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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고전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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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설렘입니다 (고전 1:4-9)

1970-80년대 직장인들의 필독서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대하소설이 있었습니다. 야마오카 소하치<본명은 후지노 쇼지(藤野庄蔵), 1907-1978>라는 일본 소설가가 쓴 『대망』이라는 일본 소설입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이 소설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까지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통일을 이룰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대망의 꿈을 꾸면서 일본을 호령했던 유명한 사람 셋이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幕府, 1542~1616)입니다. 『대망』이라는 소설은 이 세 사람을 다루는데, 특히 일본의 통일을 이루고 에도 막부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도쿠가와는 1542년 오카자키(岡崎)라는 지방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인질로 잡혀 무려 14년 동안이나 인질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갖은 수모와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만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참아냅니다.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를 주군으로 섬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품은 야망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37살 때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게 됩니다. 당시 일본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한 오다 노부나가가 그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그의 아내와 큰 아들을 처단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그런 요구를 따르게 됩니다. 

지금은 자신에게 힘이 없기에,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야망을 포기할 수 없기에 아내를 처형하고 아들을 할복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야망을 아내와 아들의 목숨과 바꾸는 비정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3년 후, 오다가 자신의 신복에게 모반을 당해 자결하고 맙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토쿠가와는 히데요시에게 맞서지 않고 자신의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1598년 히데요시가 6살 난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드디어 그의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대가였던 그는 히데요시 가문을 곧바로 무너뜨리지 않고 패망공작을 벌이며 오랜 시간 기다립니다. 그 후 1615년 그의 나이 74세 때 드디어 오사카 성을 공격해 히데요시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일본 통일의 대업을 완성시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천재적인 자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대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에도 막부시대를 열게 된 것은 ‘참을 인(忍)자’ 하나를 평생 가슴에 품고 자신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기다림의 열매였습니다. 그의 가슴에 품었던 대망(大望)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오랜 기간 기다렸고, 기다림의 끝에 결국 일본 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대 세 걸출한 인물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세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비유하곤 합니다. ‘새장의 새가 울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그 세 사람은 이렇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다혈질에 성미가 급한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를 즉시 죽여버리고, 꾀가 많고 적극적인 성격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새를 울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대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가 울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기다림 없이 뭔가를 얻을 수도 없고, 기다림이 없이 뭔가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에게 끊임없이 기다림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기다리게 하신 후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노아는 120년을 기다리며 방주를 만들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43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내몰린 후 40년의 세월을 기다린 후에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부터 기다림의 계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성탄절 전까지 네 주를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절이라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말입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2천년 전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후 ‘다시 오마’ 약속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림절은 기다림과 설렘의 절기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다림의 열망이 대단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맨 앞부분입니다. 1-3절은 편지를 보내면서 하는 인사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문인 4절부터가 본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의 본론을 시작하면서 감사의 말을 먼저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 그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 두 가지만 꼽는다면, 첫째는 그들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입니다. 본문 7절에서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한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에 비해서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을 비롯해서 온 교우들에게 은사가 다양하고 풍부하게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서 교회 안에 질서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은사가 풍성한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감사한 것은 그들의 신앙이 견고한 것으로 인한 감사입니다. 본문 5-6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이 풍부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여기서 말하는 ‘언변’은 말을 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한 표현으로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립보서 3:8)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에 대한 믿음의 지식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은사가 풍부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바라보며 감사한 것을 한 마디로 더 요약한다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면 ‘마라나타’라고 인사했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은 ‘주님께서 곧 임하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말이 아람어로 마라나타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초대교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람어로 ‘마라나타’라고 인사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 속에 주님이 어서 오시기를 간곡하게 기다리고 열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열망하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놔두고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가게 되었습니다. 3년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한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있던 아내가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내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그 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며칠만 기다려라.’ 그런 연락을 받으면 대부분의 아내들은 기쁨과 설렘으로 남편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대청소를 합니다. 밀려놓았던 빨래도 다 해놓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시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합니다. 남편이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아이들 역시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아빠가 가지고 올 선물을 기대하며 아빠를 기다립니다. 아빠가 없는 동안 배웠던 노래도 불러드릴 것이고, 유치원에서 배웠던 춤도 춰 드릴 것이라고 연습도 해 봅니다. 그동안 받았던 상장도 다 모아놓습니다. 남편이 / 아빠가 오시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돌아오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던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서 아이들이 망나니가 되었다면 남편 돌아오는 것이 결코 반갑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렵습니다. 남편이 땀 흘리며 고생해서 벌어다준 돈을 잘 모아두었다면 남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겠지만,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놀음을 해서 돈을 다 탕진해버렸다든지, 명품 가방이나 옷을 산다고 사치하면서 돈을 다 헛된 곳에 써버렸다면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오리라.”(요한복음 14:3) 그리고 성경은 끊임없이 증언합니다. 주님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요.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언젠가 다시 오실텐데 주님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주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다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실 때에 우리는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이면서 동시에 회개의 절기입니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절기입니다. 그 동안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서기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만한 모습이 있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맞을 날이 기쁨과 설렘의 날이 됩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3:2)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회개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해야 할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죄는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우리는 모든 죄와 허물, 잘못된 것들을 다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만날 날이 기쁨과 설렘의 날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소식이 우리에게 기쁨과 설렘의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주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잘 보여주는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있었습니다. 모두 다 등불을 들고 신랑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서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신랑이 늦게 왔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다 열 명의 처녀들이 잠에 빠져 있는데, 한 밤 중에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신랑이 왔다.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 잠에 빠져 있던 처녀들은 급히 일어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등불을 점검하는데, 다섯 명이 들고 있는 등에는 기름이 여유가 있었습니다. 나머지 다섯 명의 등에는 기름이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등에 기름이 남아 있는 다섯 명은 신랑을 맞아 잔칫집에 들어갔지만, 기름이 바닥나서 불을 켜지 못한 나머지 다섯 명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기름을 급히 준비해서 잔칫집에 왔지만, 잔칫집의 문은 이미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을 해 봐도 이미 닫혀진 문은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명의 처녀들도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쁨과 설레는 마음으로 등불을 켜 들고서 신랑을 맞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기쁨과 설렘으로 신랑을 기다렸는데,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고 잔칫집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랑이 늦게 올 때에 자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랑을 맞아 잔칫집에 들어간 지혜로운 다섯 명의 처녀들도 신랑이 늦게 올 때에 졸고 있었습니다. 잠을 잤습니다.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한 다섯 명만 졸며 잔 것이 아닙니다. 열 명 모두가 졸며 잤습니다. 

