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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 : 기묘자(1) (삿 13:1-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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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 기묘자(1) (삿 13:1-5,17-18)

I. 문제 제기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앵무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양 다리에 끈이 

한쪽 다리에는 빨간 끈을 매달고 다른 한쪽에는 파란 끈을 매달고 빨간 끈은 당기면 영어로 사람들과 얘기를 합니다. 
파란 끈을 잡아 당기면 한국말로 사람들과 얘기를 합니다. 
그 앵무새를 사러왔던 손님이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두 끈을 동시에 당기면 어떻게 합니까?”

앵무새가 대답했습니다. 
“야 멍청아! 넘어지지.”

버티고 있어야 될 다리도 버티고 있지 못했고 붙들고 있어야 될 끈도 마지막 끈까지 놓쳐버리고 비참하게 죽어간 한 사사의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사사를 가장 위대한 사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고 신앙의 영웅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비밀이 기묘자라는 이 말에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푸는 비밀 코드가 기묘자!입니다. 

세상 살아가다가 실수할 때가 있고 때로는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실패를 경험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날 수 있고 타락했지만 다시 승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비밀 코드가 기묘자라는 이 말에 숨겨져 있습니다. 

사사기는 3400년전 중동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사사기를 여호수아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와 함께 전기예언서 목록에 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서로 알고 있는데 히브리인들은 사사기를 예언서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음성,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 왕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역사입니다. 
사사기를 대사사와 소사사로 구분하는데 훌륭한 일을 하면 대사사고 훌륭한 일을 못하면 소사사가 아니라 사사기의 기록 분량이 많으면 대사사라 부르게 됩니다. 
그 중 가강 긴 기록이 기드온과 삼손입니다. 

그만큼 삼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성경의 이야기, 교훈이 많다는 것입니다. 총 21장 618절 가운데 삼손에게 4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삼손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다 보면 구약의 특이한 기록 가운데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이 부지런히 나타나고 부지런히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질문들>

여러분은 삼손? 그랬을 때 머릿속에 어떤 그림, 어떤 이미지가 지나 갑니까?
머리 길게 기른 힘센 장수, 여자들의 치마폭에 빠져서 인생을 망친 플레이보이,
힘의 상징인 머리가 잘려지고 두 눈이 뽑힌채 비참하게 죽어간 한 영웅...
그런 정도로 머릿속에 지나가고 있습니까?

삼손이 예언서 목록에 들어 있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삼손은 나실인이었는데 바람둥이로 살다 죽었다. 

포도주도 먹지 말아야 되고 시체도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이 모든 계명을 어기고 비참하게 죽어갔으니 너희들은 그러지 말아라. 하는 교훈을 어기고 비참하게 죽어갔으니 너희들은 그러지 말아라. 하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잘못사용하다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신약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 보면 믿음의 전당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당당히 삼손의 이름이 있습니다. 삼손이 믿음의 전당에 오를 만한 그 신앙이 무엇일까요?

삼손은 실패한 자인가? 아니면 위대한 성공자인가?
인간의 눈에 실패했는데 그가 성공자라면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오늘 우리는 사사기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삼손의 기록은 13장 - 16장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3장 태어나는 얘기입니다. 부모 얘기입니다. 
14, 15, 16장 삼손이 활동을 하는데 매장 시작이 삼손이 이방 여자 만나러 가는 얘기로 시작합니다. 

14장 1절 블레셋 여자를 보고
15장 1절 결혼한 이방 아내를 찾아 갔다
16장 1절 한 기생을 보았다
16장 4절 들릴라를 사랑하매

무슨 사사의 얘기가 이 모양입니까? 사사기를 읽은 독자들은 혼란속에 빠져듭니다.

삼손은 인류 역사상 가장 힘이 센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 시대 그가 살았다면 힘과 주먹으로 하는 모든 경기는 금메달을 따고 챔피언이 되었을 것입니다. 

역도, 레슬링, 권투, 이중 격투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므로 삼손은 주일학교 설교의 단골 메뉴가 되었습니다. 
주일학교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은 수도없이 삼손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삼손에 관해서는 잘 압니다. 
소설가, 음악가, 영화제작자, 조각가, 화가... 이 모든 사람들의 재미있는 소재 거리였습니다. 

삼손과 들릴라, 여우 300 마리를 잡아 꼬리에 불을 매달고 곡식 평야에 딤나 평원을 불살랐던 사람, 나귀턱뼈 하나로 1천명 군사를 맨손으로 무찌른 사람, 사자를 양새끼 죽이듯이 찢어 죽일 수 있는 사람, 맨 손으로 거대한 신전 기둥뿌리를 뽑아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을 다 죽인 얘기.. 

