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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자 (삼하 18:24-27 눅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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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가져오는자 (삼하 18:24-27 눅 2:8-10)

얼마 전 미국의 예언가 존 티토가 재미있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2036년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예언가입니다. 앞으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변화될 각국의 변화를 지도로 표시하였습니다. 그 지도에 보면 한국영토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 전체와, 러시아 접경까지의 연해주 그리고 중국의 동부 해안선을 따라 나라가 엄청나게 커집니다. 지금 중국의 청도, 상해, 홍콩까지 한국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소식은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도 재미있습니다. “예언이 정말 맞았으면 좋겠다”, “일본이 우리 식민지라니 모처럼 좋은 소식이다”라는 글들이 올라와 있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하는 좋은 소식이지요?
 
좋은 소식을 듣기를 누구나 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소식은 상대적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나쁜 소식도 함께 옵니다. 네티즌들의 글에 반드시 좋은 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3차 대전이 언제 일어난대요?”, “그 때 김정은이 대통령인 거예요?”라는 글도 함께 올라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 좋은 소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절대적 좋은 소식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든 소식이 절대적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이란 말의 헬라어는 ‘유앙겔리온’인데 좋은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2:10에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오심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만민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입니다. 

헬라어로 ‘카란 메가렌’이라 합니다. 메가톤급 기쁨이란 말입니다. ‘카라’란 기쁨이란 뜻인데 여기서 나온 말이 은혜라는 말의 ‘카리스’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고 합니다. ‘유앙겔리조마이’라는 말은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의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바사르’라는 말인데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은 가장 크고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승리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날입니다. 
  
좋은 소식을 들은 하늘의 천사들, 들의 목자들, 동방의 박사들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전하고 만난 예수님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기쁩니다. 지난 월드컵에서 보니 아나운서들이 우리나라가 승리한 것을 전할 때는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이 달라집디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는 기쁘게 전하는 법입니다. 
  
최근에 세계 굴지의 통신사들의 지국이 도쿄나 홍콩에서 서울로 많이 왔습니다. 지국을 한국으로 옮겨서 고맙다고 했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서울에 와야 매일 굵직한 뉴스거리가 많다고 한답니다. 한국은 참 많은 소식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세계가 놀랄만한 뉴스를 매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좋은 소식만은 아닙니다. 
  
뉴스시간에 보면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훨씬 더 많습니다. 누구를 죽였다, 사고로 다쳤다, 배가 침몰됐다, 어느 공장에 불이 났다, 물가가 올랐다, 주가가 내렸다, 여의도 국회가 마비되었다는 등의 소식이 뉴스 시간을 채웁니다. 저는 뉴스 시간이 되면 30분 지난 다음에 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뉴스 보는 심정을 여의도에서 알는지 모르겠네요? 요즘에는 아이돌 가수들의 해외에서의 활약이나 K-팝 때문에 한국에 오는 외국 젊은이들이 좋은 소식입니다. 김연아나 박태환 같은 젊은이들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나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른들만 조금 잘하면 참 잘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다윗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를 문 앞에서 기다립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윗왕에게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려 합니다. 요압 장군은 이를 말리며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마아스가 달려옵니다. 이를 본 파수꾼이 “아히마아스가 달려온다”. “소식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다윗은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고 합니다. 대강절을 사는 우리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배달하는 배달꾼이 됩시다. 

  
첫째, 좋은 소식은 생명을 살리는 소식입니다. 

사무엘하 18:26에는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고 합니다. 다윗이 기다리는 소식이 무엇입니까? 압살롬의 생사에 대한 소문입니다. 압살롬이 살아있다는 좋은 소식을 기대합니다. 다윗의 관심을 단 한 가지입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고 합니다. 파수꾼이 지키고 있는 예루살렘의 내문과 외문 사이에서 다윗은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왕으로서의 체통도 다 버리고 안절부절입니다. 아들의 생명 앞에서 자신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 압살롬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 외의 어떤 소식도 반갑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군대가 승리했다는 소식도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신문이나 TV에서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반갑습니까?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구나’라는 말보다 더 흥분되는 말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언제나 가장 좋은 소식은 생명과 관계되는 말입니다. 
  
작년 8월에 칠레 광산이 붕괴되어 33명이 갱도에 갇혀 있다가 69일 만에 전원이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계적 뉴스거리였습니다. 한 편의 휴먼 드라마였습니다. 지난 10월의 터키 지진 때는 집이 붕괴된 지 8시간 만에 9세 소년이 구출되었습니다. 47시간 만에 생후 2주 된 아기가 구출되었습니다. 108시간이 지난 다음에 13세 소년이 구출되었습니다. 이런 생명의 소식에 세계가 흥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을 살리는 소식은 언제나 좋은 소식입니다. 생명을 얻은 소식은 누구에게나 흥분이 됩니다. 온 천하의 온갖 소식도 생명보다 못합니다. 마태복음 6:25에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합니다. 

