경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는 힘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힘의 논리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위에 세워지는 가르침을 선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간 금식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으로부터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나에게 절을 해라 그러면 세상의 반을 주겠다’는 세 가지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사단의 유혹을 보면 그 안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과 소유의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그러한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금식 기도를 마치고 광야에서 나온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접한 소식은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잡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잡혀 옥에 갇혔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국민들이 존경하는 선지자이며 지도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국민들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에돔 족속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헤롯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세례 요한은 불의한 나라와 사회 구조를 지적했습니다. 헤롯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악한 통치와 불의한 삶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여길 만큼 그를 존경했고 그를 의지했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헤롯 왕의 불의함을 지적하다가 헤롯 왕에게 잡혔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잡혀 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흉흉하고 누군가 불을 지피면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를 기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셨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집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 나는 이 분의 신발 끈도 맬 수 없다’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헤롯을 비난하며 백성들에게 잘못된 정권을 향해 돌을 들어 던지라고 선포하면 백성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힘의 논리, 소유의 논리로 말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힘의 논리와 소유의 논리에서 본다면 ‘때’가 온 것입니다. 

힘의 논리로 세상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때를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12, 13절에 보니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잡힌 것이 잘못 된 것이고, 불의한 것이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시려면 헤롯 궁으로 찾아가 항의하며 세례 요한을 석방시키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불의한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뒤로 하고 왜 고향으로 돌아가시는가? 어려운 상황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숨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본문 14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 9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으로 내려가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힘의 논리대로 한다면 예수님께서 취하실 행동은 백성들의 힘을 업고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갔어야 합니다. 백성들과 함께 힘을 모아 헤롯 왕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했습니다. 또 그 힘의 여세를 몰아 총독관으로 달려가 빌라도 총독에게 강력하게 대항하며 이스라엘의 독립을 외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힘과 소유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이 아닌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으로 내려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인 가치와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종교적인 힘이 몰려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스라엘 영역 안에서 가장 가난하고 약한 변두리 중의 변두리인 갈릴리 지역, 그 중에서도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을 찾아 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임을 몸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갈릴리 바다 북서편에 위치한 땅입니다. 우리나라로 하면 함경도 땅이 될 것입니다. 가장 오지이면서 끊임없이 적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땅, 약탈과 방화와 살육이 자행되는 땅, 가난으로 인하여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 소외된 땅인 것입니다. 적의 잦은 침략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외면으로 마치 이방 땅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곳, 온갖 멸시를 한 몸에 받아야 했던 곳, 그 곳이 바로 스불론과 납달리 땅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스불론과 납달리를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으로 가셔서 그들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힘과 소유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에서가 아닌 가장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 지역, 그 갈릴리 지역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사랑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18절 이하에 보면 갈릴리 지역에서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그리고 병든 자들을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2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저는 이 말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와 요단 강 지역으로 이어지는 지역 이름의 순서입니다. 힘의 논리를 가지고 만드는 세상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 갈릴리 지역에서 끝날 것입니다. 힘과 소유의 지배 아래에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가장 약한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장 강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사랑의 힘으로 힘의 세계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구조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순서의 비밀을 고린도전서1장 26-29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이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힘을 부끄럽게 만드는 세계입니다. 그런 눈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로 내려가시는 행동에는 대단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을 대림절입니다. 강림절이라고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의 말구유에 태어나신 성탄절을 기준으로 네 번째 주일 전부터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네 개의 초에 한 주에 하나 씩 촛불을 밝히며 스불론과 납달리와 같은 어두운 세상에 큰 빛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매 주일 마다 교회에서 촛불을 하나씩 밝히며 어두움에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림절을 보내면서 내 심령의 어두운 곳에 아기 예수님의 큰 빛이 비춰지기를 사모합시다. 우리 가정의 어두운 곳에 큰 빛이 비춰지기를 사모합시다. 우리의 일터와 교회 위에 큰 빛이 비춰지기를 사모합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와 지구촌 안에 가장 헐벗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큰 빛이 비춰지기를 사모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성탄절을 앞두고 아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들과 교회가 우리 주변에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들이 누구인지를 돌아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밤에 뜨는 달은 그 자체는 어두움을 밝히는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달은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에게는 빛의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태양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으며 그 분에게서 비춰지는 빛을 받아 반사경 역할을 하여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영광을 받는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영광은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대림절을 맞아 어두운 곳에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사모하며 그 분이 비춰 주시는 빛으로 우리의 삶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그 빛을 받아 우리 주변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과 같이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춰주는 복된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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