이 공상 소설같은 이야기. 이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사기를 읽으며 신학적 의미, 복음적 의미, 성경적 의미를 알고 읽었을까? 


II. 삼손 시대와 그 (바알) 악

성경적 메시지가 안 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 바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며 
“저게 뭐야?”

옆에 있던 바보가 
“손가락이네!” 
“아 밝다” 
“너 메니큐어 칠했잖아” 

달을 봐야 하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으니 메시지가 안 보이지요. 
삼손 이야기는 손가락입니다. 그 손가락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보여야 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예언자들의 손가락을 따라가면 끝에 반드시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 삶에 예수님이 보이면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예수님이 안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절망하고 낙심하고 불평하게 되겠지요.

삼손이란 이란 이름의 뜻은 작은 태양 (Sunny Boy).

태양을 뜻하는 “셈 쉬”에 “온”이라는 지소사가 붙어 “셈쉬온” 즉 “작은 태양”이란 뜻입니다. 한줄기 햇빛같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대. 야! 삼손이다. 한 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이 이름이 삼손입니다. 

삼손 이야기를 읽을때 삼손의 영웅적 활약에 관심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인간 영웅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삼손의 도덕적 미성숙, 실수와 실패에만 눈이 머물러 있어도 성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삼손 사건의 기획, 연출가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손이 실수해도 인내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손이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선택했으면 못난 자도, 실수 투성이 나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삼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한번 사명을 주셨으면, 사역자로 선택해 주셨으면 끝까지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손만 놓지 않으면 약점까지 품어 약점을 강점을 바꾸어 당신의 비전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바알>

삼손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사기 13장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악”인데 히브리 원문에는 정관사가 붙어 “그 악!”입니다. 사사시대의 지독했던 바로 그 악 - 바알 숭배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쳐두고 왜 바알에게 매료되어야 했을까요?
이스라엘은 유목민입니다. 풀 뜯어 먹고, 양젓 - 비리한 양 젓 짜 먹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만 먹었습니다. 떡, 빵, 죽, 밥, 튀김, 볶음, 수제비,,,

광야에서 옷 한벌로 40년동안 입었는데 옷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와? 굉장하다. 당신이 옷 한번로 살아봐라 굉장한지! 빨래도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농사에서 쌀로 떡을 만들고 요리가 가능합니다. 
양고기를 포도주에 곁들어 올리브에 찍어 먹고 과일을 디저트로 먹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철따라 새옷을 입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이가 율법 공부, 일상생활이 제사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갔더니 똑같은 제사를 지내도 차원이 다릅니다. 
춤, 노래, 자유, 여사제, 쾌락, 정욕을 누리고 삽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매일 앞에 구걸하듯 얻어 먹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먹고 남은 것은 쌓아 놓을 수 있습니다. 잉여 농산물이 가능했습니다. 재산 축적이 가능했습니다. 사업이 가능했습니다. 

광야에선 기적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지요.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기적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농사 기술, 문화, 과학이 필요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 농사신으로 비도 내리고 땅도 주관한다고 얘기합니다. 바알이 출세, 성공시켜 줄 것이라 합니다. 광야의 하나님이 가나안 땅의 바알로 바뀌어 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사 지낼 때는 하나님 하나님 그러다가 세상에 나가서 살때는 바알 바알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출세와 연결되어졌던 바알신, 성공과 연결되어졌던 바알신. 쾌락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욕망을 이루는 것을 인간적이라고 부추겼던 바알신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을 못 춥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몽땅 불태워 없애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술 더 떠서 가나안 사람들보다 더 성공하기 원했습니다. 우리가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 한다면 바알을 믿는 사람들보다 더 성공해야지. 더 출세해야지. 더 많이 가져야지. 더 재미있게 살아야지. 그래서 바알신에게 매료를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십니다. 이방 족속들의 손에 넘겨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모진 고통을 겪습니다. 
삼손시대엔 그 악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께서 당시 가장 악독한 블레셋에 이스라엘을 넘겼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때 사사기에 등장하는 세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회개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사사를 보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손시대엔 백성들이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기록이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고 타락할 수 있지만 기도하면 다시 일어납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더 멋진 기회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기도가 막혀지면 그건 악이요 저주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와도 같습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맥박만 팔딱거리는 모습이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무조건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구원, 일방적인 구원 외에는 어떤 구원의 길도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했던 인간, 전적부패, 완전타락,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전한 구원, 무조건적인 용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사들은 군대를 모아서 싸워 적을 무찔렀습니다.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면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한번도 군대를 모아서 싸운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유다 지파가 한번은 삼천명의 군사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적을 무찌르고 온 삼손을 잡아 적에게 넘기기 위해서 유다지파가 일어났던 적이 한번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처절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아픈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방에게 짓밟히고 또 짓밟혀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백성. 이것이 삼손시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백성이 이 꼴로 망해가느냐? 탄식하는 백성도 없었고 기도하는 가정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주기도문은 매일같이 외우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내 발에 짓밟히면서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온 백성의 칭송을 받아야 될 교회가 온 백성의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사사시대요 삼손시대가 아니겠는가? 죄를 지어도 부끄러운줄 모르고 신앙이 썩고 병들어도 내 영혼이 오염되어져도 냄새나는 줄 모르는 백성들 그것이 바로 오늘 사사시대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III. 기묘자

