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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림의 아름다움 (벧후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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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아름다움 (벧후 3:8-13)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사람들이 만나면 흔히 하던 인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진지 잡수셨습니까?” 라는 인사입니다.

그만큼 예전에는 먹고사는 일이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만날 때에 이것이 하나의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거의 하지 않는 인사가 있습니다.

그 후에 좀 바뀌어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로 당시의 시절이 안녕하지 못했음을 반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은 어떤 인사말을 많이 사용할까요? 

2,000년전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의 인사는 ‘마라나타’ 였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뜻은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뜻으로 계21장에 보면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는 ‘마라나타’ 로 성도들에게 인사합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늘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서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오늘 낮에 혹시 오실건가요?’ 혹은 하루를 마치면서 ‘주님! 오늘 밤에 혹시 오실건가요?’ 이렇게 늘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설레이는 일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더욱 설레이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과 같이 휴대폰이나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면서 마음 졸였던 경험들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긴장되고 떨리는 기다림 끝에 먼 곳에서 약속한 사람이 보이는 순간 안도감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인스턴트시대가 되면서 기다림에 대해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즉석에서 이루어지고 편리함을 더하고 있지만 그러나 기다림을 통해 주는 행복과 깊이는 아무리 편리하고 빠른 것이라 하더라도 대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기다림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기다리는 기다림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교회 절기상 ‘대림절 혹은 대강절’ 이라고 하는 날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4주 앞둔 주일부터 대림절이라고 하는데 대림절의 의미는 2,000년전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회상하며 우리의 심령 속에, 삶의 현장에 주님께서 능력으로 임재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의미를 가진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성탄을 앞두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이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말씀을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억압과 핍박을 받고 있었으며 그로인해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메시야를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 요한의 외침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방황하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한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실망하기도 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오순절 성령체험을 하고 난 이후 그들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갔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이 서로 유무상통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장차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는자들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우리 자신이나 사람들의 미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것입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무슨 유토피아를 만들 것처럼 장밋빛 공약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공약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적인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나온다 할지라도 이상적이고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누가 되어도 한쪽에서는 불만이 있고 누가 되어도 부족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며 이루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였던 무디의 과거는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하였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죽 하면 주변에서 “너처럼 희망이 없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네가 우리의 친구라는 것이 부끄럽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그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며 겸손하며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때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런 무디를 하나님께서는 붙잡으시고 그를 들어 사용하시기 시작하였는데 무디는 19세기 미국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던 무디는 전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미래에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전도자로 쓰임 받게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 그러므로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우리는 내 능력보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인류의 희망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며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이러한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시 초대교회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던 성도들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위기가 생기게 되었습니까? 
먼저는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짓선지자들의 속임수 때문이었습니다.

벧후3:3-4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있다 하니’

여기서 기롱하는 자라는 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을 비웃고 조롱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당시에 성도들이 간절히 믿고 있던 주님의 재림을 비웃으며 논리적으로 공격하는 거짓된 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우선 비웃는 말로 믿는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어떻게요? ‘재림의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 고 속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이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며 창조 이후 우주 만물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믿는자들의 신앙을 넘어뜨리려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들은 지금까지 아무일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아무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로 속였습니다.

결국 믿는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헛된 말에 현혹되어 그 소망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종말은 분명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종말이 되었든, 세기적인 종말이 되었든 종말은 현실이며 우리는 항상 그 날을 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거나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이들을 우리는 ‘이단’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는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를 받았다고 날을 정해 놓고 세상의 모든 일을 그만두고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자신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영을 받은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잘못된 신앙을 통해 한국 교회에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되었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그 날이 아주 먼 훗날에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무덤에 잠들어 있는지가 언젠데 무슨 재림이 이뤄지겠는가? 라는 무관심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앙태도입니다. 

재림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면 현실의 삶에 집착하게 되며 결국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은 반드시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우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우주적 종말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인 종말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언제 어떻게 우리가 개인의 종말을 맞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하루하루를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이 재림에 대한 신앙이 흔들린 이유는 당시 성도들이 직면한 극심한 환난과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가운데 극심한 박해가 생겼습니다. 
주후64년경에 네로 황제가 로마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화 혐의를 씌워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각 지방 정부 당국자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요동치는 혼란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워 극심한 박해를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두려운 마음에 배교를 하거나 아직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동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변에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생의 위기가 올 때 희망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 신앙을 등지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위기가 올 때 기다림의 신앙을 가지고 이것을 잘 넘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무능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실직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면서 자기는 인생의 실패자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을까요? 
소피아라는 이름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원하셨던 그 일을 시작하셔야 할 때인가 봐요.” 라면서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고 자신은 얼마든지 그 일을 위해 기다릴 수 있음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남편이 원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하였기에 남편은 열심히 작품을 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10년이라는 칩거 끝에 19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걸작, ‘주홍글씨’ 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너새니얼 호손’ 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 아내의 기다림이 오히려 새로운 축복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위기는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보게 하며 그것을 한차원도 높게 해 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베드로서를 통해 극심한 환난과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 재림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8절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지배 받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 개념을 가지고 주님의 재림이 있다 없다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벌써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2천년이 지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으로 볼 때는 불과 이틀 밖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가운데 주님이 길이 참으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즉 바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연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 것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아무리 긴 시간도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기다림의 시간보다 만나는 즐거움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자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고,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원하기는 하나님의 미래를 마음속으로 미리 즐기면서, 기다림의 행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10절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주의 재림의 날에는 모든 일이 다 드러납니다. 
따라서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꿈은 아무에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꿈이 이루어지는지, 깨어지는지는 당사자가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준비된 사람에게는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준비되지 못한 자에게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까?

11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라고 하신 말씀처럼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것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 입니다. 

거룩이란 구별되다는 뜻으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거짓과 부정과 음란과 우상이 가득한 세상에서 거룩한 옷을 입고, 진리를 붙잡고 살고자 몸부림치는 구별된 삶이 곧 거룩한 행실이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장차 여러분의 미래가 소망과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과 경건한 삶을 위해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루실 새로운 세상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며 이것을 날마다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은 그 인생이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고환암을 극복한 세계 최고의 자전거 선수인 ‘랜스 암스토롱’ 자신의 자서전에서 ‘내게 1%의 희망만 주어져도 나는 그 희망을 위해 달린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1%의 희망만을 가지고도 암을 극복하고 달려가는 사람이 있는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미래를 소망하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때로는 원치 않는 일들과 인생의 위기로 인해 우리의 희망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상황이나 환경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을 새롭게 함으로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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