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라 (벧후 3:8-14)

첨부 1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라 (벧후 3:8-14)


베드로후서가 보내질 당시 그 편지를 받아볼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혹독한 박해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을 영광에로 이끌어가 주시기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자신도 당신이 다시 오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사도들도 그것을 말하며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기대하는 만큼 빨리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실현되기가 왜 이렇게 더딘가?” 하는 그들의 실망과 의구심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며 멋대로 살면서 기독교인들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신자들의 믿음은 더욱 흔들릴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들이 미혹되지 않고 믿음을 더욱 굳게 지키게(벧후3:17) 해주기 위한 편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보다 몇 절 앞서는 3-4절을 보면 그 미혹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심판과 멸망과 연관되어 있기에 그의 재림을 부인하는 것은 곧 심판과 멸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한 것은 주께서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고 이 세상의 멸망할 것들을 멸망시키시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며 이 세상은 처음 창조될 때나 다름없이 그대로 존속되리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 베드로후서는 옛날 노아 시대의 홍수로 세상이 멸망했던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며 재림과 심판과 멸망을 부인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음에 이 세상을 멸망시키실 때에는 불을 사용하실 것인데 아직은 심판 때까지 내버려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직전의 6-7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만유의 창주자로서의 하나님의 만유에 대한 주권과 권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실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일도 없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며 새롭게 하실 일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은 결국 방종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선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실현되기가 왜 이렇게 더딘가?” 의문을 품는 신자들에게 그 더딤의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많은 오해를 낳기도 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을 다루시는 것은 우리가 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 년 같은 세월을 하루처럼 여기기도 하시고 우리에게 하루 같은 시간을 천년처럼 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간을 이해하는 잣대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글의 진정한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두고 참지 못하고 조바심내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너희는 지금 못 참아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얼마나 참고 계시는 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천년이나 되는 듯 견디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천년을 하루처럼 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주님의 강림과 의의 심판과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일이 왜 이리 늦어지냐고 하루가 천년이나 되는 듯 못 견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가 회개하고 주님의 강림과 의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도록 믿음의 준비를 하기를 바라시며 천년을 하루처럼 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는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하루를 천 년같이 여기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깊고 크신 마음과 그 은혜를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디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우리는 답답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우리를 위해 유익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는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고 관심도 없으신 것 같으며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조차 의심스럽게 여겨지는 일들 속에서도 언제나 깊은 뜻과 섬세한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같은 뜻으로 본문 마지막 절 바로 뒤에서는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 때임을 알고 그 때를 회개와 구원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또한 우리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며 아직 오지 않고 있는 주의 강림의 날, 의의 심판의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날, 하나님의 날은 반드시 오는 것이고 그 때는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10절을 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한 말의 뜻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이 지금 이대로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뜻을 거역하며 만들어가는 이 세상을 그대로 존속하게 하시고 그런 세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하나님이 결코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의의 심판을 하시고 불에 던져 태워 없애실 것은 다 불에 던지시고, 녹아 사라져야 할 것은 다 사라지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본문 12절 하반절과 13절에서는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합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은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상태를 연상시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창조 이전의 상태처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이루어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12-14절에서는 “바라본다”는 말이 매 절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의의 심판을 하시고 이루실 새 세상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새 세상은 의가 있는 곳이라 했습니다. 주님은 오셔서 의로운 세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 우리가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면 그 기다림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새 세상이 이루어질 날을 믿고 기다리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 마땅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1-12절을 다시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또 1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고 의의 심판을 하시며 새 세상을 만드실 것이고 그날이 도둑같이 올 것을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주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남는 길은 결국 자포자기 아니면 방종, 그리고 파멸의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강림도 없고 의로운 심판도 없으며 이 세상이 의롭게 변화할 가능성도 없다면 이 악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저 이 악한 세상에 적응하며 적당히 악과 타협하며 살려고 할 것입니다. 의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므로 부패에 대한 분노도 불의에 대한 분개도 악에 대한 투쟁의 의지도 없이 그저 현재에 만족하거나 방종하게 사는 것으로 낙을 삼든지 아니면 낙심과 절망 속에 자포자기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부패하고 불의하며 변화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믿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는 이 사회를 새롭게 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사회를 의가 있는 사회로 만드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 부패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당한 모든 억울함과 고통을 다 씻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날을 믿고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시고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꼭 그 마지막 날에만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오심을 필요로 하고 간구하는 모든 때 모든 일에 우리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주시며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참으로 어둡고 어지럽습니다. 혼돈과 혼란과 무질서와 무지와 억지와 폭력이 법과 질서와 상식과 대의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더욱 더 의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믿음은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믿음으로 오늘의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북통일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래 기도하며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북통일을 주시기가 왜 이리도 더딘가 하는 의문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문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으심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통일이라는 상황을 감당할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아직도 참고 계신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아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만이라도 주님의 오심을 믿는 이들에게 마땅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갖춘다면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이라는 귀한 선물을 언제든지 주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남과 북의 동족 사이에 도둑같이 임할 주의 날을 믿으며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튼튼히 서기를 다짐하는 이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