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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과 밧세바(다윗의 생애10) (삼하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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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밧세바(다윗의 생애10) (삼하 11:1-5)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오늘은 남자의 위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소위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남자의 위기입니다. 본문에는 그러한 남자의 대표로 다윗이 등장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평정하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다윗의 나이는 약 50세 정도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년의 나이 40대, 50대, 60대. 남자들이 집중적인 위기에 도달하는 시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에 들어온 치명적인 죄의 사건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축복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축복의 삶이 저주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은 한 여인과 간음을 행했습니다. 그것도 남편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수하에 있던 충성스러운 부하였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죄악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이것보다 더 큰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권력을 자기의 쾌락과 욕망을 채우는 일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시고 권력을 주실 때, 그것은 공동체와 백성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권력을 철저하게 남용했습니다. 그가 가진 권력으로 백성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파괴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권력의 사유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권력을 사유하려 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자기 자리를 보존하려 하는 권력의 사유화를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십니다. 

다윗은 왕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서 힘없는 여인의 정조를 빼앗았습니다. 충성된 부하를 적진에 보내어 불쌍한 죽음을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무고한 병사들을 허무한 죽음으로 내몰았던 장본인이 다윗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악합니다. 그리고 비열합니다. 권력을 자기 욕망대로 남용하는 거짓지도자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래 다윗은 어떤 인물입니까? 참 훌륭하고 놀라운 인물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우리는 두 명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다윗이라고 하면 둘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골리앗이고 하나는 밧세바입니다. 골리앗이 누구입니까? 다윗이 젊은 소년기였을 때에 만난 적군 장수의 이름입니다. 이 거대한 장수 골리앗과 싸웠을 때 다윗에게는 용기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이스라엘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밧세바는 누구입니까? 이제 다윗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냘픈 여인의 아름다움에 정욕으로 미혹되었습니다. 여지없이 무너져버린 한 그런 속물적인 남성으로 다윗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신앙 인물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그가 갖고 있는 약점 그대로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모습을 보면 아주 비열하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다윗이 변질되고 있는지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해야 할 일과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자가 어떨 때 멋지십니까? 여자들은 어떤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까요? 남자도 남자를 보면서 ‘참 멋진 남자다’라고 여길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일에 몰두할 때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여 수고하고 땀방울 흘릴 때의 남자가 가장 멋진 남자입니다. 그러면 가장 멋없고 위험한 남자가 누구일까요? 그것은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며 인생을 낭비하는 남자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과 암몬이 서로 전쟁 중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봄의 계절이 왔습니다. 이제 각 나라마다 전쟁을 위한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쟁터에 앞장서는 사람이 바로 왕이었습니다. 여러분, 고대 국가가 모두 그렇지 않습니까? 왕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왕이 담대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놀랍게도 다윗이 자기 부하들을 다 내보내고 자기는 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사무엘하 11:1)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할 일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남자가 건강함에도 일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다른 생각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할 일이 없다보니 대낮인데도 낮잠부터 잤습니다. 그리고 저녁까지 혼자 침상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에는 이러한 다윗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2)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셨지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언제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까? 저녁때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낮에는 무엇을 했을까요? 계속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낮잠을 잤을 것입니다. 잠깐 즐기는 오수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아무 할 일이 없어 대낮에 침대에서 누워 자다가 저녁때 일어난 다윗의 인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돈도 있었습니다. 그는 재물도 있었습니다. 건강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권력까지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넘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펑펑 남아돌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었을까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사명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가야할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힘만을 가진 모습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성적 유혹에 빠졌습니다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데 할 일이 없으면 남자들이 제일 먼저 빠지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적 유혹입니다. 성적 타락입니다. 성적 부패의 길을 향해서 가장 먼저 나아갑니다. 중년 남자들의 위험한 도박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여인을 탐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다윗의 모습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다윗은 왕궁 옥상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심히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남자로서 호기심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호기심과 남자의 정욕이 함께 맞물려졌을 때 강도가 높아졌습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에 대한 욕망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묵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묵상한다고 Q.T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을 묵상하면서 다윗은 몰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사탄이 인간을 언제 유혹할까요? 여러 가지 유혹의 시기가 있지만 한가 할 때, 할 일이 없을 때, 사명을 잃었을 때, 그때 사탄은 우리가 악한 일을 하도록, 거짓과 불의한 일을 하도록, 음행의 일에 참여하도록 유혹합니다. 다윗의 눈에 띈 그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2下)