그러면 차이는 무엇입니까? 신랑을 맞아 잔칫집에 들어간 다섯 명은 신랑이 늦게 올지라도 신랑을 맞이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반대로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림받은 다섯 명은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적당하게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열 처녀 비유 끝에 우리 주님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말씀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신랑을 맞을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신랑을 맞이하는데 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림절에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림절에는 특별히 그런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동안 준비하는데 게을렀다면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등에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그 순간까지 신랑되신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늘 마라타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불순물이 들어왔다면 이 절기에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곧 오리리라’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늘 밤에 오신다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동안 기름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처럼 살았다면, 이번 기회에 넉넉한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하는 신앙을 회복하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신앙의 무지 속에 살던 우리의 삶에 신앙의 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세상 욕심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교만함을 겸손함으로 바꿔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된 삶을 살면 우리는 주님 오심이 기쁨이요 주님을 기다림이 설렘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 주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부끄러움 없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회개하고 준비된 삶을 살면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에게 대림절의 기다림은 설렘인가? 두려움인가?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네 모든 삶을 내려놓고 오너라’라고 우리의 생명을 불러가신다면 무어라 말할까 생각해 보십시다. “마라나타 -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이제야 오셨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이제 곧 가마’라고 말씀하실 때, 나에게 오라 부르시며 나를 불러가실 때 ‘주님 왜 벌써 오시려 하십니까? 지금 너무너무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왜 내 인생에 끼어들어 망치려 하십니까? 조금 더 있다 오시면 안 됩니까?’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 너무 좋은 세상 살고 있는데 더 있다가 가면 안 됩니까”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을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 같아 한 숨만 쉬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진 않겠습니까?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주님 오심이 결코 두려움이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 오심은 행복입니다. 주님 만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렙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생각하면 행복해지고,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읽을 때에 가슴이 설레는 것,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용혜원 시인이 쓴 ‘기다림’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삶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기다림이 있네. 

  우리네 삶은 시작부터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위로 받고 
  기다려 달라는 부탁하며 살아가네. 
  봄을 기다림이 
  꽃으로 피어나고 
  가을을 기다림이 
  탐스런 열매로 익어가듯.

  삶의 계절은 
  기다림의 고통, 멋, 그리움이지 않은가? 
  기다림은 생명, 희망이지. 
  우리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데 
  어느 날인가
  기다릴 이유가 없을 때 
  떠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네 가슴은 일생을 두고 
  기다림에 설레는 것,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것,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여러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무언가를 바라보며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요 행복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설레게 만듭니다. 그 설렘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행복을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 설렘이 있기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의 춤을 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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