사사기 삼손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특이한 사항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삼손이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해야 하는데 
“~구원하기 시작하리라”했습니다. 

도무지 길이 없을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조금 구원하기 시작한 이야기가 삼손의 이야기입니다. 

사사 활동 마지막에는 언제나 샬롬(태평)한 세월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입다 시대와 삼손시대만은 샬롬의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삼손이 20년을 사사로 지내니라. 사사로 지낸 것으로 끝입니다. 

삼손의 아버지 이름이 2절에 등장합니다.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마노아라는 이름 속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노아는 노아(안식)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안식이 없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13장에만 마노아 이름이 7번 등장합니다. 생략해도 좋은 상황에서도 계속 “마노아”라는 이름을 고집합니다. 안식이 없는 시대, 축복이 없는 시대 - 바로 그 시대가 삼손시대였음을 사사기 저자는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영적 최악의 시대, 샬롬과 안식을 잃어버렸던 시대, 기도가 중단된 시대, 부르짖음이 멈추어진 시대, 구원의 가망이 전혀 없던 시대,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그들 가운데 나타납니까? 

17절 마노아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18절 “내 이름은 기묘자라!” 이름이 기묘하지요.

요한계시록. 교회들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데 교회 형편과 영적인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릅니다. 
일곱 별을 가지신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그 눈이 불꽃같으신 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그때마다 예수의 얼굴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오늘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어떤 분에게는 용서의 예수님, 어떤 분에게는 능력의 예수님으로, 또 어떤 분에게는 사랑의 예수님으로, 치료의 예수님으로, 책망하시는 예수님으로, 안아 주시는 예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삼손의 가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기묘자였습니다. 
기묘자 = 히브리(펠리) = secret(비밀, 공동번역)
wonderful, beyond understandng(영어 성경)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만큼 신비한 분, 하나님 사랑의 비밀, 하나님 은혜의 비밀, 이해 못하는 것 어쩌면 당연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엔 너무 멀어서 커서 이해하기 어려운 분 - 기묘자입니다. 

삼손의 하나님. 삼손이 끊임없이 실수를 반복합니다.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립니다. 그러나 끝까지 붙들고 기어이 삼손에게 맡겨주신 미션(Mission)을 이루고야 마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명을 이루고 마시는 기묘자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기묘자입니다. 왜 나를 구원해 주셨는지? 왜 나를 축복하고 계시는지? 왜 나를 사용하시는지? 나 같으면 나 같은 자는 안 쓸 것입니다. 잘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인격자도 많고 돈 많은 사람도 많고 그런데 왜 나를 쓰시는지... 하나님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기묘자 하나님이십니다. 

♪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저는 어린시절 교회 나가면서 목사가 되기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청소년이 되면서 목사가 된다는게 초라하게 여겨졌습니다.

목사가 된는 것을 포기하고 나를 목사되게 만들겠다고 주변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육군사관학교에 시험을 쳤습니다. 제가 육군사관학교 필기고사에 시험이 떨어질만큼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상한 곳에서 저를 떨어뜨렸습니다. 태능 육군사관학교 철길 앞에서 소주 한잔을 마시고 죽겠다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죽이시지 않으셨는지, 왜 나를 버리시지 않으셨는지? 그 순간 어린시절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그 생각이 불같이 내 머릿속에 왜 지나갔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신학교로 달려가서 모든 자존심을 꺾고 신학생이 되기로 왜 결단을 했는지. 

