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명과 욕심 (마 20:17-27)

첨부 1


사명과 욕심 (마 20:17-27)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마태 20;17-27절 말씀으로‘사명과 욕심’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는 은혜가 성도님들 위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시겠습니다.  ‘사명과 욕심’
 
오늘 성경본문 말씀이 기록된 마태복음의 특징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시간순서 보다는 ‘사건과 설교’, 사건과 설교, 이런 식으로 크게 5개의 사건과 설교의 묶음으로,  주제 중심적인 기록을 마태가 의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5부에 해당됩니다. 5부는 19;3절-26;5절로   ‘각종 논쟁과 수난 예언’ 이야기와 ‘감람산 설교’ 로 되어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 예언’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십자가는 언제나 깊은 묵상의 대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게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혼동하기 쉬운 것은 ‘사명과 욕심의 차이’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을 사명으로 착각하거나,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해서 자주 말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경제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자신들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정치를 하고 사업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오직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그 일들을 한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사명과 욕심의 차이점’ 을 잘 보여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에는 물론 사명의 요소도 있지마는 욕심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저 분이 메시아라면 그 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이다.’ 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따랐던 모습들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겉으로는 사명으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언제쯤 자신들의 욕심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반대급부(反對給付)’ 또는 ‘보상(報償)’이라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수고’를 하니까 나는 무엇이든지 ‘댓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는 생각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보상’ 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제자들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은 옳은 생각입니다. 만약에 ‘보상’ 이 있다면 제자들 말고 누가 그것을 받겠습니까? 제자들이 일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이런 마음이 사명이 아니라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정치(政治)’입니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것이 정치 아닙니까?   무엇이 옳은지를 알려하고 그 옳은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은 ‘사명’이지만,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그 일에 대한 댓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정치입니다.    

지금 여야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시끄럽습니다. 사실 이것은 지금 야당이 여당이었을 때 진행하던 일입니다. 그런데 죽자고 반대합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반대를 해야 다른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계약은 없지 않습니까?  F.T.A도 우리나라에 유리한 것 불리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야당은 F.T.A를 통해 국가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단지 반대를 통해서 여당에게서 얻을 댓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러니 여당도 야당도 아닌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치를 하니 국민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사명보다도 욕심을 더 중요하게 여긴 제자들의 속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만약 사명이었다면 그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뒤를 이었을 것입니다. 사명이었다면 가룟유다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지 않았을 것이고,  제자 중 수제자라고 자처했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멀찍이 따르다가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그물을 내리는 옛날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욕심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가 그들의 욕심의 죽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공들였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판단하고 낙심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십자가’ 앞에서 판단되어져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말로 자기의 욕심을 사명으로 위장하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명예욕(名譽慾)입니다.  교회에 여러 직분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있고 장로님들이 있고 권사님들이 있고 집사님들과 교사들 그리고 각 부서의 여러 임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도 명예직이 없습니다. 다 섬기는 직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것을 명예직으로 착각을 합니다. 직분을 맡으면 그 직분을 통해서 사람들의 존경이라는 댓가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댓가를 바라면 그것은 어떤 큰일 일지라도 이미 사명이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마태 7장을 보면 ‘구제, 금식,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는 참 좋은 일입니다. ‘상(償)’이 약속된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구제와 금식과 기도’의 상을 천국에서 받으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이 세상에서 칭찬을 받아버리면 하늘에서는 받을 상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구제와 금식과 기도’ 같은 좋은 일도 사람들에게 뭔가를 받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 되고,  천국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사명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욕심으로 살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명예, 권력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고, 심지어 패가망신합니다. 장사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물질 때문에 양심을 팔고 윤리도 버립니다.  사명 때문에 하는 일은 어떤 환란과 어려움이 와도 극복을 해내지만 욕심 때문에 하는 사업은 조그만 어려움이 와도 금방 포기 하게 됩니다. 사명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완전히 바뀐 것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난 이후입니다.  오순절이후에는 그들은  사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권력자들 앞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너희들의 말을 듣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행4;19) 고 오히려 당당하게 선언했던 베드로를 봅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면서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공생애를 거의 마치시고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불러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을 하십니다.  

(18-19절)“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성경을 보면 이것이 3번째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6장과 17장에서 두 번이나 장차 그가 십자가를 지실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그가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신 데에는  첫째, 고난이 없는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후에 영광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고난이 없는 영광은 세상에도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도 고생 끝에 낙이 옵니다. 그냥 그냥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일이 그냥 될 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깨달았다면 주님께서 자꾸만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영광만을 꿈꾸는 제자들이기에 주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에 관한 말씀을 하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합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절)  

성경을 찾아보면 세베대의 아내, 즉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이름은 살로매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살로매를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자매로 봅니다.  즉 예수님의 ‘이모’ 라는 말이고,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이종 사촌’입니다. 이 살로메가 예수님께 나와서 간구했습니다. 소위 ‘치마 바람’입니다.  ‘치마 바람’은 정말 무서운 바람입니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팔굽혀 펴기만 해도 교장실의 전화가 불이 납니다. ‘치마 바람’ 때문에 교육이 안 됩니다. 해병대에서도 엄마들의 전화 때문에 선임과 후임 구별이 안 된답니다.     

