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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하면 살리라 (암 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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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면 살리라 (암 5:4-15)


안네 프랑크는 자신이 의지했던 언니가 죽자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한 달 후에 돌연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나치의 혹독한 지배 아래 파리에서 노(老) 대사학자(大史學子) 지그프리드가 쓰레기장에 나가 썩은 감자를 주워 먹으며 모진 박해 속에서도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살라고 했습니다(겔 16:6).

멸망당해 마땅할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본문의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아모스(Amos) 선지자는 남유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지는 북쪽 지파들을 향하여 주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경고에는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말기(B.C. 8세기 중엽)에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다윗과 솔로몬시대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던 때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사회전반에 걸쳐 걷잡을 수 없는 타락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부정과 부패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종교적 타락은 모든 타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도처에 우상숭배가 자행되었는가 하면 사회적으로는 온갖 죄악과 불법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이웃을 속이는 저급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의 윤리적 타락과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옛날 여호와 신앙의 터전이었던 벧엘과 길갈은 우상의 성읍이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앞 다투어 그 곳에 우상을 두고 부지런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침내 유서 깊은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는 우상의 본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때 아모스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이스라엘을 향해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5:2).

이스라엘 중에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5:3).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5:11). 사람들이 모든 광장에서 울며 애곡한다고 했습니다(5:16-17).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이 죽지 않고 다시 사는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Ⅰ.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 5장 5절에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했습니다. 
본문 5장 6절에 또 말하기를 『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했습니다. 『 나를 찾으라 』의 히브리어는 "디레슈니"(ynWvr_D)입니다.

이 단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명령형이 되어서 여호와께 돌아와서 다시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 찾으라 』는 말의 "다라쉬"가 될 때는 "도움을 청하다", "주의 깊게 찾다"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그리하면 살리라 』에서 그리고 『 너희는 살라 』라는 말 히브리어 "위흐유"는 영적인 생명과 관련된 소생과 부활의 의미가 있습니다.

1) 주를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9편 10절에 『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3)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호세아 10장 2절에 『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고 했습니다.

4)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스바냐 1장 6절에 『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시편 77편 1-2절에 『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욥기 8장 5-6절에 『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고 했습니다. 

5) 영적 혜안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본문 5장 5절에 『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라고 했습니다.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당시 우상의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미있는 신앙의 고장이었습니다. 

① 벧엘은 야곱이 돌기둥을 세웠던 곳입니다(창 28:10-18). 
야곱이 세겜을 떠난 뒤에 단을 쌓고 회개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창 35:1-7). 그 후에 이곳은 거룩한 예배장소로 지정되었습니다(삼상 10:3).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입성한 첫 지점입니다(수 4:19-20).
그 곳에 도착한 온 백성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수 5:2-12). 

②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창세기 21장 33절에 『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라고 했습니다. 

③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신 곳입니다.
창세기 26장 23-24절에 『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고 했습니다. 

④ 사무엘이 자기 아들들을 사사로 삼은 곳입니다. 
사무엘상 8장 1-2절에 『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서 깊은 장소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지만 사실은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길갈이 정녕 사로잡힌다고 하므로 길갈의 다가올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면
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②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3절에 『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15-16절에 『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③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에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Ⅱ.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4절에 『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1)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5절에도 『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 했습니다. 
본문 5장 14절에서는 『 살기 위하여 여호와를 찾으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면 "선을 행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악이 무엇입니까? 악은 위선(僞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것이지만 진심으로 하지 아니하고 섬기는 척하는 위선이 곧 악입니다.

2)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5절에 『 …선을 사랑하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사역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창조사역에 나타난 선은 하나님 자신의 

① 의지(뜻)의 자유를 말합니다. 
② 의지적용의 자유를 말합니다.
③ 의지적용의 자유의 결과 성취의 자유를 말합니다.
결국 선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만족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은 창조사역에서 유감없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구속사역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구약시대에는 법궤로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에서 나타났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착한 행실만을 뜻하지 아니합니다.
시편 106편 1절에 『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고 했습니다. 
선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라고 할 때 동일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선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5장 14절에 『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암 5:15),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선하다는 말이 두 가지의 의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아가도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칼로스(입니다.
전자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사람이나 사물이 선하다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내적 매력의 아름다움까지를 포함합니다. 
예컨대 성전처럼 외형적인 아름다움(눅 21:5), 소금처럼 내적인 짠맛에 잘 사용되는 아름다움(막 9:50), 집사들이 그 직책을 맡아 성실히 행하는 아름다움(딤전 4:6), 착한 행실의 아름다움(마 5:16), 양심의 아름다움(히 13:18) 등을 가리킵니다. 아가도스가 은유적이고 내적이라면 칼로스는 외적이며 내면에 흐르는 구체적인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가도스가 명사적이라면 칼로스는 부사적이고 동사적입니다.

Ⅲ.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5절에 『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고 했습니다. 
아모스가 당시 이스라엘 중에서 발견한 죄악은 재판을 공의롭게 하지 아니함으로 백성들을 억울하게 한 죄악입니다. 
본문 12절에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 『 성문 』은 재판하는 재판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의를 세우는 길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는 것, 즉 위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고난 내적 정직이 없으면 공의를 세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타고난 내적 정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롬 3:10-18, 23). 인간의 내적 정직을 소유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찾는 길입니다. 따라서 공의를 세우는 길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결코 사람은 공의를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공의를 세우는 길이 사는 길이며 사는 길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 『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공의는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묻고 있습니다(요 21:15-17).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최우선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공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이 신실하듯이 인간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출 19:5-6).
따라서 『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라 』는 말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신 24:16).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행하는 것이 곧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암 5: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 곧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바른(선) 관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금세와 내세의 축복과 영생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선) 관계를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운동으로 집약 될 수 있습니다. 
교회 부흥이 나와 내 가족과 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교육열 때문에 오늘날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이 높아 졌다고 하면서 덩컨 교육장관에게 근본적 교육개혁만이 살 길이라고 한국의 교육열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부모들의 교육열을 미국도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교육열을 한국민의 타고난 기질에서 찾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덕(德)스러운 인간을 지향하는 민족적 이데올로기가 학벌주의를 낳게 한 성리학에서 그 공로를 찾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서 볼 때 합당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한국이 이처럼 고도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이룩한 것은 그 누구의 공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입니다.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일제 관료들의 기독교 말살을 위한 종교정책 가운데서도 그들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조를 굳게 지켰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도 불구하고 1914년 1,800여 교회에서 1941년 3,300여 교회로 성장했는가 하면 초창기 100여명의 장로가 일제 말기에는 3,000여명으로 증가했고 1914년에 3,500여명의 집사가 일제 말기에는 16,000여명으로 증가된 것을 감안할 때 시대가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일은 더 부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30년 전쟁은 보헤미아(Bohemia)로부터였습니다. 
팔쯔(Pfalz) 전쟁(1618-1623), 덴마크 전쟁(1625-1629), 스웨덴 전쟁(1630-1635), 프랑스 전쟁(1635-1648)이 전 유럽을 강타할 때 보헤미아 인구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5만 5천곡이나 되는 찬송가가 작곡 작사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역사적 혜안을 가져야 합니다.

6.25동란 이후에 급격히 증가한 한국교회는 이 땅의 경제성장과 비례했습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려고 하면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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