우연이었을까요? 의도적이었을까요? 남자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여러 해석을 하고 논쟁을 합니다. “이것은 다윗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 여인의 책임이다.” 라고 몰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여인은 수동적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모든 행위를 주도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잘못된 욕망을 제어할 마지막 기회를 놓쳤습니다

다윗이 부하에게 물었습니다. “목욕하는 저 여인이 도대체 누구냐?” 다윗은 한 걸음 더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경고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 여인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꾸 보챘습니다. 그런데 하인이 갔다 와서 말하는 모습을 보면 가관입니다. 왕이 알아오라고 하인에게 명령하면 하인은 “이것은 이렇습니다.”라고 서술문으로 말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인은 다윗 왕에게 의문문으로 대꾸합니다. 이것은 아주 불손한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사무엘하 11:3)

신하는 이야기한 것입니다. “왕이시여, 남의 여자입니다. 우리아의 아내입니다. 당신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관심을 갖고 자꾸만 보채십니까?” 그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양심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제 멈춰라. 그 정도에서 멈춰라. 더 가지 마라. 거기에서 멈춰야 한다.”고 하는 첫 번째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여인이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욕망을 제어할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할 일이 없어 사명을 잃어버리고 정욕이 그에 마음을 사로잡은 순간 그는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했습니다. 그가 가진 지적인 능력, 분별력, 용감했던 의지, 모두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행한 것이 있습니다. 4절의 말씀을 보면 3가지의 동사가 나옵니다. 하인을 여인에게 보냈습니다.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동침했습니다. 이 3가지 동사가 짧게 나옵니다. “보냈다.” “데리고 왔다.” “동침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욕망입니다. 쾌락을 즐기려고 하는 남자의 모든 욕구가 이 동사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양심에 전혀 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겸손한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용기 있던 모습도 없어졌습니다. 사려 깊은 지혜와 총명의 인물이라고 하는 다윗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행하고 나서는 ‘아, 이제 됐구나.’ 하고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11:5)

어느 날 밧세바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만든 덫에 자기가 걸려들었음을 알았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현실과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이 방향이 계속 뒤틀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제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인의 정조를 짓밟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속에 계략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내 죄를 감추어야 하는데… 이것을 백성들이 알면 안 되는데…’ 간악한 의도가 그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더 읽어보면 어떻게 했습니까? 전쟁터에 나가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동침하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건 내 아이가 아니라 네 자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내가 어찌 전쟁 중에서 아내와 함께 동침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다윗 성을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신의 심복인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아를 전쟁의 최전방에 내세우게 해라. 그리고 전쟁이 치열할 때 그 부대를 다 후퇴시켜라. 혼자 남게 해라.”

그래서 우리아는 전쟁터에 나아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이 완전범죄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혹 누가 알았어도 내가 왕인데 나에게 대적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간음죄를 범하고, 살인죄를 범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죄를 범하고 나서도 자신이 무엇을 행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때 지켜보았던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관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역사를 그대로 놔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권력을 자기 욕심을 위해서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징계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인데, 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서 악하고 거짓된 일을 행합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그랬습니다. 아니, 영적인 권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회의 권력자들이 그렇습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어야 합니다. 권력이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사무엘하 12:10)

“네가 나를 업신여긴 것이다. 내 말씀을 업신여긴 것이다. 네가 나 보기에 악을 행한 것이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비열해졌느냐? 네가 어떻게 이렇게 완악해졌느냐? 네 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렸구나!” 하고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집에 칼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엄청난 징계를 줍니다. 이때부터 다윗의 생애는 서서히 몰락해갔습니다. 

다윗의 아들과 아들들이 서로 싸움을 하고 죽입니다. 아들과 딸들이 강간을 행하게 됩니다. 또한 압살롬이라는 멋진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를 반역합니다. 아버지에게 칼을 빼들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아들 때문에 다윗은 도망을 다닙니다. 다윗의 가문이 풍비박산 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렇게 칭찬하셨던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고 말씀하시며 소중히 여기셨던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들을 끊어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조심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남성 여러분, 사람들이 “야, 너 잘나간다. 너 출세했구나. 너 성공했구나.”라고 할 때가 가장 영적으로 위험할 때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데 거기다가 시간도 펑펑 남아돌면 그때가 위험할 때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내 아내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더 좋은 것이 없는가 하는 마음을 품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그렇게 겸손하던 다윗은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지혜롭던 다윗은 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던 그의 용기와 담대함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 내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끊어야 합니다. 내일 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멈춰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시는 분임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다시 덧입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남성 성도님들, 다윗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아니하면 언제 우리가 흔들리고 넘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셔서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온전히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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