마태복음 16:26에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합니다. 가장 귀한 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구한 이야기는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는 법입니다. 우리 옛말에도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흔히 무슨 말을 하다가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영혼의 생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친척,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이웃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지, 영혼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생사 소식에 촉각을 세우고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그들의 영혼의 생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그들의 영혼이 살았다는,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그들이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소식을 듣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소식을 전하러 이 당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에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요한복음의 대표적 주제입니다. 헬라어로 육체적 생명을 ‘비오스’라고 하고, 영적 생명을 ‘조에’라고데 ‘조에’는 복음서에 52회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36회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라는 말씀이 일곱 번 있는데 그 중에 세 번이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원히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생수이십니다. 살아 있는 떡이십니다. 영이요 생명이십니다. 영생의 말씀을 주십니다. 요한복음은 온통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생명은 내 것이다”고 하십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시편 36:9에는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합니다.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으며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찬송가 509절 1절에는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 나간 아들 돌아왔도다”라고 합니다. 2절에는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 돌아온 자 받아주신다”고 합니다. 옛날 찬송의 가사는 “먼데 죄인 돌아왔도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천국 종을 다 치겠습니까? 하나님은 천국의 종을 치시며 “다 모여라”고 하셔서 최고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한 생명이 또 구원받았다는 하나님의 기쁨 때문입니다. 
  
생명나무, 생명 샘, 생명 강 이 모든 것이 하늘나라의 풍경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가족, 친척, 이웃 모두의 생명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에서 함께 생명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생명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들에게 생명으로 오신 성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좋은 소식은 좋은 사람이 가지고 옵니다. 

사무엘하 18:27에는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다윗의 간절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아군이 패배하면 여러 명의 패잔병이 도망쳐 올 것입니다. 아군이 승리하면 한 사람이 승리의 소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다윗에게 무엇이 승리이겠습니까? 다윗에게 승리는 아군의 승리나 자신에게 반역한 압살롬의 패배와 죽음이 아닙니다. 다윗이 기대하는 유일한 승리는 아들 압살롬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 오느니라”고 합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다윗이 인정하는 좋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의 소식에는 승전보가 담겨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소식을 전해야 좋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쁜 소식을 전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52:7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은 좋은 발입니다. 예쁜 발은 복음을 전하는 발입니다. 
  
여러분은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발을 보았습니까? 저는 봤습니다. 진짜 발은 못 봤지만 TV에서 보았고,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오랜 훈련에 발은 상처투성이고, 옆이 튀어나와서 뭉개진 발이지만 이런 발이 아름다운 발입니다. 그 발에는 열정이 묻어 있고, 아름다움이 서려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좋은 소식이니까요.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정보사회는 정보가 중요합니다. 정보를 전해 주고, 스마트환경을 알려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마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마트에 복음을 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마트가 아무리 좋아도 좋은 소식을 담지 않으면 참 좋은 것은 아닙니다. 스마트가 복음을 담아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도구인 것입니다. 
  
존 하워드 요더(Yoder)는 교회는 단순히 화해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신문사나 방송국은 소식을 받아 전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소식을 통하여 변화되고, 구원받고,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사회적 완전체로 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을 빼면 세상에서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9에는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좋은 소식 전하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바울의 열망을 모두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이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 모두가 좋은 사람이 됩시다. 
  
제인의 부모는 딸의 남자 친구가 몹시 못 마땅했습니다. 몸에 문신을 하고, 말끝마다 욕을 하고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인의 어머니가 제인에게 “얘, 그 사람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제인은 “엄마,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면 왜 사회봉사를 500시간이나 하고 있겠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 말고 정말 좋은 사람이 하나님께 필요합니다. 사회봉사보다 복음봉사 열심히 하는 좋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복음으로 섬기는 좋은 사람이 하나님께는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3:18에는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을 두고 한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였습니다. 복음으로 볼 때 정말 좋은 사람은 부지런히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자기들과 놀기 좋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기 좋아하시는 좋은 사람이 됩시다. 

  
결론 

미국의 어느 홀어머니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세 아들은 모두 주님께 헌신된 자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세 아들을 모두 주님께 바쳤습니다. 어느 날 큰아들이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큰 아들이 아프리카의 식인종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아들이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을 감사하며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둘째 아들이 또 아프리카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둘째도 마찬가지로 식인종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막내인 셋째가 다시 아프리카로 복음을 전하러 가서 역시 죽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친구가 물었습니다. “너는 세 아들이 복음 사역을 하다가 모두 죽었는데 후회하지 않니?” 그 때 그녀의 대답은 “넷째 아들이 없는 것이 너무 후회스럽단다”였습니다. 그녀는 “주님! 온 세상을 모두 주님께 드려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좋은 사람의 기도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가 있을까요? 전하는 것이 좋은 소식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다가 죽은 아들들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던 좋은 아들들이 더 좋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9에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고 합니다. 가브리엘은 메신저 역할을 하는 천사장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성탄의 계절, 복음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좋은 사람들이 됩시다. 생명을 살리는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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