신학생이 되어서도 소명에 의심을 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 그날까지. 기도원에 올라가서 내가 목사의 길을 기어이 가야 합니까?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부둥켜 안고 씨름하며 목사의 길을 가고 싶지 않아서 몸부림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고 이 길을 가게 하시는지. 나는 나를 압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시켰는지.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나를 품으시고 다시 씻어 주시고 다시 힘을 주시고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다시 용기를 주셨는지. .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주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지난 2천년 가운데 한번도 없었던 위복주의 신앙이 한국교회에 밀어닥쳤습니다. 목사들 지도자들이 가장 방만한 시대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이 처음 전해질때에, 선교사들이 피흘려 복음을 우리에게 보내줄때에, 과연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순수하기 짝이 없었고 그들의 열정은 불같아서 얼음덩이 같은 이 민족, 이 강산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성장되는 과정속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모든 것 우선순위에 교회가 있었고 신앙생활이 있었습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복음을 전했고 전도하며 교회를 성장시켜 왔습니다. 자랑스런 믿음의 선진들이었습니다. 지금 교회도 커졌고 잘난 사람도 교회 안에 많고 부자도 많고 높은 사람도 많고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교회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한국교회 이 민족 역사를 책임지고 나가야 하는데 사명과 책임을 사라졌고 누리기만 급급한 한국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촛대를 옮기실 것 같은데 왜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공동체를 사랑하시는지. 아직도 왜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지. 왜 우리에게 아직도 기대를 가지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민족을 위하여 이 민족 교회를 쓰실 것인데 우리 교회를 쓰실 것인데 우리가 무엇이 잘나서. 어떤 충성을 했길래 우리를 사랑하신단 말입니까? .


IV. 위장 결혼 작전(비록 실패하지만-)

13장 마지막 두 절에 보면 삼손이 태어났다. 자랐다.(24절)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주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감동했다(25절)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면 14장 1절 - 삼손이 자라서 복을 받았다.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다. 그 다음절 우리는 어떤 말씀을 기억할까요? 삼손이 일어나서 젊은이들 모아서 블레셋과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멋있게 승리했다. 이런 것을 기대하는데. 

그런데 14장 1절 -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이 복을 주시자,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어찌 가능할까요? 사사기 독자들이 점점 더 깊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숨만 할딱거리는 중환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 누가 외쳐도 모일 사람이 없습니다. 설교해도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삼손은 홀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동력자가 없을 때에 외롭고도 고독한 사사 삼손, 그 전쟁 전략이 바로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삼손의 위장결혼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여 메시지를 전해야 했듯이 삼손은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틈을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무도 도움받지 못하고 블레셋을 공격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부모조차 기가 막혀서 극구 반대합니다. 그런데 삼손이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니 허락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여기 좋아한다는 말, 우리말 번역이 애매합니다.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결혼식을 내가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야사르” - 합당하다, 옳다, 정당하다는 이상한 말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사사기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옳은대로”가 “야사르”입니다.  옳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결혼이 옳다는 것입니다.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결혼을 하면 좋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사르”입니다. 

삼손을 플레이보이로 이해하던 독자들은 이 해석을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위장결혼이라니? 

14장 3절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14장 4절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일제치하 3.1독립만세 사건을 펼쳐야 하는데 아무도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삼손 혼자 거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죽지 않았다. 다 죽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삼손 나 혼자서라도 싸워 이긴다. 

사사기 저자는 이 위장결혼 전략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2차대전 이후에 영국의 성공회가 극도로 타락했을 때에 뎀즈 강물에 있던 한 젊은 신부가 개혁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이 와서 이보게 젊은이 “너 혼자 펄펄 끓고 의로운 척 한다고 해서 썩어질 대로 썩어진 이 영국 사회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너 혼자 불같이 끓는다고 뎀즈 강을 얼음덩이가 둥실둥실 떠내려 오는 저 강을 녹일 수 있고 끓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때 젊은 신부가 눈을 무섭게 뜨며 지도자들에게 얘기합니다. 

“나 혼자 뎀즈 강을 끓게 할 수야 없겠지요. 나 혼자 썩어가는 영국 사회를 다시 정화시킬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당신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서 뎀즈강에 집어 넣을때 나 혼자만큼은 뎀즈 강 가운데서 이글이글 끓고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의롭게 모든 사람이 다 거룩하게 살지 못해도 나 혼자 만큼, 내가 주어진 일터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마을에서 주의 사명자로서 이글이글 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한국교회 이 땅의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촛대를 옮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삼손이 우리에게 이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삼손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넘어져 있을 때도 다시 일으켜 주더라. 하나님은 실수를 만회시켜 주시더라. 내가 타락해도 다시 기회를 주시더라. 일어나자 한국교회여 성도들아 낙심하지 말거라.. 포기하지 말거라.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다. 

하나님! 
우리의 약점, 고난 실수를 은혜로 사랑으로 만회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묘하신 하나님을 믿고 실수했다고 해서 자학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있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한번 실패가 영원한 실패인양 넘어져 있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손을 붙들고 걸어가면 새로운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회의 문은 절대로 닫혀지지 않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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