이 ‘치마 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예수님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까지 ‘치마 바람’ 이 불어오지 않습니까?  다른 제자들이 다 보는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와서 로비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자기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권력의 자리를 자기 아들들에게 달라는 얘기입니다. 십자가 주님 앞에 명예(名譽)와 권력(權力)을 간구합니다. 

성도여러분,  이것이 그 위대한 모성애(母性愛)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이고 당연한 모습입니다.  너무나 이기적이면서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자녀를 위해서 이 기도를 하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이러한 살로메의 기도는 곧 그녀의 욕심입니다. 사명하고는 참 거리가 멀지요.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는 칭찬할 만합니다.  첫째는,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살로메는 주님이 당연히 이 일을 하실 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본받아야할 점입니다. 
 
성도여러분, 자녀의 영광을 구하는 일은, 솔직히 우리들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살로메의 이기적인 기도는 바로 저의 얼굴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렇게 분명한 약속을 하셨는데도  살로메 먼저 자기 아들들의 영광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순서가 잘못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세상적, 물질적, 세속적인 축복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더해 주시마고 약속을 했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과 세상축복은 좋습니다.  절대 나쁜 기도가 아니지요.  그런데, 순서가 바뀌면 욕심이 사명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기도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도가 됩니다.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청탁을 하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합니다. 당연합니다.  훨씬 앞인 마태 9장에 보면 제자들은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마9;34) 제자들은 초창기부터 이런 문제로 다투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실제로 안수집사 투표에서 떨어졌다고 교회를 옮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장로를 하겠느냐 하다가 자기를 장로 안 시켜 주니까 나중에는 목사님을 대적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또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화를 내십니까? 분노는 욕심에서 나옵니다. 욕심이 어그러질 때, 욕심이 다 채워지지 않을 때 나오는 것이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노로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의 분노를 스스로 ‘거룩한 분노’라고 덧칠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살로메의 요구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놀라운 대답을 하십니다.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잘못 구하는 어머니와 두 아들을 강하게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온유한 어조로 그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성경지식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경지식이 없으면, 성경을 바로 배우지 못하면, 살로메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엉뚱한 기도 잘못된 기도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22절에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당사자인 요한과 야고보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뭐가 할 수 있습니까?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겨우 베드로 한 명만 멀찍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3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이것을 아십니다.  

(막14;27)“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니와”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들이 도망갈 사건에 대해서는 말씀을 안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의 잔을 마실 것을, 그들이 나중에 주님을 위해서 순교할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러면서 (23절)“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이외에는 내가 줄 것이 없다. 내가 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결정을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리배정을 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좋은 자리에 앉기를, 상급받기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하나님나라에서 좋은 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않으실 줄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결정이 납니다.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삼위일체 성자 하나님이시지만은 굳이 모든 것을 성부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27절에 결론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사명의 사람의 마음을 여기서 배웁니다.  ‘으뜸이 되려고 하는 마음’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으뜸이 되느냐 방법이 중요합니다. 

사명의 사람은 첫째로, 고난을 통해서 으뜸이 됩니다. ‘No Cross No Crown’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으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자꾸 높아지려고 하면 오히려 낮아집니다. 정말 우리가 높아지고 으뜸이 되려고 한다면 남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막 10:45)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섬기셨습니다. 섬기기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자꾸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24절 이하에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사실 분히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부탁하든, 예수님이 로비활동에 의해서 좌지우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열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을 때 좋은 자리 잘못하면 다 빼앗기겠구나’ 생각하고 분히 여겼습니다. 그들이 욕심중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적 기준과 주님의 기준의 차이점을 봅니다. 세상의 기준은 25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줄 너희가 알거니와”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  이것이 세상의 기준입니다.  남을 주관하고, 지배하고, 권세를 부리고,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본능적으로 이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은 아닙니다. 

26절에 분명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세상의 기준과 주님의 기준이 완전히 다릅니다.  기독교는 세상적인 의미에서 보면 역설의 진리입니다.  ‘누가 참으로 위대하냐, 으뜸이냐, 최고냐? 세상에서 제일 낮은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위대성은 ‘섬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누가 제일 높습니까? 제일 많이 섬기는 사람, 제일 많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제일 많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제일 높습니다.  아무 봉사도 하지 않는 사람, 그냥 예배만 드리고 아무 기관에 소속도 안하고, 어떤 직책도 피하는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입니다. 
 
이제 ‘사명 과 욕심’ 의 결론입니다.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범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 이며,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런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으뜸이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 여러분은 으뜸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겸손과 섬김입니다. 욕망이 아니라 사명으로 입니다.  우리들의 기도생활은 살로메나 요한과 야고보와  같은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고 깨닫게 되기를, 그래서 욕망의 삶이 아니라 사명의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men.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